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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한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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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한 천사들
Des anges mineurs

앙투안 볼로딘 / 번역 이충민

“우리를 홀리고, 생의 마지막 나날을 경험케 하며, 무호흡의 세계에 빠져들게 하는, 마법 같은 책.”
— 『리베라시옹』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 1950~ )은 40여 편의 소설을 쓴 프랑스 작가로, 볼로딘의 수많은 작품 중 국내 처음 소개되는 『미미한 천사들』은 그가 평생 다룬 주제 대부분이 압축된 다이제스트 또는 백과사전과도 같은 책이다. 즉 『미미한 천사들』은 프랑스 현대 소설의 일반적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있는 볼로딘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입문하기에 가장 적절한 책으로 꼽힌다.

『미미한 천사들』은 볼로딘의 작품 세계 기조를 이루는 ‘포스트엑조티시즘(post-exotisme)’의 기점이 된 작품이다. 10여 년에 거쳐 서서히 구축된 포스트엑조티시즘의 주제들이 집대성된 이 책으로 볼로딘은 1999년 베플레르 상과 2000년 리브르 앵테르 상을 받았고, 이후 소설을 출간할 때마다 언론과 학계의 조명을 고루 받고 있으며, 2014년 『찬란한 종착역』으로 메디치 상을 수상한 이후 과거 작품 대부분이 문고판으로 재간되는 등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40여 편 소설 속에 몽환, 주술, 정치, 재앙, 블랙 유머로 빚어진 문학적 평행 우주 ‘포스트엑조티시즘’의 기점이 된 작품

볼로딘 작품 세계의 핵심 축인 ‘포스트엑조티시즘’은 30여 년 전부터 소설, 나라(narrat), 로망스, 샤가, 노호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들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들의 대변인 앙투안 볼로딘에 따르면 암약하는 포스트엑조티시즘 작가는 수십 명에 달한다. 볼로딘은 언제나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해 자신이 이 작가 공동체의 일원임을 드러내며, 일종의 공동 창작이므로 개별 저자의 이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혹자들은 이 공동체에 속한 이름들이 모두 볼로딘의 필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포스트엑조티시즘이라는 명칭은 1990년대 초반 작품의 장르를 묻는 질문에 볼로딘이 ‘무정부주의적-환상적 포스트엑조티시즘’이라고 대답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볼로딘에 따르면 포스트엑조티시즘은 장르도, 유파도 아니다.

“포스트엑조티시즘은 문학사조나 문체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원산지 표시라고 생각하도록 하죠. (…) 포스트엑조티시즘 작품이란 ‘다른 곳’에,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토에서 나오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포스트엑조티시즘 작품은 정의상 외국 문학이며, 모든 번역된 외국 문학처럼 실제 자기 모습의 일부분만을 독자에게 제공합니다.” (앙투안 볼로딘)

따라서 포스트엑조티시즘 작품을 달리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가는 다른 곳의 문학”, “20세기의 전쟁, 혁명, 인종 청소, 패배에 기억의 뿌리를 두고 있는 국제주의적 · 세계주의적 문학”, “프랑스어로 쓰인 외국 문학”, “몽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밀접하게 뒤섞는 문학”, “공식 문학과 단절하는 쓰레기통의 문학”, “곱씹기 · 정신적 일탈 · 실패의 감옥 문학”, “샤머니즘과, 볼셰비키적 샤머니즘과 중요한 관련이 있는 소설적 건축물”…

이러한 “다른” 세계, 포스트엑조티시즘에서는 같은 이름이 여러 작품에 나온다. 하지만 볼로딘은 이는 동명이인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또한 러시아, 중앙아시아, 한국, 마카오, 라오스, 몽골 등을 연상시키는 인명과 지명이 나오지만 이것들이 결코 특정 국적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배경이나 소재도 엇비슷해 서로 연결된 듯할 때도 있지만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이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볼로딘의 주장대로라면 그의 작품들은 (동일 인물이 여러 작품에 등장하면서 하나의 우주를 공유하는) ‘연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면서, 결국 연작 비슷한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작품들은 여러 “평행 우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된다.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가는 다른 곳의 문학

“49편의 글로 된 사진.” (앙투안 볼로딘)

