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한 작업으로부터

포기한 작업으로부터
Collection of Short Prose

사뮈엘 베케트 지음, 윤원화 옮김, EH 사진

사뮈엘 베케트의 단편집 『포기한 작업으로부터』가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단편소설부터 산문과 시에 가까운 글까지 베케트의 잔여물 같은 글들 10편을 한데 모은 책이며, 책 뒤에 실린 옮긴이 윤원화의 해설을 통해 베케트의 초기 단편부터 후기 산문까지 궤적을 상세히 짚어 볼 수 있다 .

베케트의 파편들

책 앞부분에 실린 「승천」(1929), 「앉아 있는 것과 조용히 하는 것」(1932), 「텍스트」(1932), 「천 번에 한 번」(1934)는 베케트의 초기 단편들이다. 이 글들은 베케트의 첫 단편집 『발길질보다 따끔함』(1934)과 비슷한 시기에 쓰였고, 『발길질보다 따끔함』의 커플 벨라콰와 스메랄디나는 「앉아 있는 것과 조용히 하는 것」에서 처음 등장했다.

베케트는 이후 193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영어로 장편소설 『머피』와 『와트』를 썼고, 프랑스어로 장편소설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썼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에 「포기한 작업으로부터」를 발표하기 전까지 10여 년간 영어로 신작을 쓰지 않았다. 이 책에 실린 「포기한 작업으로부터」는 한 젊은 남자와 그의 부모를 회상하는 이야기로, 늙은 남자인 화자는 자신의 기억을 낯설게 되짚는다.

1960년대에 베케트는 연극, 라디오극, 텔레비전극, 영화 각본을 썼다. 그리고 당시 그가 쓰고 있던 장편의 일부가 이 책에 실린 영어 단편 「모든 이상한 것이 사라지고」(1963~4)와 프랑스어 단편 「죽은 상상력 상상해 보라」(1965)로 만들어졌다. 두 글 모두 사방이 막힌 최소한의 공간에 벗은 몸을 접어 넣는다는 발상에서 출발하는데, 「죽은 상상력 상상해 보라」가 간결하다면 「모든 이상한 것이 사라지고」는 보다 질척거린다. (「죽은 상상력 상상해 보라」는 『죽은-머리들 / 소멸자 / 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임수현 옮김, 2016, 워크룸 프레스]에 한국어로 번역 수록되었다.)

1973년작 「이야기된바」는 자살한 시인 귄터 아이히에게 헌정된 산문이다. 죽을 때까지 말하도록 고문당하는 사람이 있고, 화자는 들은 대로 말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1981년작 「천장」은 화가 아비그도르 아리카의 작품집에 수록된 산문이다. 하얀 천장과 마주한 의식의 흐름이 담겨 있다.

나갔다 돌아오는 움직임을 다르게 반복해 보다가 멈추기. 베케트가 젊은 시절 탐구했던 이 상태는 후기작 「어느 쪽도 아닌」(1976)에 재등장한다. 베케트는 실험 음악가 모튼 펠드먼을 위해 이 문장들을 적었고, 펠드먼은 이를 바탕으로 음악극을 만들었다. 이 책 맨 끝에 수록된 후기작 「길」(1981) 역시 나갔다 돌아오는 움직임을 반복하며 추상화한다.


발췌

아니,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으니, 내가 후회하는 것은 단지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고, 죽어 가는 것은 이토록 길고 지루한 과업임을 늘 깨닫는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떠나온 지점을 붙들고 가자, 백마 그리고 격분, 연관성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 이 모든 것을 계속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언젠가 끝내야만 한다면, 어째서 지금은 안 되는가. 하지만 이것들은 생각이고, 나의 것이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니, 내가 부끄럽다. 지금 나는 늙고 허약하고, 고통받고 허약한 채로 어째서라고 웅얼거리고 멈추고, 오래된 생각들이 잔뜩 떠올라 내 목소리로 번지니, 나와 함께 태어나 나와 함께 자라고 억눌러졌던 오래된 생각들, 또 다른 것들이 있다. 아니, 그 머나먼 날로 돌아가, 어떤 머나먼 날이든 간에, 그 흐릿하게 허락된 땅에서 거기 존재하는 것들과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리고 다시 내렸다가, 다시 들어 올리고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고, 어디로도 가지 않는 발은 오로지 어떻게든 집으로 향하고, 아침이면 집에서 나갔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오고, 내 목소리는 하루 종일 내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심지어 내 것도 아닌, 오래된 똑같은 것들을 웅얼거리고, 그러다 보면 하루의 끝에 다다르니, 그것들은 꼬리가 복슬복슬한 마모셋 원숭이가 내 어깨 위에 앉은 것처럼, 나와 함께한다. 이렇게 계속 말하고, 아주 낮고 쉰 목소리로 말하니, 내가 목이 따가운 것도 당연하다.
(「포기한 작업으로부터」, 52~3쪽)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완결되지 않고 완전히 명백하지 않고 거의 변할 것 같지 않다면 아마도 완벽을 향하지 않는 한 아마도 어떻게든 빛이 갑자기 어슴푸레 들어오지 않는 한 아마도 더 잘 고정되고 이 모든 것이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가서 완전히 차고 텅 비고 좋고 더 나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많고 변함 없는 검정색 또는 번쩍이는 빛 하나 또는 다른 하나 또는 변하지 않는 두 개의 부드러운 하얀색 사이 그러나 당분간 처음에 보였던 대로 놔두고 결코 의심 없이 천천히 30초 동안 켜고 끄기 눈부신 빛과 검정색으로 일정 시간 천천히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잿빛을 거쳐 무로부터 아직 상상된 적 없는 이유로. 잠이 흔들리고 이제 얼마 동안 이제 상상할 수 없는 악몽을 더하고 달콤하게 잠을 깨우고 누운 채 깨어 있다가 이윽고 악마들을 무서워하며 다시 잠을 갈망할 때까지, 아마도 악마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슬쩍. 그리고 무서움은 지금 원형 건물에서 갈망과 달콤한 안도감 그러나 너무나 희미하고 허약하니 온실 나뭇잎의 연약한 떨림과 다를 바 없는. 과거의 크나큰 행복에 대한 기억 아니 나란히 누운 슬픔의 희미한 잔물결 그 희미한 것을 제외하고, 이것은 나중에 더 자세히 보자.
(「모든 이상한 것이 사라지고」, 72~3쪽)

