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말들」은 워크룸 프레스의 구글 크롬 확장 프로그램입니다. 새 창을 열 때마다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실유령 도서의 인용문을 출력합니다. 내려받기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온라인 판매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Lascaux ou la naissance de l’art / Manet

조르주 바타유 지음, 차지연 옮김

조르주 바타유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는 1955년 알베르 스키라 출판사에서 출간된 두 권, 『선사시대의 회화: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과 『마네』를 함께 엮은 책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였던 바타유는 예술사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 예술 작품들에 대한 그의 독특한 사유는 저작들 곳곳에 드러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예술 작품에 대해, 한 화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하는 글이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은 이 두 권뿐이다.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 한국어판은 파리7대학에서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차지연이 옮겼고, 초판이었던 알베르 스키라 출판사 판본과 현재 정본으로 통하는 갈리마르 출판사 판본을 따라 라스코동굴 벽화 사진과 마네의 주요 작품 도판을 부록으로 수록했다.

라스코, 최초의 예술

“라스코는 우리를 가장 섬세하고 가장 열광적인 문명의 예술에 데려다 놓는다. 라스코에서 느껴지는 것, 라스코에서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인습에 찌들지 않은, 열에 달뜬 움직임들 속에서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오는 이 작품들 앞에서, 정신이 춤을 추는 느낌이 우리를 흥분시킨다. 이 작품들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존재와 그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자유로운 소통이다. 풍요를 발견한 이 세계와 하나로 합치된 인간은 여기에 몸을 내맡긴다.”(본문 149쪽)

첫 번째 글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은 프랑스 남서쪽 도르도뉴 주 몽티냐크의 라스코동굴을 다룬다. 라스코동굴은 선사시대 동굴들 중 벽화가 풍부하기로 유명한데, 이 벽화는 약 2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에 그려졌다고 추정된다. 동굴은 1940년 9월 12일 몽티냐크의 10대 소년들에 의해 발견됐다. 사냥을 하러 나섰던 그들은 개가 한 구덩이로 내려가기에 따라 들어갔다가 동굴과 벽화를 발견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1500여 점에 이르는 벽화의 소재는 주로 동물들이다. 상상의 동물 일각수의 뒤를 황소, 말, 곰, 코뿔소, 사슴, 염소 등이 잇는다. 인간의 모습 또한 그려져 있다. 그림들은 광물을 빻거나 액체에 녹인 재료를 손가락, 식물로 만든 도장, 털로 된 타래, 치아로 끝을 씹은 막대 등에 묻혀 채색되었다(라스코인들은 튜브에 가루를 넣고 불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40년 발견된 벽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해 1948년 일반에 공개되었고,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그런데 라스코는 최초의 선사시대 동굴은 아니다. 1994년, 라스코동굴보다 1만 5000년 앞선 쇼베 동굴벽화가 발견된 바 있다. 또 바타유가 오리냐크기 동굴로 분류했던 라스코동굴은 훗날 막달레나기 후기 동굴로 밝혀졌다. 그러니 이 글에서 바타유가 논지의 근거로 삼는 점들을 온전히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바타유가 왜 라스코동굴과 라스코인을 주목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 힌트를 얻을 수있다.

“우리와 닮았고 분명 우리의 동류라 말할 수 있는 인간이 탄생한 것은 바로 예술 작품을 만들었던 ‘라스코인’부터였다. 라스코인은 불완전한 인간이었다고 쉽게 말해버릴 수도 있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 중 상당 부분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라스코 인간이야말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결정적 미덕, 즉 창조의 미덕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본문 18쪽)

바타유는 라스코동굴 벽화를 그린 라스코인들이 ‘예술 작품’을 ‘창조’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바타유의 용어로 다시 풀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라스코동굴은, 인간이 노동하는 인간이나 인식하는 인간을 넘어서서 놀이하는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성, 즉 주권성을 처음으로 획득한 곳”(옮긴이)이다. 바타유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용어 중 하나인 ‘주권성’이란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은 상태, 자기 자신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를 말하며, ‘주권적 인간으로서의 예술가’는 “스스로를 희생제의에 내맡기는, 스스로를 불에 태우듯 소진시키는 사람”이고, 그러한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자들은 “희생제의 참가자들이 제물의 죽음을 목격하며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의 체험을 하며, 죽음을 겪어볼 수 있다”(옮긴이).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에서 바타유는 우리가 선사시대 인간들에 대해 갖는 무의식적 반응, 즉 ‘인간답지 않다’는 선입견에서 비롯한 일종의 저주 비슷한 감정을 비판하며, ‘최초의 인간들’이 ‘놀이- 인간(호모루덴스)’으로서 ‘주권’을 발휘한 라스코동굴 벽화를 ‘최초의 예술’로서 주목한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들’의 후손인 우리를 이 ‘최초의 예술’ 앞에 세운다.

