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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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
Hyacinthe

앙리 보스코 지음, 최애리 옮김

‘이아생트’의 탄생

“나는 『이아생트』를 읽고 또 읽었다. 그 감명이 동일했던 때는 결코 없었다. (…) 『이아생트』의 30쪽 정도를 한 줄 한 줄 주석해나간다 하더라도 섬세하면서도 심오한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중에서

프랑스 작가 앙리 보스코는 아비뇽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어와 고전문학을 가르치며 3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여러 문학상을 탄 작가다. 그의 신비로운 소설 『이아생트』(1940)는 『반바지 당나귀』(1937), 『이아생트의 정원』(1946)과 더불어 3부작을 이룬다. ‘이아생트’라는 한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이 소설에서 이아생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책의 3분의 1이 넘어갈 무렵이다. 갈리마르 출판사 폴리오판에 실린 서문은 3부작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콩스탕탱과 이아생트라는 두 아이는 남다른 모험을 겪으면서 지혜와 사랑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게 되는데, 그러기에 앞서 마법사 시프리앵의 주술을 벗어나야 한다. 권능을 탐하는 마법사 시프리앵은 신의 작품이 불완전하며 인간들에 의해 변질되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이 세상에서 재창조하고자 하며, 두 아이를 그의 지상 낙원의 최초의 피조물들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혼들에 대한 초자연적 지배력은 있다 해도,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 반면 콩스탕탱과 이아생트는 차츰 사랑을 경험하게 되며, 사랑이야말로 그들의 삶의 방향을 인도하게 될 것이다. 이아생트란 불가능하고도 불가결한 사랑, 인간들과 신의 비밀인 사랑, 그것 없이는 어떤 삶도 현실성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의 비밀인 사랑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막상 작품을 읽어보면, 이아생트를 둘러싼 세 편의 이야기는 그리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 『반바지 당나귀』가 동화적인 분위기 덕분에 청소년 도서로 발간되기도 하는 데 비해 『이아생트』는 작가의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며, 3부작을 완결하려 한 것으로 보이는 『이아생트의 정원』 역시 또 다른 의문들을 낳는다. 즉 여느 3부작과는 달리, 이 세 작품에는 별로 일관성이 없다.

“『이아생트』가 『반바지 당나귀』의 후속작이며, 뒤이은 『이아생트의 정원』과 함께 3부작을 이룬다는 사실을 아는 독자, 이미 『반바지 당나귀』를 읽은 독자라 하더라도 이 세 작품에서 일관되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반바지 당나귀』는 열두 살 난 소년 콩스탕탱 글로리오의 시점에서 산 위의 아름다운 정원에 대한 동경을 그리는 데서 시작하여, 거친 자연을 길들여 그 지상 낙원을 건설한 마법사 시프리앵이 소년을 후계자로 삼으려다 좌절하자 소년의 집에서 자라던 어린 고아 소녀 이아생트를 유괴하여 사라진다는 열린 결말로 끝맺는다. 그러니 이아생트가 다시 등장하는 작품에서 그 후일담을 기대함직도 하지만, 실제로 『이아생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3부작은 그 연대와 줄거리가 조금씩 어긋난다. 이는 30여 년 전 『이아생트』를 발견하고 오랜 시간 거듭 읽으며 옮겨온 번역가 최애리가 「옮긴이의 글」 에서 분석했듯, “미리 정한 바대로 지은 소설”을 기피하는 작가의 소설관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보스코가 소설에 관한 강의를 위해 준비했던 원고에 의하면, “소설은 써나가는 동안 미리 예견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해 살아 있는 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반바지 당나귀』를 발표한 이후 보스코는 독자들로부터 소설 말미에서 사라진 이아생트의 행방에 대한 질문을 받기 시작해, 결국 그 역시 이아생트의 행방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가진 바 없었으므로” 소설가는 “탐험”을 떠나는데, 이 탐험은 『반바지 당나귀』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전작과는 정반대의 풍경을 그려나가며 『이아생트』를 써나가기 시작한다. 눈 덮인 벌판에 문득 드러난 발자국. 이름 모를 화자의 집 주변에 나타난 발자국의 주인은 한 여자가 된다. “소설가는 마음속에서부터 그녀가 누구인지 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이아생트!라고.”

