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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하면서 듣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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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하면서 듣는 음악

전은경 지음

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200여 권이 넘는 잡지를 마감했던 전 월간 『디자인』 편집장 전은경의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이 출간되었다. 제목과 달리 노동요로 적합한 플레이리스트가 담긴 책보다는, 오랜 세월 그녀가 쌓은 “문화적 체험, 디자인에 대한 통찰, 편집장의 고단함이 음악과 어우러진 한 편의 뮤직 다큐멘터리”다.

고단한 마감의 나날을 함께한 음악들

음악을 틀어 놓아야 일이 잘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음악이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 있다. 전은경은 후자에 속했던 사람이다. “음악이 좋으면 좋은 대로 정신이 팔려 집중력이 저만치 달아나고, 싫으면 싫은 대로 거슬”리는 그녀는 정작 글을 쓰거나 마감할 때는 음악을 잘 듣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마감이 시작되기 직전, 일하는 틈틈이,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며 듣던 음악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몹시 팍팍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음악은 그렇게 고단한 나날을 그녀와 함께하며 마감의 긴장을 풀어 주었던 음악들이다.

18년 전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오래 기자로, 편집장으로, 디렉터로 잡지를 만들 줄은 몰랐을 것이다. 월간 『디자인』 “400호 기념호를 진행하면서 500호도 내가 할 것이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1년도 아니고 8년 4개월 후의 일을 누가 알겠나? 그냥 한 달 한 달 바쁘게 일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며 담담히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겨우겨우 마감을 맞추면서 나 자신에게 주먹질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와 주제에 걸쳐 특집을 기획하고, 여러 나라를 오가며 전시와 행사를 취재하고, 수많은 국내외 디자이너와 전문가를 인터뷰하며 쌓인 시간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재즈와 클래식, 영화 OST와 국악, 시티 팝, 보사노바,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소개된 음악만큼이나 많은 사연과 함께.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이란 이런 재미있는 글을 쓸 좋은 핑곗거리이자, 이제야 비로소 마음 편히 음악을 들으며 원고를 마감할 수 있게 된 그녀가 독자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추천사

음악은 독서라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 음악은 귀로 듣는 독서다. —김태경, 『어반라이크』 편집장

편집의 시대, 18년간 예리한 시선으로 독자를 성장시켜 온 전은경의 따뜻한 플레이리스트. —김재원, 포인트오브뷰 대표

문화적 체험, 디자인에 대한 통찰, 편집장의 고단함이 음악과 어우러진 한 편의 뮤직 다큐멘터리. —김범상, 피크닉 대표


발췌

피터 새빌은 영국의 포스트 펑크록 밴드 조이 디비전의 첫 번째 앨범을 위해 『케임브리지 천문학 대백과사전』에 실린 초신성의 방출선 스펙트럼 이미지를 차용했다. 에고로 가득 찬 사람의 마성의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1979년에 나온 앨범이지만 어쩐 일인지 힙스터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등극해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를 비롯해 유니클로에서도 『미지의 즐거움』 앨범 커버를 활용한 티셔츠를 선보인 바 있다. 록 밴드 앨범에서 티셔츠와 에코백으로 매체를 갈아타더니 패션 브랜드로 승화된 듯하다.

가끔 뵐 때마다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시는 어떤 서점 대표님을 연말에 만났을 때, 내 상태를 어찌 알았는지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 『처음 가는 마을』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편집장님, 77쪽을 보세요.”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 탓하지 마라”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자기 감수성 정도는」이라는 시였다. 시를 읽을 마음의 여유는 없었지만, 내 마음이 강퍅하게 느껴질 때마다 내 감수성 정도는 스스로 관리해 보려고 빌 에번스를 듣는다.

흔한 이름 12위쯤 할 것 같은 은경 대신 수전 손택, 프랑수아즈 사강 같은 이름이었으면 나도 훨씬 멋진 글을 썼을 터라고, 이름 탓을 해 본다. 매달 마감의 고비는 편집자의 글을 쓰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많은 기사를 쓰고, 한 달에 40쪽이 넘는 특집도 잘도 쳐냈건만, 겨우 A4 한 장밖에 안 되는 분량인데 그걸 쓰는 게 어려웠다.
각성제를 먹는 것처럼 집중과 긴장을 하고 싶어서 스티브 라이히의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을 듣기도 한다. 필립 글래스와 함께 미니멀리즘 음악의 개척자로 이름난 스티브 라이히의 대표작인 『18인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은 거의 1시간 분량이다. 반복적으로 들리는 음계를 따라가다 보면 적당한 긴장감이 생기는데 마감을 독촉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곡이 끝나기 전에 편집자의 글을 다 쓴다,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달의 어두운 면』은 시적인 가사로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시간, 돈, 광기, 죽음처럼 사람들을 허무하고 미치게 만드는 것들을 다룬다. 예전에는 핑크 플로이드를 잘난 척하는 음악광들이나 좋아하는 밴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음악을 만든다는 게 책 한 권을 쓰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음악과 독서는 비슷한 경험이다. 내가 사서라면 이 앨범은 철학 서가에 꽂아 두겠다.

