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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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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들
Gesten: Versuch einer Phänomenologie

빌렘 플루서 지음, 안규철 옮김, 김남시 감수

『몸짓들: 현상학 시론(Gesten: Versuch einer Phänomenologie)』(1991/1993)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철학자 빌렘 플루서가 상파울루와 엑상프로방스에서 했던 강연 및 강의 원고들을 묶은 책이다. ‘몸짓’이라는 인간 특유의 움직임을 통해 세계 속에,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를 탐구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몸짓을 설명할 이론이 필요하다

이 책은 우리가 매일 하고 있고, 모두가 하고 있는 ‘몸짓’을 해석하기 위한 이론을 세우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몸짓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할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려면 몸을 움직여야 하고, 그 몸의 움직임이 바로 몸짓이기 때문이다. 그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우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해석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플루서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의 몸짓이 독특한 점은, 그것이 인과관계만으로는 만족스럽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면도를 할 때, 누군가 이를 생리적, 역사적, 심리적, 문화적, 과학적 등등의 이유를 들어 설명하면, 나는 수긍을 하겠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모든 이유가 맞는다고 해도 내가 원하지 않았으면 나는 면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플루서는 “그 몸짓을 이해하려면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읽는다. “나는 이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몸짓의 해석에 대해 어떤 이론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이론이 없다는 것이, 이를테면 우리가 우리의 신비로운 ‘직관’을 자랑하듯이 대견하게 여길 이유는 아니다. 과학 시대 이전의 사람들도 돌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안다는 기분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낙하 이론을 갖춘 우리가 비로소 이 사태를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몸짓의 해석 이론이 필요하다.”

열여섯 개의 몸짓으로 드러나는 인간이라는 존재

몸짓을 향한 플루서의 여정은 개별적인 몸짓에 대한 관찰을 따라 진행된다. 글쓰기의 몸짓, 말하기의 몸짓, 만들기의 몸짓, 사랑의 몸짓, 파괴의 몸짓… 모두 열여섯 개의 몸짓이 우리 앞에 놓인다. 얼핏 보면 이들은 별다른 순서 없이 나열되어 있는 듯하지만, 책을 읽으면 플루서가 왜 다른 몸짓이 아닌 이 몸짓들을 선택했는지, 그것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배열되어 있는지 드러난다. 각 몸짓이 함축하는 바 역시 겉보기와 다르다. 사진 촬영의 몸짓이 한 예다. 플루서는 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그 사람을 촬영하려는 사진가를 상정하고, 있는 그대로 그들을 관찰한다. 어느 순간, 사진 촬영의 몸짓은 철학의 몸짓으로 변한다. 플루서가 지금껏 설명한 내용을 철학에 대입하면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몸짓에 대한 관찰은 제의의 몸짓으로 이어진다. 그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제의는 종교의 문제가 아닌 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방금 말한 것은 모험적인 주장이다. 제의에 관한 전문적 문헌들에서 이야기되는 거의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파이프 흡연의 관찰이 직접적으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파괴의 몸짓에 대한 질문은 악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식물 재배의 몸짓은 겉보기와 달리 얼마나 변태적이고 반자연적인 몸짓인지, 생태론이 얼마나 역사를 넘어선 곳에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렇듯 글쓰기라는 “단선적이고, 한심하게 일차원적인 몸짓”에서 출발한 플루서의 탐구는 역사와 문화,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우리는 결국 몸짓이란 우리 자신임을, 그것이 언제나 자유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플루서의 글쓰기와 작가 안규철

플루서의 글쓰기는 독특하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설명을 가능한 한 아무런 선입견이나 전제 조건 없이, 인용에 기대거나 그 흔한 주석 하나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서 끌어낸다. 물론 그것이 현상학이긴 하나, 그것만으로는 명징하면서도 함축적인, 이론적이면서도 반아카데믹한 그의 글쓰기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플루서에게 글쓰기는 생각의 한 방법이고, 그의 생각은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에게 ”어떤 몸짓을 통해서 표명되지 않는 생각이란 없다. 표명 이전의 생각은 하나의 가상성, 즉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생각은 몸짓을 통해서 실현된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몸짓을 하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다. (…) 글을 쓰는 몸짓에서 이른바 문체의 문제는 덤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이다. 나의 문체는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고,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내 글쓰기의 몸짓이다.”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 또한 플루서의 글쓰기를 특징짓는 요소다. 그는 평생 네 가지 언어, 즉 독일어, 포르투갈어, 영어,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이 언어들은 그의 내부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내가 내 기억 속에 저장된 언어들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한 말이다. 물론, 나는 번역을 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것들 전부를 초월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또한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언어를 택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언어들은 나를 지배하고 나를 프로그래밍하고 나를 초월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언어는 나를 그 고유한 세계 속으로 던져 넣기 때문이다. 단어와 언어들이 나에게 행사하는 이러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나는 글을 쓸 수 없다. 나아가서 그것은 글 쓰는 몸짓에 대한 내 결정의 근원에 있다.”

