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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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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지음

멈춰진 시간과 젊음을 둘러싼 추문

도미노 총서 2권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미술을 살핀다. 이 시기 동안 미술을 지탱해온 제도는 과거의 기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격변을 겪었으며, 이는 고스란히 미술관은 물론 미술가 개개인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파급력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20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서울의 미술계에는 ‘젊은 미술가’라는 유령이 떠돌았다. 실제로 젊은 미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늘기도 했지만, 그만큼 미리 구획해놓은 빈자리에 젊은 미술가들을 한 덩어리로 뭉쳐 넣으려는 압력도 강했다. 여기에는 분명 시간의 흐름이 정체되고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갑작스런 미래의 등장으로 현재의 무기력을 날려보내고 싶다는 조바심도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요컨대 ‘젊은’이라는 수식어가 ‘미술가’에 대한 논의를 집어삼킨다는 것,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가짜 새로움과 가짜 미술을 범람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논란 속에서 어떤 미술이 있었는가? 또는 그 와중에 미술은 어디” 있었는지 다룬다.

그러기 위해 저자는 “먼저 ‘젊다’라는 형용사에 달라붙은 반짝이 가루를 좀 떼어낼 필요”를 느낀다. 세대에서 세대로 교체되며, 사회를 작동시켜온 “미래주의의 사자”로서 젊은이는 화려한 무대 위의 배우와 다름없었다. “지난 20세기가 젊은이의 시대였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무대장치가 그동안 잘 작동했음을 의미한다. 역으로 2010년대에 젊음이 추문을 몰고 다닌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이 장치가 오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젊음은 더 이상 미래와 결부되지 않는다. 미래의 빛은 꺼져버리거나, 또는 오히려 늙음과의 관계 속에서 가시화된다.”

과거의 구멍으로서 폐허와 항산화제로서 미술

시간의 수레바퀴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단적이 예가 있다. 바로 폐허이다. 2000년대 들어 폐허는 각종 미술 및 문화 공간의 배경이자, 해독 불가능한 과거의 기호를 간직한 매혹적인 공간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폐허는 미래가 제때 도착하지 않은 탓에 드러나는, 과거의 흔적이기도 하다. 저자는 1장 「매혹하는 폐허」에서 “서울의 도시 재생 정책이 어떻게 미래주의의 연장선에서 폐허를 양산하게 되었는지” 돌아보며, “당시 상황에서 미술의 실제적 효용은 도시 내에서 용도를 잃고 방치된 빈 공간들을—그대로 내버려두면 폐허가 되어 안 그래도 불확실한 미래의 전망을 좀먹을 잠재적 구멍들을—값싸고 보기 좋게 틀어막”는 데 사용된 항산화제였다고 말한다. 이어 몇몇 기관과 미술가들의 사례를 짚으며 “지난 10여 년 동안 폐허를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와 분화가 미술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되돌아본다.”

2장의 제목 ‘가장 희미한 해’는, 의미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가장 기억이 나지 않는 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아주 먼 과거일 수도 있지만 의외로 가까운 과거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동안 기억을 유의미한 것으로 기록하거나 재생산하는 법을 거의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말로 가까운 과거, 바로 2015년에 인사미술공간, 백남준아트센터, 시청각에서 열린 세 개의 전시를 통해 “과거에 대한 제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현재를 위치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적 틀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이자 동시대 미술 매체로 자리 잡은 ‘문서’에 주목한다. 작고 미약한, 곧잘 실패하곤 하는 문서들이 기억의 망각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탐색하고, “시간의 매체로서 문서가 거쳐온 지난 10여 년간의 작은 역사를 복원한다.”

3장 「제도가 유령이 될 때」에서는 본격적으로 사회 제도 내에서 미술이 처한 위상 변화를 논하며 2010년대는 미술이 더 이상 생산과 순환, 소비 모든 측면에서 특권적 위치를 잃고 “문화 산업의 일원으로 용해되어가는 시간”이었음을 밝힌다. “그 속에서 미술 제도의 크고 작은 구성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시간을 이어나갈 수 있는 나름의 길을 찾아야 했으니, 미술관, 상업 화랑, 대안 공간, 심지어 미술 생산의 최소 단위로서 미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장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대표되는 가장 유서 깊은 미술관의 선택과 이른바 ‘신생 공간’으로 대표되는 가장 젊은 미술가들의 선택을 대조하면서 오늘날 미술이 처한 상황을 가늠해본다.”

마지막으로 「부연: 광관객의 시점」에서는 서울을 찾은 한 외계인 인류학자의 “서울의 미술은 어디에 있지요?”라는 무고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단순히 서울에서 미술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 뜻으로도 읽히는 이 질문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1980년 후반부터 어떤 위상 변화를 겪어왔는지, 그 와중에 국가와 다른 지방 도시, 혹은 세계의 다른 도시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 속에서 서울의 미술은 어떤 전략을 취해왔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성급한 결론을 앞세우는 대신 “한 도시의 자기 표현적이고 자기 상상적인 활동으로서 어떤 ‘서울의 미술’이 태동하고 쇠퇴하기까지의 시간을 예시”하며 “과거의 미래주의들이 남기고 간 잔해에서 돋아난”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다.

도미노 총서에 대하여

2011년 창간 때만 해도 『도미노』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목한다 한들 그 정체를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만큼 형식과 내용, 편집 동인과 필자 등 모든 면에서 낯선 잡지였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내용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도나 권력의 부름을 받지 않은 일군의 젊은 필자들이,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고민하고, 세상을 향해 발하는 자생적인 목소리. 성 소수자, 페미니즘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필자들이 내놓는 독특한, 가볍거나 무거운, 뜨겁거나 차가운 목소리는 디자이너 듀오 홍은주 김형재의 손끝을 거쳐 세상에 나왔고, 문화계 변방에서 외연을 넓혀온 ‘독립 잡지’ 특유의 에너지를 내뿜으며 호를 거듭할수록 주목을 받았다.

