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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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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의 윤리학

김홍기

미술비평가 김홍기의 『지연의 윤리학』이 출간되었다. 지난 10여 년간 미술 실천을 이끈 동시대적 조건과 감각을 밝히는 이 미술비평집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앞으로 내달리는 시대적 요구에 맞서 감히 판단을 유예하고 사유의 시공간을 여는 적극적인 결단으로서 지연의 윤리학을 요청한다.

미술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선잠에서 인간의 의식을 깨우려는 몸짓이다. 가장 깊은 밤에 느닷없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같은 것이다.

1장 「지연의 윤리학」은 비디오아트의 슬로모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지연의 윤리학’이 매체와 분야를 떠나 왜, 그리고 어떻게 동시대 예술 전반에 요청되는 덕목일 수 있는지 말한다. 관념적 개념에 불과한 ‘정지’나 관성적 상태에 불과한 ‘느림’이 아닌 기존 운동에 대립하는 벡터를 지닌 대항 운동으로서 ‘지연’은,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는 묘연하고 파국의 전조가 감도는 21세기의 가속도에 파묻힌 인간의 무감각한 상태를 깨우는, 기관차의 브레이크 마찰음 같은 것이다.

2장 「망각과 향수를 넘어」는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현재에 몰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져 현재를 외면할 수도 없는, 이런 동시대 미술의 곤경 속에서” 거세게 부딪히는 집요한 욕망, 그곳에서 빠져 나오려는 갖은 전략, 미래를 비추려는 야망이 혼재한 여러 전시 사례를 살피고, 그 자장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몇몇 작품들을 소개한다.

3장 「비디오적인 것」은 이 책의 시발점이 된 비디오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검토한다. “아날로그 매체로서의 비디오가 디지털 기술 발전의 여파로 쇠퇴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촉발된 예술적 가능성으로서의 ‘지연’은 온갖 장르의 동시대 미술 전반에 ‘비디오적인 것’으로서 잔존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전소정, 임영주, 이윤이, 장서영, 남화연 작가의 작업에 내재한 지연의 시공간을 꺼내어 보여 준다.

4장 「평면의 마음」은 저자가 지금껏 논한 미술과 비평의 태도와 관련하여 회화에서 발견되는 여러 사례를 다룬다. 윤대희, 양유연, 조원득, 최현석, 문성식은 저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자신이 주목하는 개인적, 사회적, 구조적, 역사적 인식을 때로는 불안의 풍경으로, 공모하는 시간으로, 유희하는 붓질로, 의연한 태도로 작품에 담아냄으로써 지연의 윤리학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5장 「깊은 밤의 기침 소리」는 “오늘날 디지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시공간적 지각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새롭게 제기된 미술의 문제의식을 들여다본다.” 오늘날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사진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 디지털 기술이 살포하는 환경은 어떤 시공간을 낳았는지 들여다본다.

미술이란 결국 현재의 시공간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미술비평이 미술사보다 현재적이어야 하며 미학보다 구체적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의 미술을 참조하며 현재를 규정하는 시공간적 조건을 끊임없이 되묻는 작업. “그리고 기침 소리 들려온다. 세계의 재봉선을 따라 가까스로 새어 나오는 소리. 네거티브 필름으로 내뱉는 소리. 가장 어두운 공간을 가장 환하게 반전시키는 찰나의 소리. 찰칵거리는 기침 소리. 매번 다르게 업데이트되는 지금 여기의 기침 소리.”


발췌

유사한 과거와 유사한 현재가 만나면 이로부터 연역되는 건 오로지 유사한 미래뿐이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미래가 아니라 그저 현재의 지루한 연장일 뿐이다. 미래는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유사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마주쳐 전혀 뜻밖의 유사성이 만들어질 때 새로운 시간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미래라고 부른다. (18쪽)

미술은 이 하염없이 쏟아지는 선잠에서 인간의 의식을 깨우려 하는 몸짓이다. 가장 깊은 밤에 느닷없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같은 것이다. 거세게 달리는 디지털 정보화 시대의 기관차를 지연시키려는 브레이크의 마찰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동시대 미술의 이러한 태도를 지연의 윤리학이라고 부른다. (31-32쪽)

그곳에서 비평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시대 미술에 대한 판단을 멈추지 않지만 그렇다고 투명한 지식과 질서의 패권을 참칭하지 않는다. 또한 외부의 불투명하고 무질서한 미지의 영역을 끈질기게 의식하지만 그렇다고 농성하듯 내부로 침잠해 소통의 빗장을 지르지 않는다. (69쪽)

장례식은 작별의 끝이 아니라 작별의 시작이다. 또는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 애도 작업의 시작이다. 상실된 애착의 대상으로부터 자아가 온전히 분리될 때까지 애도 작업은 끝나지 않는다. 작별과 작별할 때에야 비로소 작별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민애의 긴 애도 작업이 시작되어 이번 전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87쪽)

그는 모더니즘 이후에 성립한 근대와 탈근대의 분열증적 긴장 관계, 과거와 현재의 시대착오적인 충돌을 하나의 ‘대홍수’로서 연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일으킨 풍랑은 대홍수로 이어지기에는 너무나 수줍은 것이었다. 흐린 하늘의 빗줄기들은 물보라로 이어지지 못하고, 비엔날레 본전시의 빛줄기들은 난반사를 일으키지 못한다. 대홍수는 무엇보다도 어떤 ‘파국’을 수반해야 하는 것이다. (116쪽)