일찍이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작가 안규철은 이러한 플루서의 글에 매료되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하는 그의 명철하고 유연한 사유”는 그가 “세상과 미술을 바라보는 방식에 결정적인 각인을 남겼다.” 1995년 그가 발표한 「손」은 바로 이 책에 실린 「만들기의 몸짓」에서 직접 비롯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넘어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 작가가 된 안규철이 다시 플루서로 돌아가 ”참혹한 20세기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시선으로 인간의 몸짓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나아가서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려 한 플루서의 독창적인 사유를“ 우리말로 옮긴 결과이다.

우리의 몸짓은 여전히 변하고 있다

인간의 몸짓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다시 말해 모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해석하려는 시도와 같다. 우리가 하는 몸짓들이 모여 역사를 이루고, 현재를 구성하고, 미래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말미에 실린 두 편의 글에서 플루서는 이 책을 쓴 진짜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우리의 몸짓이 변화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서구 문화를 지탱해온 가치관과 방법론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역사가 과거와 같은 식으로 흘러갈 수 없음을, 모든 일이 부조리해지고 있음을, “엄밀히 말해 우리는 모든 일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그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방향을 새로 잡아야” 하기에, “어쨌든 실천적으로 여기 존재하려면 새로운 유형의 이론을 발전시켜야” 하기에 그는 이 책을 썼다. 그로부터 3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의 몸짓은 여전히 변화 중이다. 우리는 여전히 위험에 처해 있다. 혹은 플루서가 예견한 위험이 이제야 모두의 눈앞에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발췌

엄밀히 말해서, 그러니까 모든 일이 불가능해졌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이 무의미하다면, 일하는 몸짓이 부조리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일은 기능하기로 대체되었다.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실현하거나 현실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는 어떤 기능의 담당 직원 역할을 한다.(30쪽)

만들기의 몸짓은 타자를 위한 손의 열림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결말의 시점에서 본다면, 만드는 몸짓 역시 타인에 대한 사랑의 몸짓이다. 결코 찾을 수 없으면서 손이 대상 속에서 찾는 완전함은 실망한 사랑의 몸짓이다. 그것은 인간 특유의 몸짓이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극복을 추구하고, 체념을 넘어 사랑에서 끝난다.(70쪽)

성의 인플레이션이 성의 가치를 깎아내렸기 때문에, 이 혼동의 결과로 사랑의 몸짓 또한 가치가 떨어진다. 또 우리는 점점 더 평정에 필요한 순진함을 잃고, 더 기술적이고, 더 가상적이고, 더 비판적으로 되기에, 사랑의 몸짓의 본질에 다가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극이다. 사랑의 몸짓은, 우리가 타인 속에 동화되고 소외를 극복하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몸짓 없는 모든 의사소통의 몸짓은 오류이다. 또는, 사람들이 과거에 말했던 대로, 죄악이다.(79쪽)

파괴와 해체가 의도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들이 ‘실용적’일 때, 그 동기는 ‘불순’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순수한 악’이 아니다. 그리고 순수한 악이 아닌 것은 전혀 악이 아니고, 오히려 자유에 대한 좌절된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의도 없이, ‘순수한 동기’에서 일어난다면, 그것들은 사악하다. 드물긴 하지만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순수한 선’이 그렇듯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 그 파괴와 해체는 끔찍하다.(88쪽)

사진 촬영의 몸짓에 대해 방금 말한 것은, 몇 가지만 바꾸면 철학하는 몸짓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철학하는 몸짓을 조사하면 우리는 아마도 비슷한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똑같은 세 측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사진 촬영은 철학의 입장을 새로운 맥락으로 번역하는 몸짓이라는 점을 말해야 한다. 사진에서처럼 철학에서도 위치 탐색은 분명히 나타나는 측면이다. 조명을 받는 장면의 조작은 늘 쉽게 인정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철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움직임들의 특징이다. 자기비판적인 측면은 우리가 이 조작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세 가지 양상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관찰하면, 사진 촬영의 몸짓이 산업시대의 환경에서 철학의 진화라는 느낌은 더 강해진다.(113쪽)

면도를 한 뒤 면도기에 남아 있는 수염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존재론적 성찰을 피하기 어렵다. 수염은 면도의 몸짓에 의해 그 존재론적인 장소를 바꿨다. 이전에 그것은 내 몸의 일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내 면도기의 일부분이다. 존재론적인 장소의 변경은 일의 몸짓의 특징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 다른 어떤 것을 만드는 것, 예를 들어 자연적인 무엇으로 인공적인 무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면도의 몸짓은 일의 몸짓이다. 그러나 면도의 몸짓에서는 장소 변경과 관련되는 것이 사물이 아니라, 몸짓을 하는 사람 자신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곧바로 우리는 이 몸짓에서 본질적인 것을 지나쳐버림을 알게 된다.(54쪽)