“‘죽음’의 소통 속에서 바타유는 ‘탄생’의 의미를 이끌어내고 있다. 라스코인도 죽었고 바타유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이 지금껏 남아 있기에, 우리는 예술적 체험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재생된다는 의미에서 끝없이 현재적인 사건으로서의 탄생에 참여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러한 탄생을 함께 공유하고 경험하고, 소통할 수 있다면 좋겠다.”(옮긴이)

마네, 최초의 현대 예술

“마네라는 이름은 회화의 역사에서 독자적 의의를 갖는다. 마네는 단순히 위대한 화가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앞선 세대 화가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네 세상과 맞닿는 시대를 열었던 화가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이 살던 시대와 어울리지 못하고 파문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마네의 회화가 불러일으킨 갑작스러운 변화, 그 신랄한 전복을, 오해의 소지가 없다면 혁명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본문 217쪽)

두 번째 글의 주인공은 에두아르 마네다. 바타유는 “기이한 반발심, 무모하고도 불안에 찬 탐색”을 통해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회화의 새로운 형식을 펼친” 화가로 마네를 주목한다.

마네의 그림은 왜 새로운가? “마네 말고 다른 화가들 역시 새로운 회화로 이행하고 있었음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작용 없이 오직 그림을 그리는 예술로서의 회화, 즉 ‘현대 회화’ 탄생의 공은 마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회화에 이질적인 모든 가치’에 대한 거부, 주제의 의미화에 무관심한 태도는 바로 마네로부터 시작된다.”(본문 247쪽) 주제에 무심한 회화. 바타유는 마네의 그림들을 ‘말 없는 그림’이라 일컫는다. “마네의 회화가 무엇인가를 서술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서술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무심한 채 서술한다. (…)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가장 말 없는 그림이다. (…) 이 작품은 웅변의 부정이자, 마치 언어가 그리하듯,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회화에 대한 부정이다.”(본문 249~50쪽) 그리하여 바타유에 따르면, 마네의 회화는 ‘최종적 침묵’에 도달한다.

물론, 바타유가 다시 지적한 대로, 현대 회화에서 주제를 없애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다. 바타유는 마네의 자리를 이보다 한 발 더 앞에 마련한다. “마네는 주제의 의미작용을 제거했다. 주제를 없애고 파괴하는 일은 사실 현대 회화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 어떤 부재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의 작품은 하나의 주제, 하나의 제목을 지닌다. 그런데 이 주제나 제목이란 것들은 별다른 의미를 지니는 대신 그 그림의 구실 역할을 할 뿐이다. 우선, 군인들의 손에 의해 기계적으로, 냉혹하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주제에 무심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격렬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게 하는 의미를 짊어진 주제다. 하지만 마네는 이것을 냉혈한처럼 무감각하게 그려냈고, 작품 관람자 역시 그의 깊은 무감각 상태를 따라가게 된다.”(본문 251쪽) 바타유는 이렇게 마네의 그림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면밀히 살피면서 마네에게 주제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 그의 ‘세련미’를 발견해낸다. “마네의 세련미는 주제가 무심함 속으로 잠겨듦으로써 오직 회화의 구실 역할만 하도록 축소될 때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 절제된 세련미, 껍질을 벗겨낸 마네의 세련미는 곧 공정성을 얻게 되었다. 이는 무심함 그 자체 속에서뿐만이 아니라, 그 무심함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능동적 확신 속에서 얻게 된 것이다. 마네의 무심함은 지고(至高)의 무심함, 즉 굳이 애쓸 필요도 없이 본디 가혹한, 스캔들을 일으키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그 자체로 스캔들 거리라는 사실을 굳이 알려 들지도 않는 그런 무심함이다. 스스로 스캔들이 되고자 하는 스캔들에는 절제가 없다. 그렇지만 절제란 스스로 움직이고 능동적으로 개입할수록 더욱 완벽해지는 것이다. 과감한 개입이야말로 마네의 특징이다. 마네는 그렇게 함으로써 지고의 세련미에 도달했다.”(본문 283–4쪽) 마네의 그림은 그동안 정당하게 여겨졌던 감정에 대해 본질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그리하여 대중이 분노하게 됐다는 것이 바타유의 분석이다.