『도미노』가 창간된 지 어느덧 5년,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선 그들이 꾸준히 탐색해온 세상의 수상한 움직임들이 점점 현실화되었다. 2000년대 말부터 격화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균열은 점점 커다란 파열음을 내고 있으며, 늙어가는 세대는 청년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청년들을 찾는다. 우리는 IS의 등장이나 브렉시트와 함께 전 세계적 시스템의 붕괴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으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소통과 혐오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간다. 기존 제도는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나 이 혼란의 밧줄을 끊어주길 (혹은 끊어진 밧줄을 이어주길) 바라지만,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짓눌려 그 공식만을 답습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곤 한다.

이제 도미노는 전열을 정비하고 총서의 형태로 세상에 선을 보인다. 인문, 사회, 문학, 미술, 여성사 등 『도미노』가 다뤘던 거의 모든 이슈를 총괄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의 활동을 갈무리하고, 다가올 시간을 맞이하며, 다양한 문화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것이 아닌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총서가 될 것이다.


발췌

눈에 띄는 젊은 미술가가 없다는 말은 2010년대 전반기에 공공연하게 들리던 불평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떠받칠 젊은 미술가들을 수급하지 못해 조바심 내는 미술이란 대체 무엇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미술가들이 수행적으로 발견해나가는 미술은 또 무엇인가?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미술, 두 개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이 시간들은 때로 동일한 전시에, 심지어 동일한 작업에 중복 투영되면서도 서로 마주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미술을 쇠락한 구도심에 개입시키는 것만으로 지역 재생, 문화 생산, 새로운 경제적 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너무 훌륭해서 쉽게 믿기 어렵다. 그것은 삶과 예술이 합일되어야 한다는 오랜 유토피아적 비전과도 부합하고, 문화 예술이 사회의 특별한 외부로서 유리되거나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컬처노믹스’ 또는 ‘창조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과도 잘 어울린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당시 상황에서 미술의 실제적 효용은 도시 내에서 용도를 잃고 방치된 빈 공간들을 — 그대로 내버려두면 폐허가 되어 안 그래도 불확실한 미래의 전망을 좀먹을 잠재적 구멍들을 — 값싸고 보기 좋게 틀어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간의 불가능성, 또는 문서에 대한 불신, 말하자면 문서가 시간을 구축하는 분절과 조립의 단위로서든 아니면 다른 시간으로의 출구를 내는 계기로서든 유의미하게 작동하지 못하리라는 의혹은 언제부터 발생한 것일까? 문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공기 중을 떠다니다가 적당히 쌓여서 뒹구는 먼지 덩어리 같은 것이 되었을까? 분명 문서의 가치가 급락하는 불연속면이 어딘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통의 시간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가로지르는 어떤 수평선이 아니라, 바로 그런 공통의 시간이 휘발된 곳에서 각자의 타임라인에 출몰하거나 또는 출몰하지 않는 낮과 밤의 흐릿한 경계에 가깝다.

미술관은 여전히 미술 제도의 상징적 거점이지만, 그것은 더 이상 ‘미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든 것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최종 종착지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 수많은 신흥 대도시들이 부상하고 거기에 다시 수많은 미술관들이— 심지어 프랜차이즈 형태로 — 만개하는 상황은 차라리 100여 년 전 영화관이 현대 대도시의 필수요소로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가던 시절을 상기시킨다. 미술관들은 미술을 유통하는 국제적 네트워크의 일부인 동시에 미술 제도가 대중매체와 접합되는 최전선으로서, 오늘날 미술 제도의 혼성성과 분산성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추구되는 것은 총체성이 아니라 차별성이고, 자족성이 아니라 적합성이다.

애초에 2010년대의 상황은 제도가 변화를 거부하면서 시간이 정체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관과 미술가들은 고도로 산업화된 시각예술 복합체에 포위되어, 문화 산업과 공생하거나 경쟁하거나 또는 그 경쟁을 면제받을 수 있는 위치를 찾아야 한다는 공통의 압박에 시달렸고, 그 속에서 어떤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받았다. 여기서 미술관은 문화 소비자인 관객의 시점에 맞추어 미술의 서비스를 강화하고 이를 위해 더 화려하고 거창하게 몸집을 불리는 편을 택했다. 그러나 여타 문화 산업의 기획사나 제작사에 해당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상태에서 — 다시 말해 대다수의 미술가들이 여전히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미술을 생산하는 상황에서 — 미술관에 맞추어 자신을 팽창시킬 수 있는 미술가들은 많지 않았다.


차례

들어가며: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서문: 젊음을 둘러싼 추문

1장 매혹하는 폐허
근대화의 유산
항산화제로서의 미술
폐허에서 사는 법:
간판, 깃발, 인터넷, 드로잉

2장 가장 희미한 해
미래를 넘어선 미래
전시 바깥의 시간들
문서의 임무

3장 제도가 유령이 될 때
미술관의 작은 역사
동굴의 우화
환경 디자인 또는 신생 공간들

부연: 관광객의 시점

도판 목록


지은이

윤원화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키틀러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 강의록 『광학적 미디어』(2011)를 비롯하여 『하이테크네』(2004, 공역), 『컨트롤 레벌루션』(2009), 『청취의 과거』(2010), 『기록시스템 1800.1900』(2015) 등이 있다. 현재 미술, 시각문화, 미디어 관련 번역가 겸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

박활성

디자인

홍은주 김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