우리 미술계가 적극적으로 아시아라는 화두에 매달리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세계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을 모두 내세우기 위한 지리적, 문화적 기준점을 세우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동향에 보조를 맞추는 동시에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범위에 머무르기엔 지역적 특수성을 부각시킬 여지가 미흡한 듯하니 지역성의 범위를 아시아로 넓혀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118쪽)

전소정에게 ‘예술’은 독립된 명사라기보다는 ‘예술하다’라는 동사의 어간이다. 그의 관심사는 ‘예술’이라는 명사에 있지 않고 ‘예술하다’라는 동사에 있다. 명사가 지성의 개념에 맞닿아 있는 품사라고 한다면, 동사는 신체의 감각으로 익혀야 하는 품사이다. 그는 ‘예술의 본질’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예술하는 습관’이라는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동작을 시연한다. (219쪽)

어쩌면 우리는 장서영의 비디오 작업을 영화의 ‘내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이곳은 영사기를 끄고 서사 영화의 스크린-피부를 들춰내야 비로소 제 몸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반복적인 수축과 이완의 루프가 자리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249쪽)

생각해 보면 최승희의 춤추는 신체는 처음부터 내용이 유실된 깨진 병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동일한 그의 춤사위를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 왔다. 그것은 동양인에게 서구적인 몸짓이었고, 서양인에게 이국적인 동방의 춤이었고, 어느 때에는 제국주의에 아첨하는 교태였고, 또 어느 때에는 한국 현대 무용의 위대한 시작이었다. 뭐라고 규정하든 간에 최승희라는 역사적 신체는 그것을 초과하고 그것으로부터 이탈한다. (262쪽)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또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신성한 존재는 전승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전복의 대상인 것이다. 최현석의 회화 속 인물들의 지워진 얼굴은 모든 표정을 허용할 수 있지만 아무 표정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세속화의 딜레마이다. (290쪽)

밤의 풍경과 숲의 풍경은 원근감을 최소화한 평면의 중첩에 가깝고, 그 풍경 속의 이질적인 생명체들은 어떤 유기적 구성을 이룬다기보다는 산발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채 반쯤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심과 위계를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산포적’(散布的) 종합이 문성식의 두 커다란 풍경화를 구성하는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이 얄궂은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 앞에서 평등한 한없이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이곳에는 중심과 위계가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298쪽)

사진은 거짓의 역량이다. 사진의 거짓은 진실에 거짓을 섞는다. 이 짝짓기는 세계 속에 더 많은 진실과 더 많은 거짓을 잉태시킨다. 이런 식으로 무의식은 의식과, 환상은 현실과, 이미지는 텍스트와 짝짓기한다. 사진은 거짓의 역량으로 이 모든 짝짓기를 주선한다. 거짓의 역량의 다른 이름은 사진적 상상력일 것이다. 물론 사진에 대한 이 정의는 300만 개의 정의 중 하나일 뿐이다. (325쪽)

그것들은 주인 없는 가면과도 같다. 하트의 가면 뒤엔 감정의 주인이 없고, 타임라인의 가면 뒤엔 기억의 주인이 없다. 모두를 대신하고 있지만 아무도 쓰고 있지 않은, 이상한 가면의 세계인 것이다. 정희민이 폭파시켜 드러난 디지털 거미의 작품은 이처럼 가면으로 이루어진 허망한 시공간이다. (336쪽)

그러니 이제 또 잠이 들 시간이다. 밤은 깊고 인적은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밤은 아니다. 차라리 어둠으로 꽉 찬 밤. 가청 주파수를 밑도는 수군거림으로, 가청 주파수를 웃도는 비난과 비명으로, 음소거로 소란스러운 밤. 픽셀의 격자들로 촘촘한, 아스키코드로 포화된, 가장 높은 밀도의 밤. 육체를 상실한 시선들이 나부끼고 추락하는 밤. 빛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그림자들의 사유지 같은 밤. 그리고 기침 소리 들려온다. (346쪽)


차례

1장 지연의 윤리학
지연의 윤리학
연계의 (불)가능성: 동시대 미술의 단면들
‘다원예술’에 온전히 침묵하기 위하여
시야의 끝, 사각지대의 시작
얼룩의 제스처, 유령의 춤
여러 개의 마침표, 혹은 이어진 말줄임표

2장 망각과 향수를 넘어
테마파크의 폐허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여러 줄기의 빛들
아시아라는 욕망
관계 미학, 그 후
도시의 주권자들
미래는 무엇의 이름인가

3장 비디오적인 것
감각의 번역, 매체의 전유
텍스트의 틈, 이미지의 구멍
내담과 내담
XOXO
바다의 변증법

4장 평면의 마음
안개 속의 풍경
개와 늑대의 시간
사회적 폭력의 계보학
전승과 전복, 세속화의 이중 전략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5장 깊은 밤의 기침 소리
디지털 정보화 시대의 이야기꾼
사진, 거짓의 역량
사진적인 것: 빛의 안식처
거미 여인
깊은 밤의 기침 소리


저자 소개

김홍기
서울과 파리에서 미술사, 철학, 미학을 공부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이미지와 테크놀로지, 미학과 정치 철학 등이며, 동시대 미술과 매체에 관련된 비평과 번역을 생산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반딧불의 잔존』, 『1900년 이후의 미술사』(공역),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