바로크 시대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텔레만의 음악이 21세기 직장인이 식사할 때 어울리는 음악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베토벤 교향곡 같은 뜨거운 음악은 타펠무지크로 적합하지 않다”라고 한 말에는 크게 공감한다. 천천히 세공하는 듯한 텔레만의 음악은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고, 물 흐르듯 이어져 맛없는 걸 먹어도 체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황량한 풍경을 배경으로 수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의 손을 포착한 사진이 쓸쓸하면서도 초현실적이다. 누구의 사진인가 했더니 독일의 현대 음악가 닐스 프람의 아버지이자 ECM의 사진가로 잘 알려진 클라우스 프람이었다. 이 앨범의 뒤 커버에 등장하는 팻 메시니와 피아노를 맡은 라일 메이스의 사진도 좋다. 팻 메시니를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이 뭘까 생각해 보니, 그것은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방황하는 마음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잡지와 다르게 약속했던 시간을 한참 넘기긴 했지만 이 원고 또한 이제 슬슬 마감할 시간이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것저것 잡다하게 듣는 나의 음악 취향을 알아 가면서 온전히 나랑 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 마감했던 것과 달리 마감을 기념하며 무얼 들어 볼까 뒤적거리다가 찰리 헤이든의 『야상곡』을 골랐다.


차례

어느 유명 디자이너의 짜증 – 조이 디비전
끝까지 들을 수 없는 자장가 – 막스 리히터
가와쿠보 레이의 요청 – 오노 세이겐
묘지공원 산책 – 얀 가르바레크, 힐리어드 앙상블
수영하면서 배운 것들 – 패션 피트
월요일이라는 핑계 – 이와무라 류타
가구 음악 – 브라이언 이노
밤은 부드러워 –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한옥에 드러누워서 – 정가악회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갈 때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OST
과거의 오늘 – 웨더 리포트
봄이 왔다 – 막스 리히터
초여름이 왔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OST
완벽한 바캉스 – 안테나
우주배경복사 디자인 – 마이크 올드필드
교정지를 기다리며 – 빌 에번스 트리오
기쁨의 말을 듣기 – 언드라시 시프
삶에는 손잡이가 없다 – 로버트 글래스퍼 트리오
인생 배경 음악 – 엔니오 모리코네
감정의 안전거리 – 사카모토 류이치
마감이 끝난 날 밤 – 팻 메시니 그룹
모기는 싫어 – M83
편집자의 글, 최고의 각성제는 시간 없음 – 스티브 라이히
거스름돈은 받지 마 – 버나드 허먼
낯선 호텔에서 – 랠프 타우너, 볼프강 무트슈필, 슬라바 그리고리안
보기 좋은 악보가 음악도 좋다 – 존 케이지
라 스칼라 – 클라우디오 아바도, 런던 심포니 오케스라
음악은 독서 – 핑크 플로이드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흩날리고 – 피에트로 마스카니
우아하게 사는 법 – 엔리코 피에라눈치, 마크 존슨, 가브리엘레 미라바시
사탕 같은 시티 팝 – 타케우치 마리야
일 년에 몇 번씩 – 유재하
음식과 패션과 감각 – 존 애덤스
1984 –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맛없는 건 안 먹어 –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디자이너들의 무덤 – 모임 별
인내심을 가지고 듣는 연습 – 케틸 비외른스테드, 데이비드 달링, 테르예 립달, 존 크리스텐센
지구 대탐사 – 얀 가르바레크 그룹
썸웨어 – 레너드 번스타인
9월 15일에 듣는 노래 – 팻 메시니와 라일 메이스
춤이 필요한 이유 – 피나: 춤춰라, 춤춰라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OST
피나 바우슈 –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영화처럼 – 팻 메시니
행복의 감각 – 키스 자렛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앨범 – 비틀스
LP 플레이어도 없으면서 – 존 콜트레인
오늘이 제일 재밌어 – 로저스와 해머스타인
니벨룽겐의 반지와 기계 장치 – 리하르트 바그너
마성의 데이비드 보위 – 데이비드 보위
시간을 대충 알려 주는 시계 – 데이브 발렌틴
보기 위한 또 다른 방법 – 토르드 구스타브센 트리오
처음 가 보는 곳이 늘어날 때마다 – 아누아르 브라헴
결정적인 순간을 나랑 함께한 옷 – 샤카 칸
일상에서 쉬는 행위 – 브래드 멜다우
천둥소리 – 박지하
마감을 기념하며 – 찰리 헤이든


저자 소개

전은경
디자인 & 브랜드 디렉터. 2006년부터 2022년까지 월간 『디자인』 기자, 편집장, 디렉터로 200여 권을 마감하며 국내외 디자이너와 경영인, 마케터 등을 인터뷰하고 다양한 디자인 영역과 프로젝트, 전시, 공간, 트렌드에 관한 콘텐츠를 기획했다. 『워크 디자인』을 론칭하고, 『The Way We Build』(공저) 등을 냈으며 코오롱 래코드와 함께한 『래;콜렉티브: 25개의 방』, 『순환하는 가구의 모험』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겉과 속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것이 좋은 디자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
유현선

편집

박활성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