그리고 당대의 스캔들 「올랭피아」가 탄생했다. 바타유는 우리가 이제 새로운 세계에 진입했고, 「올랭피아」의 막이 열렸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의 벌거벗음(정녕 그 육체에 걸맞은)에서는 침묵이 발산한다. 마치 침몰한 배, 텅 빈 배에서 스미어 나오는 침묵처럼. 올랭피아의 존재 자체는 그 현존에 대한 ‘신성한 공포’다.”(본문 269쪽) 또한 마네가 올랭피아에게서 장신구들을 치워 버림으로써 되찾은 것은 ‘위엄’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사물이라도 이미 다 지니고 있는”, “더 이상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있는 무엇, 회화의 힘이 폭로하는 그 무엇이 지닌” 위엄(본문 280쪽).

바타유의 눈에, 마네는 인상주의의 선두에 서서 인상주의를 넘어선 자였다.

이제 우리는 바타유가 왜 라스코와 마네를 택해 연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타유에게 예술은 대상화된 작품으로 파악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삶 자체가 예술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바타유에게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예술이 존재하게 된 그 순간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바타유가 수많은 예술 작품 중 라스코의 벽화와 마네의 「올랭피아」에 주목했던 이유다.”(옮긴이)


발췌

라스코에 들어서는 순간, 최초의 인간 화석이나 석기 같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의 진열대 앞에서는 가져보지 못했던 어떤 강렬한 느낌이 우리를 옥죈다. 시대를 막론하고 걸작 앞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존재감—환히타오르고있는존재감—말이다.이느낌이어떤것이든간에,인간이 만든 작품의 아름다움이 말을 거는 대상은 우정, 우정의 감미로움이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던가? 우정이란, 오직 아름다움만을 그 답으로 삼으면서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이자 열정이 아니던가? (20쪽)

이 불가사의한 동굴은 이곳을 찾는 이를 끝없이 깜짝 놀라게 한다. 동굴은 이처럼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에 영원히 부응해주리라. 기적은 예술에서나 열정에서나 가장 심오한 삶의 열망이다. 우리는 종종 압도당하고 싶어 하는 이런 욕구를 유치하다고 판단하면서도 다시금 욕구한다.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언제나우리를깜짝놀라게하는것,기대하지못하던것,기대할수없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의 본질이란 역설적으로 우리가 불가능이라고 여겨왔던 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향수인 듯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라스코에는 가장 보기드문 여건들이 집결되어 있다. 동굴을 방문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기적이라는 느낌은, 일단 이 동굴을 발견케 했던 어마어마한 행운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 느낌은, 이 벽화가 창조된그 시대를 살았던 존재들의 눈에 비쳤던 이 형상들이 지니는 미증유적 느낌과 겹쳐진다. 라스코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시간들의 연속이 쌓아 올린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풍요로움을 현재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인간들이 가졌던 느낌, 이토록 엄청난 마력을 지닌 벽화들을 그려낸 그들 자신이 가졌던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거기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느끼곤 하는 자부심(어리석으리만치 개인적인 자부심) 비슷한 것을 이끌어냈을 리는 없는 데 말이다. 벽화들의 마력은, 무엇을 생각했든 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출현한 데서 비롯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라스코를 기적이라 말하는 것이다. 인류의 청춘은 라스코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풍요로움의 폭을 재단했다. 풍요로움의 폭, 다시 말해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 다다를 수 있게 한 그 능력의 폭, 즉 경이로움. 그리스 역시 우리에게 기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그리스에서 발산하는 빛은 낮의 빛이다. 낮의 빛은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번개가 내리칠 때, 빛은 더욱 눈부시다. (25~6쪽)

마네 이전에는, 시대를 거치며 예술의 혁신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하는 미(美)와 대중의 취향이 이토록 완벽하게 결별한 적이 없었다. 마네는 『살롱전』에서 잇따른 참사를 낳았다. 마네 이후에 와서야 대중의 분노와 비웃음이 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이만큼이나 확실하게 지시하게 된 것이다. 마네 이전의 화가들 역시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기는 하다. 고전주의 시대 취향의 상대적 통일성 역시 타격을 입었다. 낭만주의가 그 통일성을 파괴했고, 이는 대중의 분노를 유발했다. 들라크루아나 쿠르베, 또 매우 고전주의적인 화가인 앵그르마저도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올랭피아」야말로, 군중의 비웃음을, 그것도 아주 어마어마한 비웃음을 샀던 최초의 걸작이다. (218쪽)