“나는 100퍼센트의 포스트엑조티시즘 텍스트를 ‘나라(narrat)’라고 부른다. 어떤 상황, 감정을 포착해서 고정해주는, 기억과 현실 사이, 상상과 추억 사이의 흔들림을 포착해서 고정해주는 소설적 스냅사진들을 ‘나라’라고 부른다. 이 시적 시퀀스를 바탕으로 독자는 물론이고 플롯의 연기자들 역시 어떤 몽상이든 펼칠 수 있다. 이렇게 글로 고정된 순간 중 마흔아홉 개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 9쪽)

『미미한 천사들』은 49개의 ‘나라(narrat)’로 이루어져 있다. 등장인물이 한 편씩 들려주는 이 49개의 이야기 뭉치 내지 소설적 스냅사진들은 문명이 막을 내린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근원을 알 수 없는, 황폐화된 곳에서 시들어가는 인류의 초상을 그린다. 인간의 세상이 곧 사라지려 하는 이때 마지막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방랑자들의, 주술사들의, 음악가들의, 작가들의, 희망을 잃고서도 읊조리는 목소리들. 환각에 사로잡혀 스러져가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죽음 앞에서 삶을 꿈꾸고, 블랙 유머 위에 시적 소설을 세운다.

이 책은 가운데 25장을 중심으로 대칭적 피라미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즉 1장과 49장이, 2장과 48장이, 3장과 47장이 연결되며 짝을 이룬다. 하지만 이 49개 이야기가 모두 동일한 우주를 배경으로 진행되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다른 세계” 내지 “평행 우주”는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 상상과 현실, 나와 너, 저자와 인물의 구별 없이 전개된다. 인물들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주술적 무아지경, 생사경, 백일몽 속에 있다. 볼로딘은 이 암울한 세계 속의 SF적, 환상적 포스트엑조티시즘 서사는 다른 세계, 평행 우주로의 ‘여행’을 통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현실도피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내 모든 인물들이 선택하는 구원은 한편으로는 파괴의 언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를 통해 다른 평행 우주에, 살 만한 꿈의 우주에 다이빙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탈출구는 현실 부정이라는 잠정적 피난처입니다. 문학적, 이데올로기적 상상물을 만들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죠. 현실 부정은 생존 기술입니다.” (앙투안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은 환희의, 매혹적인, 관능적인, 정신착란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끝을 말하는 책이다.


발췌

스스로에게 진실을 감춰봐야 소용이 없는 법. 몸이 반응하는 게 예전 같지 않다. 이제는 울음이 잘 안 나온다. 다른 곳 못지않게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달라졌다. 길거리는 비었고, 어느 도시든 이제 사람은 거의 없고, 시골이나 숲에는 더더욱 없다. 하늘은 환해졌지만 여전히 희끄무레하다. 거대한 시체 매립지들의 독기는 수년간 쉼 없이 불어온 바람에 씻겨 나갔다. 어떤 광경들은 아직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어떤 광경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이들은 죽었다.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당장이라도 오열이 터질 것 같은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눈물 조절사에게 가봐야겠다. (11쪽)

여기 니콜라이 코치쿠로프, 일명 아르티옴 베시올리가 잠들다, 여기 그를 구타한 개새끼들과 그를 살해한 개새끼들이 잠들다, 여기 짭새들이 축제를 중단시켰을 때 콤소몰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던 아코디언이 잠들다, 여기 피 웅덩이가 잠들다, 여기 누구도 다 마시지 않았고 누구도 주워 담지 않아 오랫동안 벽 밑에 남아 몇 주고 몇 달이고 탁한 빗물이 차고 약 1년 뒤 1938년 5월 6일 말벌 두 마리가 익사한 찻잔이 잠들다, (…) 여기 체포된 날의 하늘 모습이, 거의 티끌 한 점 없는 하늘 모습이 잠들다, 여기 베시올리의 잊을 수 없는 소설 『피에 씻긴 러시아』가 잠들다. (34쪽)

이제 내 말을 잘 들어라. 더 이상 농담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개연성이 있느냐 없느냐, 능숙하게 그려졌느냐 아니냐, 초현실적이냐 아니냐, 포스트엑조티시즘 전통에 속하느냐 아니냐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얘기들을 풀어내면서 두려움에 소곤거리고 있는지 분노로 포효하고 있는지, 아니면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이 얘기들을 풀어내는지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내 목소리 뒤에서, 내 목소리라고 불러야 할 것 뒤에서, 현실에 맞선 급진적 전투의 의지를 감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아니면 단지 현실 앞에서의 정신분열적 무력감밖에 감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혹은 평등주의 투쟁가를 부르려 하면서 현재나 미래 앞에서 절망과 환멸로 침울해졌느냐 아니냐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다. (139쪽)

