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이어그램: 큐레이터의 도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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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다이어그램: 큐레이터의 도면함

현시원

큐레이터 현시원이 기록한 2010년대 한국 미술의 현장

2010년대 한국 미술계를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인 신생공간, 이 책은 그 흐름을 이끄는 데 주요 역할을 한 전시 공간 시청각의 공동 디렉터 현시원이 지난 7년간 기록한 한국 미술의 현장이 담겨 있다. 2013년 11월 문을 연 시청각에 처음 도착한 잭슨홍의 작품 「배」(2013)에서 시작한 저자의 글은 남화연, Sasa[44], 구동희, 정서영, 전소정, 문성식, 안규철, 김영나, 옥인 콜렉티브, 이수성, 김익현, 박미나, 이수경, 주재환, 윤향로, 노상호 등 독자적인 방법론을 구축하며 한국 미술을 확장해온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근접 촬영하듯 내밀하게, 암막에 가려진 수수께끼를 풀 듯 파헤친다. 그동안 관습적인 미술 전시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전시를 여럿 기획해온 큐레이터답게, 그의 글쓰기는 때론 아직 창작되지도 않은 작품에 대한 비평문으로, 때론 얼핏 보기에 미술과 상관없어 보이는 한국의 정신사적 풍경을 조망하는 시야를 확보하는 데로 나아간다. 저자가 말하듯 엄밀한 작가론도, 전시론도 아닌, 그렇다고 2010년대 한국 미술을 논하려는 야심을 드러내지도 않는 이 책은 이 모두가 분절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로 뒤엉킨 동시대 한국 미술의 단면들을 독자 눈앞에 그려낸다.

임시적인 혹은 영구적인 큐레이터의 도면함

우리가 미술 작품을 접하는 전시장에는 대개 관람객을 위한 전시 도면이 준비되어 있다. 관람객이 이 도면을 활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도면을 길잡이 삼아 작품을 차례차례 감상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작품을 먼저 감상한 후 도면에서 그에 대한 추가 정보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전시 도면은 버려진다. 말하자면 전시장의 공간과 그곳에 놓인 작품을 표시한 도면은 전시가 끝나면 사라질 임시적인 시공간의 기록이다. 그러나 저자에게 도면은 어떤 작품이 일정 기간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물리적인 증거를 훌쩍 뛰어넘는다. “비가시적이거나 가시적인, 순간적이거나 영속적인 아이디어가 종이 형태로 물질화된” 도면은 한편으론 덧없지만 한편으론 결정적이다. 1994년 독일에서 열렸던 정서영 작가의 전시가 남긴 도면을 통해 자신이 보지 못한 시공간을 추적하는 글이 말 그대로 물리적인 도면의 한계와 가능성을 조명한다면, 전시 도면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구동희 작가의 『밤도둑』(2014)전에 대한 글은 “하나의 회고담으로서 미래에도 사람들의 입과 뇌 속에 이 전시가 존재하길 바라며” 쓴, 글로 적은 전시 도면이다. 저자에게 도면은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과 전시를 경험하는 시간을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확보하고 또 어느 시간대 이상으로 확대하려는 의지”를 구현하는 상징적인 매체이자 도구로서 기능한다. 어쩌면 이 책 자체가 2010년대 한국 미술이라는 거대한 전시 도면의 일부라 할 것이다.

시대를 바라보는 눈을 장착하기 위한 미술 현장 스터디

책의 제목 ‘1:1 다이어그램’은 말하자면 그 전시 도면의 축척이다. 하나의 대상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서의 거리.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전체를 놓칠 것이고 너무 멀리서 바라보면 세부를 놓칠 것이다. 그렇다면 한 작품을, 한 작가를, 나아가 동시대 한국 미술을 바라보는 데 적절한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1:1 다이어그램’은 하나로 고정된 거리가 아닌, 그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제목의 모티브가 된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왕은 신하에게 자신의 영토만큼 큰 지도를 요청한다. 하지만 그 지도를 완성할 경우 지도는 세계를 덮어버리므로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지도”이다. 따라서 1:1 축척이란 지도에서 불가능하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글은 항상 생략과 비약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은 2010년대 한국 미술을 현장에서 부딪히며 자신이 마주한 작품과 작가, 전시를 현재의 상황과 조건에서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저자가 맞선 “글을 쓰는 대상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긴장과 고민”의 결과물이다.


발췌

작가든 작품이든 전시 공간이든, 내가 쓴 글의 경로에는 글을 쓰는 대상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긴장과 고민이 존재한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시야가 얼마나 많은 생략과 비약을 동반하는지 생각한다. 1:1이라는 말은 두 개 이상의 각 항이 각자를 어떻게 보고 사유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는 기준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상대를, 또 세계를 바라보는 거리를 결정하는 축척. 거리를 통해 확보된 시야가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축척으로써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과 전시를 경험하는 시간을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확보하고 또 어느 시간대 이상으로 확대하려는 의지로부터 힘을 얻었다. (9쪽)

사회는 한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고 첨예한 정치적 문제들은 더욱더 퇴행과 모순을 반복한다. 개인이 모여 있는 형상을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속 편하겠지만 사실 적절한 이름의 탐구, 즉 ‘어떤 움직임과 사태를 무어라 부를까’ 고민하는 것은 예견된 실패의 자리에 흥미로운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의외의 이벤트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누군가 끈 불로 인한 어둠이든, 인공조명으로는 어찌할 바 없는 암흑의 어둠이든, 이 어둠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26-27쪽)

