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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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섬

김한민 지음

마지막 순간 독자를 찾은 저자와 앞 못 보는 아이의 책섬 만들기

여기 책 만들기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저자. 지금까지 앞만 보며 묵묵히 걸어온 저자는 마지막 책을 지을 때가 다가오자 생각에 잠긴다. 자신의 책 짓는 기술을 전수해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는 평생 안 하던 짓을 시도한다. 책을 미끼로 독자를 유혹하는 것이다. 그런 저자 앞에 조그만 아이가 하나 나타난다. ‘책 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장님은 아니지만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다. 간단한 테스트를 거친 아이는 시험에 합격하고, 두 사람의 ‘책섬 만들기’가 시작된다.

여기야 우리 책의 재료가 될 곳, 좋은 책은 미개척 황무지에서 탄생하는 법이지

저자가 말하는 ‘책섬’은 지식의 바다를 떠다니는 추상적인 섬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동안 보여준 작가 김한민의 상상력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터, 이 책에 나오는 책섬은 말 그대로 물리적인 ‘책섬’이다. 재료가 될 무인도에 도착한 저자는 아이에게 삽을 하나 던져준다. “그 삽 네 거야. 오늘부터 주구장창 팔 거야.” “책은요?” “책? 지금 하고 있잖아. 파다 보면 알게 돼. 파는 게 반이야, 책은.” 그렇게 아이는 저자가 불러 모은 땅파기 귀재들(땅돼지, 오소리, 굴곰, 고슴도치, 두더지)과 함께 책섬의 토대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섬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을까. 시간 감각을 잃어버릴 즈음, 저자는 아이를 불러 앉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처음 책을 만들게 됐는지, 문자와 그림 사이에서 어떻게 핑퐁 게임을 할지, 다른 이의 영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책을 통해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무한한 수의 세계와 접속하는 방법을 하나씩 전수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일어나 보니 저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잘 잤어요? 표정이 왜 그래요?” “…제일 힘든 단계에 봉착했어.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정말 여지가 없군. 암초에 걸렸어. 책을 파다 보면 반드시 문제란 걸 맞닥뜨리게 돼.” 이윽고 먼지를 걷어내자 문제는 살아 움직이며 저자에게 달려든다. 때로는 동물이 되었다, 괴물이 되었다 하는 문제와 저자의 사투. 과연 그들은 무사히 책섬을 완성할 수 있을까.

『유리피데스에게』서부터 『책섬』까지, 작가 김한민

김한민의 첫 책 『유리피데스에게』(2004)가 나온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20여 권의 책을 그리고 썼으며 그 와중에 잡지 편집장으로, 문화 공간의 기획자로,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로… 다채로운 궤적을 보여왔다. 한마디로 정체가 불분명하다. 그림체 역시 그의 흔적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저자 이름을 가린다면 불과 넉 달 차이를 두고 나온 『카페 림보』와 『사뿐사뿐 따삐르』를 두고 같은 작가의 책이라고 생각할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것이 있다면 미지를 향한 그의 작가적 상상력, 채워지지 않는 소통의 욕구, 그리고 조금씩 시인을 닮아가는 그의 ‘이야기하기’가 아닐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도의 집중력과 산만력”을 동시에 발휘해야만 나올 수 있는 정교한 “올무” 같은 글과 그림의 결합. 『책섬』은 그런 김한민의 매력이 점점 무르익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 편의 아름다운 우화다. 책이라는, 자신이 평생 업으로 삼은 동반자에 바치는 헌사이자, 왜 책을 짓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자신을 되새김하는 내면 일기다.


발췌

낮에는 삽질, 두세 시간마다 새참, 쉴 때는 피리 연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설계도 짜기. 단어들의 설계도.
네가 읽은 문장들은 너의 것일까? 네가 쓴 문장들이 너의 것일까?(38~39쪽)

늘그막에야 알았어. 왜 시인이 시를 쓰는지를.
그래서 나도 시를 조립하게 된 거야.
“시가 뭔데요?”
옛날에 한 시인이 말했지. ‘시는 동물이다.’
아냐. 시는 단어로 된 함정이야. 문장으로 꼰 올무.(45쪽)

기록은 그만큼 어려워. 내가 터득한 기술은 가능한 한 오래 핑퐁을 하는 법. 조바심이 나도 애가 타도 근질거려 죽겠어도 계속 게임을 하는 거야. 몸이 기록할 때까지 계속.(63쪽)

“여기 오래 있다 보니까, 다른 섬도 구경하고 싶어요.”
다른 섬? 우리 섬이 막 모양새를 갖추려는데 다른 섬? 그건 위험할 수 있어. 영향 받기 쉽거든.
“영향은 나쁜 건가요?”
아니. 다만 때가 있는 법이지. 눈과 귀를 닫을 때 못 닫으면 네 목소리는 영영 못 찾아.(73쪽)

저자는 늘 도망을 다니지. 잡힐 듯 말듯. 숨바꼭질의 달인들이야. 숨바꼭질을 하다 보면 문장이 몸에 밴다는 걸 잘 알지. 네가 쫓아가지 않고는 못 배기게, 그러나 정작 잡을 순 없을 만큼의 거리를 둘 줄 알지.(87쪽)

가끔 이상한 방문을 받아. 섬을 구경거리로 생각하나 봐. 얼마에 넘기라느니, 이렇게 고치면 쓸 만하겠다느니… 웃기는 건 우리한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거야.
질문을 하긴 하지, 늘 똑같은. 가령, “끝나는 시기는?”(109쪽)


지은이

김한민은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리피데스에게』, 『혜성을 닮은 방』, 『공간의 요정』, 『카페 림보』, 『사뿐사뿐 따삐르』, 『도롱뇽 꿈을 꿨다고?』, 『그림 여행을 권함』, 『책섬』 등의 책을 쓰고 그렸다. 엮고 옮긴 책으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산문선 『페소아와 페소아들』이 있다. www.hanmin.me


편집

박활성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