노파들은 원을 그리며 주변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몸이 다 망가지고 건망증이 심해졌으며, 이제는 손가락뼈나 입을 내 피부에 대고 즙을 빨아 되새김질하는 짓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제 감정도 향수도 느끼지 못한 채 느릿느릿 내 주위를 돌았다. 그들은 불사의 존재로, 삶을 계속 꾸려갈 형편이 못 되면서도 죽는 법을 몰랐으며, 가끔은 냄비 파편을 두들기거나 한동안 자기네 골격을 보강하는 데 썼던 철근을 망치질하기도 했고, 상황이 어떻든 내가 자기들에게 이상한 ‘나라’를 계속 만들어줘야 한다는 뜻을 어렴풋한 몸짓으로 전하기도 했다. 기실 육신이 탈바꿈함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무(無)가 행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 샤이드만은 계속해서 매일 하나씩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아마 달리 할 말이나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은 할머니들에 대한 연민이 지독히 순종적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누구도 짐작 못 할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청중의 반응이 없고 지평선과 그 너머까지 모든 것이 사멸했으므로 일화를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거나 스케치만 할 때도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그는 매일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마흔아홉 개 단위로 배열했다. 그는 그 뭉치 하나하나에 번호나 제목을 붙였다.
그날 밤, 그 10월 16일에, 나는 그에게 다음번 ‘나라’ 뭉치에는 ‘미미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을 붙이라고 제안했다. 그건 내가 예전에 다른 상황, 다른 세상에서 로망스 한 편에 붙인 제목이지만 샤이드만이 마무리하고 있는 이 모음집, 이 마지막 뭉치에 잘 어울려 보였다. (150~1쪽)

프레드 젠플의 책들을 읽으라. 마지막 쪽이 여전히 피와 그을음으로 끔찍하게 더럽혀져 있는, 끝까지 다 쓴 책들뿐 아니라 끝이 없는 책들도 읽으라. 애호가들에게 배포하려고 때로는 사본 두 부를, 심지어 세 부를 만들어놓은 소설들을 읽으라. 몇몇 작품은 이러저러한 시체 매립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에워싼 재를 긁어내고 스며든 생석회를 제거하고 젠플 자신의 피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쉽게 접할 수 있다. 몇몇 다른 작품은 아직도 그의 꿈이나 당신 꿈의 수면 밑, 두 흐린 물 사이로 떠다니고 있다. 이제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해도 읽으라. 그 책들을 좋아하라. 그 책들은 종종 굴욕을 산 채로 통과한 사람들이 살아 숨 쉬어야 했던 굴욕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 책들에는 관능적 애정의 장면들도 있다. 그 소설들은 어찌 되었든 때로는 순정과 추억을 비추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다. 그 책들은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때 남는 것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 책들이 훌륭한지의 여부는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 책들 대부분은 프레드 젠플이 수용소 시절과 수용소 시절 이후에 몰두해 있었던 만물과 만인의 소멸에 대한 성찰을 재개하고 있다. 그 책들을 읽으라. 그 책들을 찾아보라. (164쪽)


차례

미미한 천사들
해설
작품 목록


앙투안 볼로딘 선집

『미미한 천사들』
『메블리도의 꿈』
『찬란한 종착역』


저자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은 1950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번역했으며,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40여 편에 이르는 소설을 통해 문학적 평행 우주 ‘포스트엑조티시즘’을 구현했다. 『미미한 천사들』(1999)로 베플레르 상과 리브르 앵테르 상을, 『찬란한 종착역』(2014)으로 메디치 상을 받았다.

역자

이충민은 서강대학교에서 불문학 학사 · 석사를 받았고, 파리8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프루스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공역), 란다 사브리의 『담화의 놀이들』, 미셸 드 세르토의 『루됭의 마귀들림』, 다이 시지에의 『공자의 공중곡예』 등을 한국어로 번역했고, 프루스트 연구서 『통일성과 파편성—프루스트와 문학장르』를 썼다.


편집

김뉘연, 신선영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