기다림 끝에 비로소 나타난 이름. “지옥에서의 한 철”과도 같은 “정련된 진수”, 『이아생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기다림에서 기다림으로

“거기서 나는 등불을 보았다. 나를 붙잡은 것은 그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것을 말 없는 다정함으로 바라다보았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켜놓은, 내 등불이었다. 그 따스한 불빛 아래서 그처럼 밤늦도록 깨어 있는 그 사람을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그리기에 이르렀다. 때로는, 그러한 유사성을 넘어서, 겨울밤의 유일한 별이 빛나는 라 주네스트의 그 창문 뒤에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명상에 잠겨 있을 그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도 했다. 나 자신, 그러나 내가 모르는, 나를 사로잡기 시작한 나 자신이었다.” (본문 23~4쪽)

들판 건너편에 자리한 집(라 주네스트) 창문에 켜지는 등불에 관한 묘사로 시작하는『이아생트』는 화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지난여름부터 성가브리엘 고원의 두 집 중 한 집(라 코망드리)에 머물기 시작했다는 정도의 정보밖에는 알 수가 없다. 자신을 잃어버린 이 익명의 존재는 내적 공허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흔적들을 찾아 헤맨다”. 좀처럼 맥이 잡히지 않는 그의 행보는 신비함을 증폭시키고, 그 가운데 찬연히 드러나는 몽상적인 문장들은 라 주네스트 창가에 켜진 등불이 이름 모를 화자를 매혹하듯, 아득하고도 분명한 빛으로 읽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렇듯 실상 『이아생트』의 대부분은 이아생트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자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보스코는 이 화자에 대해 『이아생트의 정원』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불안에서 생겨난 구름에 뒤덮여, 환상과 꿈과 황홀경과 절망에 온통 사로잡힌 나머지, 그는 자기 영혼이 바라보는 대상과 영혼 자신을 더 이상 구별하지도 못한다.” 작가의 강연 원고에 따르면 바로 보스코 그 자신이었던 화자는 자신을 찾아 헤매는 가운데 다른 이가 켜놓은 등불의 기다림에 기대게 된다.

“이처럼 기이한 기다림의 구도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겨울밤, 정확히는 성탄절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이아생트는 라 코망드리의 문을 두드린다. (…) 하지만, 그녀가 사랑을 호소하는 영혼의 모습이 확연해질수록 화자는 자신이 그 영혼이 아님을 깨닫게 되며, 마침내 환한 달빛 속에서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 이아생트는 자신의 착각을 발견하고 떠나가버린다.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인가! 화자가 상상한 어린 시절 고향의 추억 속 소녀 이아생트는 자신도 그 고향을 찾아 돌아오지만, 그가 지어낸 상상 속의 고향으로는 그녀를 맞이하지 못한다. 내적인 공허는 대상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이 되고, 간절한 기다림은 주문(呪文)과도 같이 미지의 대상을 불러오지만 — 이아생트는 그렇듯 전 존재를 건, 절대 동경의 이름이라 할 것이다 — 그 대상을 맞이할 실체는 없는 것이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즉 이아생트는 (등불의) 기다림에 더해진 (화자의) 기다림이 불러낸 대상이다. 이러한 등불들, 즉 기다림들이 비추는 자리마다 드러나는 화자의 고뇌와 번민, 방황은 읽는 이를 이끄는 새로운 등불들이 된다.
아래의 인용은 도입부에서 화자가 자신이 머무는 집이 거한 땅 아래에 펼쳐진 정신적인 지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으로,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땅 아래에 정신적인 지세(地勢)가 펼쳐져 있는 것을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바위, 진흙, 물, 나무, 인간 그리고 짐승만으로는 그러한 지세를 만들어내기에 충분치 못하다. 거기에는 신비로운 만남들, 이 요소들 사이에서 감지되는 미지의 조화, 그리고 알지 못할 지하의 자장(磁場)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거기서 영(靈)이 살아 숨 쉰다고 한다. 때로는 반대로, 영은 거기서 쉬기도 한다. 영은 드러나지 않지만 거기에 있다. 그때부터는 아주 작은 수풀도, 가장 초라한 담벼락도 기이한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샘들과 함께 대지의 불안케 하는 향기가 스치는 이 특별한 땅 위에, 간혹 집이 선다 해도, 그 집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안식처가 되어줄 수 없을 것이다. 삶은 거기에서 한층 중대한 의미를 띠는 듯이 보인다. 더없이 일상적인 행동도 거기서는 쉽사리 모험이 되어버린다. 거기서는 영이 더 이상 이성의 충고들만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다른 전언(傳言)들에도 민감해진다. 그것은 추억과 기다림의 선택된 땅이다. 나는 이런 영혼의 상태들이 피어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으려고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돌이켜 즐거울 만한 추억이라고는 없었으니까. 더구나, 이 고장이 전혀 낯설었던 나는 거기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사막을 찾아다녔고, 그것을 찾은 것이었다.” (본문 16~7쪽)