처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하얀색의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 처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흐릿한 하얀색의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는 동안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계속된다. 결국 그것들이 열리고 이 흐릿한 하얀색과 마주친다. 의식이 들어온 것을 향해 눈길을 준다. 결국 그것들이 열리고 이 흐릿한 하얀색과 마주친다. 희미한 의식이 부분적으로 들어온 것을 향해 순순히 눈길을 준다. 결국 순순히 그것들이 열리고 이 흐릿한 하얀색과 마주친다. 더는 갈 수 없다. 희미한 의식이 부분적으로 들어온 것을 향해 뜻밖에 눈길을 준다. 결국 뜻밖에 그것들이 열리고 이 흐릿한 하얀색과 마주친다. 더는 갈 수 없다.

계속.
(「천장」, 89쪽)


차례

승천
앉아 있는 것과 조용히 하는 것
텍스트
천 번에 한 번
포기한 작업으로부터
모든 이상한 것이 사라지고
이야기된바
어느 쪽도 아닌
천장

해설
작가 연보
작품 연표


지은이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89)는 1906년 4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 남쪽 폭스록에서 유복한 신교도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과 이탈리아문학을 공부하고 단테와 데카르트에 심취했던 베케트는 졸업 후 1920년대 후반 파리 고등 사범학교 영어 강사로 일하게 된다.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제임스 조이스에게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에 대한 비평문을 공식적인 첫 글로 발표하고, 1930년 첫 시집 『호로스코프』를, 1931년 비평집 『프루스트』를 펴낸다. 이어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되지만 곧 그만두고, 1930년대 초 첫 장편소설 『그저 그런 여인들에 대한 꿈』(사후 출간)을 쓰고, 1934년 첫 단편집 『발길질보다 따끔함』을, 1935년 시집 『에코의 뼈들 그리고 다른 침전물들』을, 1938년 장편소설 『머피』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발판을 다진다. 1937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며 프랑스에서 전쟁을 치르고, 1946년 봄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후 198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수십 편의 시, 소설, 희곡, 비평을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갈아가며 쓰는 동시에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스스로 번역한다. 전쟁 중 집필한 장편소설 『와트』에 뒤이어 쓴 초기 소설 3부작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프랑스 미뉘 출판사에서 출간되고, 1952년 역시 미뉘에서 출간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파리, 베를린, 런던, 뉴욕 등에서 수차례 공연되고 여러 언어로 출판되며 명성을 얻게 된 베케트는 1961년 보르헤스와 공동으로 국제 출판인상을 받고,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희곡뿐 아니라 라디오극과 텔레비전극 및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직접 연출하기도 했던 그는 당대의 연출가, 배우, 미술가, 음악가 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평생 실험적인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1989년 12월 22일 파리에서 숨을 거뒀고,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옮긴이

윤원화는 시각 문화 연구자로 주로 동시대 서울의 전시 공간에서 보이는 것들에 관해 글을 쓴다. 저서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2016),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2017),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2018), 역서 『청취의 과거』(2010),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2011), 『기록시스템 1800 · 1900』(2015) 등이 있다.

표지 사진

EH(김경태)는 사진가,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중앙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스위스 로잔 예술 대학교(ECAL) 대학원에서 아트 디렉션을 전공했다. 「스트레이트—한국의 사진가 19명」,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등 여러 전시에 참여했으며, 작품집으로 『온 더 록스』와 『로잔 대성당 1505~2022』가 있다.


편집

김뉘연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