오늘날 현행하는 형식들로는 주권적인 것이나 위엄 있는 것들을 결코 나타낼 수 없다. 현행하는 형식들은 왕궁이나 신전을 새로이 세우라고 명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이는 오직 “비밀스러운 왕권”을 통해서만 나타낼 수 있다. “비밀스러운 왕권”이란 말로가 세잔의 사과들에게 부여한 말이자, 마네의 「올랭피아」에 나타났던 것이고, 「막시밀리안의 처형」의 위대함 그 자체다. 이러한 왕권은 그 어떤 이미지에도 고유한 전유물로 속하지 않고, 자기 내부의 주권적 침묵이라는 영역에 도달한 자의 정념에만 속한다. 그리고 그런 자의 그림이 형상화되는 곳도, 표현하는 것도 바로 그 침묵의 영역이다. 이로써 회화는 부르주아지의 무게에 온통 예속되어 있던 세계로부터 대상들은 물론 대상의 이미지들까지 떼어내는 예술이 된다. 앙드레 말로가 처음으로 이 사실을 단언했다. 요컨대, 우리네 미술관에 있는 현대 회화야말로 지금 시대가 세운 유일한 대성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대성당은 비밀스럽다. 오늘날신성한것은폭로될수없으며,이제신성한것은말이없다.이세계는 내면의, 침묵의, 이른바 부정적인 형상화밖에는 모르는 세계다. 나는 이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그 말은 곧 최종적 침묵에 대해 말함이다. (256~7쪽)


차례

작가에 대하여
이 책에 대하여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라스코의 기적
라스코인
동굴 묘사
인간의 표상
라스코의 동물 그림과 조각 예술
부록

마네
연보와 색인
마네의 세련미
비개성적 전복
주제의 파괴
올랭피아 스캔들
비밀
의심으로부터 지고의 가치로
도판

옮긴이의 글
조르주 바타유 연보
찾아보기


지은이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962)는 프랑스의 사상가, 소설가이다. 프랑스 남부 오베르주에서 태어난 그는 매독 환자에 맹인이었던 아버지와 조울증 환자였던 어머니의 그늘 아래 한때 성직자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결국 파리 국립 고문서 학교를 택해 파리 국립도서관 사서가 된다. 평생 사서로 일했고, 오를레앙 도서관장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바타유는 매음굴을 전전하며 글을 썼던 에로티슴의 소설가였다. 그러나 또한 소비의 개념에 천착하며 세계를 바라본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였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사상에 이어 모스의 증여론와 헤겔 종교철학에 심취했던 바타유는『도퀴망』, 『아세팔』, 『크리티크』 등 당대 프랑스 사상계를 주도했던 여러 잡지들을 창간하고 운영했던 주체였다. 그는 생애 방대한 글들을 생산했고, 글들은 철학, 사회학, 경제학, 미술, 종교, 문학을 아우른다. ‘성(性)’과 ‘성(聖)스러움’, ‘작은 죽음’과 ‘죽음’ 등 인간의 삶을 ‘(비생산적) 소비’의 관점에서 관통하는 개념들은 ‘비지(非知)’의 상태, 즉 (‘주권[主權]’, ‘지고성[至高性]’, ‘지상권[至上權]’ 등으로도 옮길 수 있는) ‘절대권’에 수렴된다. 여러 필명 아래 쓰인 작품들은 서로 느슨히 연결된다. 자전적 에로티슴 소설들 『눈 이야기』, 『태양의 항문』, 『작은 것』, 『마담 에두아르다』, 『C 신부』, 『하늘의 푸른빛』, 『불가능』, 사후 출간된 『내 어머니』와 『시체』, ‘무신론 대전’ 3부작 『내적 체험』, 『죄인』, 『니체에 관하여』, 사상서 『저주의 몫』, 『에로티슴』과 『에로티슴의 역사』와 『에로스의 눈물』, 문학 이론서 『문학과 악』, 미술서 『선사시대의 회화: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마네』 등이 있다.

옮긴이

차지연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파리7대학에서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바타유의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 마네』를 한국어로 옮겼다. 강의 및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편집

김뉘연

디자인

본문 양으뜸, 표지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