철저히 고독해지고자 굳이 찾았던 ‘사막’을 벗어나, ‘늪터’에서의 방황을 딛고, 그는 어디로 향하는가? 작품 말미에 화자가 다다른 그곳은 마법사 시프리앵이 조성한 후 이아생트를 가두고자 했던 지상 낙원, 실바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알려진 그곳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떤 힘에 이끌려 거기에 갔으며” “무엇을 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화자가 정원에 이르는 이 막연하고도 신비한 과정은, 독자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흡사해 보인다. 『이아생트』 곳곳의 대목들은 ‘어떤 힘’으로써 읽는 이를 이끈다. 화자의 고뇌를 기반 삼은 그 힘은 한 인간의 고뇌에, 번민에, 방황에 매혹됨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정원에 다다른 화자가 결국 자신의 비참을 느낄 때, 그 비참은 그대로 읽는 이의 몫이 된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내 비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산다는 것에 대한 긍지라고는 없”으며 “심지어 내 헐벗음에 대한 애증조차 없”는 마음 상태를? 화자는 다시 기다리는 쪽을 택한다. 기다리는 그에게 바람이 불어온다. 수십 년간 이 글을 읽어온 독자들에게도 같은 바람이 불어왔을 터이다.


발췌

가을이 그리고 겨울의 첫 바람들이 포플러 울타리에서 잎사귀들을 떨구어버리자, 집은 분명히 눈에 들어왔다. 낮 동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연기 한 자락 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듯한 낌새조차 없었다. 집은 잠들어 있었다. 집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다. 죽은 집들은 결코 그런 안식과 기다림, 불신과 굴복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떠나버리면 집이란 비바람에 노출된 돌무더기에 불과해진다. 그러나 인간의 온기가 집의 네 벽을 데우기 시작하면, 그것은 곧 가정적인 사념의 분위기를, 저 운명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외딴 소작 농가로부터는 감시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집은 온종일 웅크리고 있다가, 아마도 졸고 있다가, 밤이면 살아나곤 했다. 그 집이 켜 드는 등불, 좁다란 창문을 통해 서쪽을 바라보는 등불은 때로 무슨 신호와도 같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어두워지면 어김없이 켜지는 그 불빛은 거기에 누군가가 깨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불빛을 사랑하게 되었다.
밤에 그 불이 켜지면 그뿐, 벌판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마치 마지막 영혼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4~5쪽)