파이프 흡연은 바로 그 세속성과 무해함으로 인해, 어떤 신앙에서 제의에 관한 논쟁들을 중재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 대통에 담배를 담을 때 처음에 단단히 누르고 나중에 느슨하게 눌러야 하느냐는 문제는, 토요일에 닭이 낳은 달걀을 먹어야 하느냐 아니냐와 같은 유형의 문제처럼 보인다. 이들은 뭔가를 얻으려는 의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이론적인 질문인 동시에, 완전하게 실천을 향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비이론적인 질문이다.(177쪽)

우리의 몸짓들은 변화를 앞두고 있다.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 몸짓의 현상학에 대한 시론의 마지막 장이기도 한 이 글은, 우리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학문의 위기, ‘탐구의 몸짓’의 위기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는 뒷받침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자들, 연구소와 도서관과 학교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몸짓은 100년 전과 거의 같은 반면, 춤을 추거나 앉거나 먹는 것 같은 다른 몸짓들은 이와 달리 새로운 구조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이 제시하는 논지는, 우리의 모든 몸짓들(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은 과학 연구에 의해 구조를 갖게 되며, 우리의 몸짓이 변하고 있다면 그 변화의 이유는 탐구의 몸짓이 변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13쪽)

아마 우리는 지금 혁명적 상황에 (우리가 이 상황을 조망할 수 없고, 또 그렇기에 그것이 ‘객관적으로’ 혁명적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처해 있을 것이다. 혁명 속에 있다는 우리의 이런 느낌은 무엇보다도, 어쨌든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방향을 새로 잡아야 한다는 느낌으로, 어쨌든 실천적으로 여기 존재하려면 새로운 유형의 이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몸짓 일반 이론에 대한 이 제안은 이러한 느낌에서 비롯되었다. 몸짓은 우리의 능동적인 세계-내-존재의 구체적인 현상의 문제,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결국 자유에 관한 것이다.(251쪽)


차례

1장 몸짓과 정동: 몸짓 현상학 연습
2장 기계의 저편에서(그러나 여전히 몸짓의 현상학 이편에서)
3장 글쓰기의 몸짓
4장 말하기의 몸짓
5장 만들기의 몸짓
6장 사랑의 몸짓
7장 파괴의 몸짓
8장 그리기의 몸짓
9장 사진 촬영의 몸짓
10장 영화 촬영의 몸짓
11장 가면 뒤집기의 몸짓
12장 식물 재배의 몸짓
13장 면도의 몸짓
14장 음악을 듣는 몸짓
15장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몸짓
16장 전화 통화의 몸짓
17장 비디오의 몸짓
18장 탐구의 몸짓

부기: 몸짓 일반 이론을 위하여
주석
역자 후기


지은이

빌렘 플루서는 철학자, 저술가, 저널리스트이다. 1920년 프라하 유대계 가문에서 태어난 빌렘 플루서는 1939년,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나치의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건너갔다. 모든 가족을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그는 1941년 브라질 상파울루로 망명을 떠나 한동안 무역업에 종사했다. 1959년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과학철학 강의를 시작, 1963년 같은 대학 커뮤니케이션 철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1972년 브라질 군사 정부와 갈등을 빚은 그는 다시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 독일과 프랑스에 살며 유럽과 미국 여러 대학에서 초빙 교수로 강의했다. 이후 프랑스 남부 호비옹에 정착해 왕성한 저술 및 강연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91년, 강의를 위해 찾은 고향 프라하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저서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Für eine Philosophie der Fotografie)』(1983), 『테크놀로지 이미지의 우주로(Ins Universum der Technischen Bilder)』(1985), 『탈역사(Nach geschichten)」(1990), 『몸짓들: 현상학 시론(Gesten: Versuch einer Phäno menologie)』(1991/1993) 『문자.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Die Schrift. Hat Schreiben Zukunft?)』(1992) 등이 있다.

옮긴이

안규철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계간미술』에서 7년간 기자로 일했으며, 1980년대 중반 ‘현실과발언’ 동인으로 활동했다. 프랑스 파리를 거쳐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던 1992년, 첫 개인전을 열며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귀국 이후 『사물들의 사이』(1996), 『49개의 방』 (2004),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2014),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2015) 등의 개인전을 비롯해 여러 국내외 기획전,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일상적 사물과 공간에 내재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을 발표해왔다. 저서로 『그림 없는 미술관』(1996), 『그 남자의 가방』 (2001),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2013),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2014) 등이, 번역서로 『미켈란젤로』(2000), 『만 레이』(2003) 등이 있다.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감수

김남시는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예술학 전공 조교수이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본다는 것』(2013), 『광기, 예술, 글쓰기』(2016) 등이, 번역서로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2015),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2016), 한병철의 『권력이란 무엇인가』(2016), 보리스 그로이스의 『새로움에 대하여』(2017) 등이 있다. 문화 및 매체 이론을 연구한다.


편집

박활성

디자인

황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