보도 자료에 녹아든 미래 시제는 불완전하다.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의 살점은 도려내고 가능하면 몇 가지 특징을 압축적으로 뽑아내야 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전시에 관해 글을 쓰는 건 어디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지, 무엇을 얼마나 믿으며 써야 하는지 숙고하는 과정이다. 준비 중인 전시를 미래완료 시제로 둔갑시키는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오묘하다. 지금 스코어, 알 수 없는 것과 미완결 상태인 것들은 빼버려야 한다. 이 형식 위에 올라선 문장은 근 미래의 관객이 전시장에 오기 ‘이전’에 읽었을지 모르는 기사와 전시를 본 ‘이후’에 읽게 될지 모르는 미술 월간지의 리뷰보다 앞선 시간대에 있다. (58~59쪽)

도면이 작품 목록을 종이 한 장에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면 사진은 입체적으로 구현된 상태를 공간에 침입한 공기와 함께 드러낸다. 정서영 전시의 도면은 20세기 초 구축주의자의 문서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왜일까. 실제 볼 수 있는 이미지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무척 명료하다. 자로 그은 분할 공간의 질서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 질서의 체계에 전시를 보지 못한 사람이 가진 눈동자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70쪽)

일견 당연하고 투명해 보이면서 어떤 성인도 애용하지 않는 색칠 공부의 방안을 작가는 15년 남짓한 시간을 지속해왔다. 그동안 나는 작가가 마치 제 자신이 색칠 공부가 된 것처럼 느끼지 않을까 궁금하다. 그리기의 시간을 수집하려는 의지는 누구도 아직 완결하지 못한 무모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혹시 이 드로잉들은 귀여움을 가장한 대서사시일까. 아마 그의 드로잉을 다 모아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면, 전시장 조명을 낮게 켜놓아도 좋을 것 같다. 제각각 다른 장에서 뜯겨져 나온 색칠 공부는 제각각 다른 세계에 대한 응답이며 날마다 다른 날의 그림이기에, 얼마나 많은 해 아래에서 그려졌을 텐가. (230쪽)

관람객들이 간혹 간과하는 것은, 미술품이 비록 생명체가 아닌 사물이지만, 인간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고 보존되는 주체라는 사실이다. ‘시민들’보다 긴 수명을 살아가게 될 소장품들은 특권적 지위에서, 때로 작품이 비치는 관람객의 눈동자를 통해 세계의 몰락과 탄생을 지켜보고 있다. (298~299쪽)

오늘날 정크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 이후를 다룬다거나, 서울의 공간들에 반응한다거나, 혹은 조각이나 회화에 대해 발언한다거나 하는 비평을 두껍게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개인’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집중력을 살펴보는 일이다. 여전히 각자의 현실은 ‘알 수 없다’고 믿고 싶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누구와도 쉽게 공유되지 않는 각자의 ‘외부’가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327~328쪽)


차례

머리말
상황과 조건으로서 시차

1부 모든 첫 번째 시간
뒤에는 아무것도 없답니다: 잭슨홍
말 없는 어떤 여름밤: 남화연
그것은 갱생: Sasa[44]
뭐가 안 보이는지 보려고: 구동희
파도가 원래 있던 곳: 정서영
내가 떠올린 두 가지: 전소정

2부 나도 모르게 커지는 것들
지구의 기울기: 남화연
펼쳐진 세계, 기억의 내부: 문성식
어쩌다 보니 커져버리는 것들: 정금형
먼 곳의 나: 안규철
표준에 입각한 비표준의 테이블: 김영나

3부 리얼리티 코리아
세계의 패망에 맞서: 옥인 콜렉티브
누구를 위한 무엇: 이수성
동상은 세계다: 김익현
도구에 피와 사랑을 통하게 하자: 잭슨홍
노래, 국가와 나를 잇는 최소한의 매뉴얼: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

4부 잽과 부메랑
제각각 다른 장에서(뜯겨 나와): 박미나
물방울이 다이아몬드에게: 이수경
기분이 중요하다 회전하기 위해선: 구동희
사람인가 도깨비인가: 주재환
스크린샷의 마음: 윤향로
작가와 의심: 노상호

5부 전시 서문: 시각적 야심
사라지거나 돌아오거나 그사이 어딘가에 있거나: 광주비엔날레
호랑이에서부터 서울까지: SeMA 전시 아카이브 1988 – 2016
뮤지엄 루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30년 특별전
도시는 무엇을 갖고 싶을까: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각자의 외부

출처
도판 목록


지은이

현시원은 학부에서 국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천수마트 2층』(국립극단, 2011),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박해천 · 윤원화 공동 기획, 일민미술관, 2014), 『스노우플레이크』(국제갤러리, 2017) 등 전시와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며, 시청각 공동 디렉터로 전시와 출판 활동을 병행해왔다. 저서로 『사물 유람』(2014),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고 말하기: 큐레이팅과 미술 글쓰기』(2017) 등이 있다.


표지 이미지

최슬기, 「샤프 컬러 TV 13 N M-150」, 2003, 텔레비전, 비디오, 상영 시간 가변적.

편집

박활성

디자인

황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