나는 새벽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와 있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부드럽게 피어나 있었다. 내 안의 동녘이 희미한 빛을 예고하고 있었으니, 빛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동이 터오고 내 최초의 기억들이 물들어가면서, 나는 내가 조용히 내 인간적인 형태의 옆에, 어딘가, 이미 아침의 꿈들이 도달한 곳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분명 땅의 최초의 부름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형체를 갖추었고, 그 유동적인 형태들은 미래를, 깨어남을 예고하고 있었다. 잠의 환영들은 내 기억의 문턱에서 스러지면서, 꿈의 비일관성과 몽상의 첫 매혹들 사이에 정돈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세계의 전언들이 의미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리하여 최면 상태의 현실들이 따로 구축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현실들이 나를 속인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나는 삶이 나에게 그 최초의 신호들을 보내고 있음을 이해했고, 간혹 큰 감동으로 가슴이 부풀기도 했다. 조금씩 나는 판단력을 되찾았고 용해되기 시작한 이 착란들을 나 스스로 반추해보면서, 내가 한때 추방했던 해묵은 욕망들이 다시 살아나려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더해가는 빛 속에서, 마치 극적인 단일성과도 같은 것이 형성되는 가운데, 이미 잠의 얼굴은 내게 작별의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바다 깊은 데서 올라오는 무해한 괴물과도 같이 조용히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인간적인 온기에서, 내가 방금 그 안으로 내려갔다 온 내 육체의 좁다란 형태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천장이 낮고 아직 어두운 방 한가운데서, 별들이 운행하는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나는 그 방향을 알지 못했으나, 차차 알게 될 것이었고, 적어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 작은 의혹이 내 가슴을 조여들었다. 나는 간신히 눈을 떴고, 문을 알아보았다. 날이 새고 있었다. (62~3쪽)

나는 횃불처럼 탔다. 내 목구멍은 산 채로 찢어지고 있었다. 오두막에 등을 붙인 채 섬광들에 눈부셔 하며, 나는 문설주들에 매달려 있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나는 끊임없이 “비, 비,”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연이어 섬광들이 비추는 가운데, 요지부동의 호반들과 매끈한 수면들이 보였다. 천둥이 쳤지만, 신기하게도, 공기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서, 이 지옥의 한복판에서, 눈에는 핏발이 선 채, 살은 불에 뜯기면서, 타는 냄새에 목이 갈라지면서, 불길 아래서, 나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을 느꼈고, 쓰러졌다.
(85쪽)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사건들은 여러 해 전에 일어난 것이지만, 별로 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드문 혼돈 가운데 살고 있었다.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은 쉽사리 외관과 혼동되었고, 나는 가시적인 세계와 거기서 떠오르는 심상(心象)들을 위험할 정도로 쉽게 뒤섞고 있었다. 때로 내 사고(思考)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워버리고, 그것들을 흡수한 뒤 그 주위에 자신이 그려내는 불안정한 윤곽들로 나를 에워싸곤 했다. 그 윤곽은 숨결 하나에도 흩어지고 마는 상상의 주문(呪文) 말고는 아무것에도 의지해 있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 숨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것이 온 뒤로는 세상도 세상에 대한 생각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대지를 잊어버렸다. (288~9쪽)


차례

작가에 대하여
이 책에 대하여

성(聖)가브리엘 고원
늪터

이아생트
회복기
돌아온 이아생트
정원

옮긴이의 글
앙리 보스코 연보


지은이

앙리 보스코(Henri Bosco, 1888~976)는 1888년 아비뇽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프로방스 및 이탈리아 혈통으로, 살레시오 수도회의 창립자인 성(聖)보스코와도 친척간이다. 그르노블 대학을 졸업한 그는 피렌체의 프랑스 문화원에서 이탈리아어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 아비뇽, 부르앙브레스, 필립빌 등지에서 가르쳤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다르다넬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에서 종군했다. 평화가 돌아오자 나폴리의 프랑스 문화원에서 10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첫 작품 『피에르 랑페두즈』(1924)를 썼다. 그 후 오랫동안 모로코의 라바트에서 교편을 잡았고, 귀국 후 니스와 루르마랭을 오가며 살았다. 보스코는 생애 30여 편의 소설, 회상록, 아동 도서 등을 썼으며, 1945년 『테오팀 농가』로 르노도상을 받는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6년 니스에서 숨을 거뒀고, 루르마랭에 묻혔다.

옮긴이

최애리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세 아서왕 문학 특히 그라알[聖杯] 소설들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 크리스틴 드 피장의 『여성들의 도시』 등 중세 작품들과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 조르주 뒤비의 『중세의 결혼』, 슐람미스 샤하르의 『제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등 서양 중세사 관련 서적들을 다수 번역했다. 그 밖에 피에르 그리말의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 예찬』, 조르주 심농의 『타인의 목』, 알베르토 망겔의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 등 여러 방면의 역서가 있다.


편집

김뉘연

디자인

본문 강경탁, 표지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