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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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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피
Murphy

사뮈엘 베케트 지음, 이예원 옮김, EH 사진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머피』(1938)가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머피』는 베케트의 장편소설 중 영어로 처음 출간된 작품으로, 영어권에 작가의 명성을 널리 알린 소설이다.

베케트 초기 작품 세계의 전환점

“이 소설은 베케트의 작품 세계에 진입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는 동시에 (…) 베케트는 무엇보다 코믹한 작가라는 영국 내 평판에 힘을 실어 주었다.”(「해설」 중에서)

사뮈엘 베케트는 작가 생활 초기에 제임스 조이스에게 영향을 받아 현란하고 박식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소 산만한 글을 썼다. 『머피』는 이러한 조이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벗어난, 베케트 초기 작품 세계의 전환점이 된 소설이다. 또한 이 책은 영어권 독자들이 베케트의 글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 한국어판의 번역 원문인 페이버 앤드 페이버 판본을 편집한 J. C. C. 메이즈는 「해설」에서 “『머피』의 주인공은 알파벳의 열세 번째 글자인 M을 이름 첫 글자로 하는 베케트 작품의 여러 주인공 중에서도 원조 격 인물인 셈이고, 이후 뒤따를 작업들도 결국 머피를 주축으로 삼고 있다.”고 밝힌다. 즉 『머피』는 베케트가 “자기만의 주제와 형식과 문체를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작법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쓰도록 이끈” 책인 셈이다. “노련한 장인의 솜씨로 빚은 책인 양 시늉하는, 작가 자신이 반쯤만 허용하고 있는 스타일”은 “작가가 던지는 농담”인 동시에 “딜레마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된다.

딜레마, 아이러니, 웃음

『머피』는 주인공 머피가 어둠 속 축사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알몸인 머피의 몸을 목도리 일곱 장이 정자세로 붙들어 매고 있다. 머피는 자신과 세상이 한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종의 명상을 통해 “내면의 삶”(10면) 즉 “자기애가 가능한 작은 세계”(13면)로 진입하면서 정신과 물질(신체)을 철저히 구분하려 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근거한) 머피의 사고는 소설 전반에 걸쳐 행동으로 실행되며, 자기 자신의 정신에 대한 그의 집요한 진지함은 딜레마와 아이러니를 오가며 종종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덕분에 독자는 의외의 지점에서 허를 찔려 가며 웃게 된다. 애인 실리아와 정신적 지주 니어리, 또 다른 애인 카우니핸 등 각기 다른 이유로 자신을 뒤쫓는 이들을 멀리한 채 시인의 안내에 따라 또한 별점에 입각해 요양원에 다다른 머피가, 이제 자신 아닌 환자의 정신을 새롭게 인식하며 일하다 맞이하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자기 자신에 집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머피를 뒤따르다 보면 그의 남다른 선택이 납득되는 순간이 찾아든다. 이를테면 애인 실리아의 채근에 못 이겨 고용길에 오른 “머피가 찾는 한 가지는 (…) 그가 한순간도 수색하기를 포기한 적 없는 대상, 곧 자기 자신의 최상의 모습”(58면)인데, 이는 실은 누구든 수색하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할 모습일 수 있다. 머피는 “딱히 하는 일이 없”음에도 “제 앞날에 중대한 일들이 펼쳐지리라 믿”고 있고, “지난 이야기라고 찢어 버리는 일이 없”다(20면). 백지 상태의 현재에서 미래를 믿고 과거를 기억하는 그는 계속 나아간다. 일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의 정신을 넘어 다른 이들의 정신에 매혹되기 시작한다. 광기라고 알려진 약자들의 정신을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딜레마와 아이러니 사이에 산재한 웃음과 함께 전개되는 “머피의 정신”(85면)을 따라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등장인물

머피 — 주인공.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마땅한 직업 없이 지내다가 요양원(매그댈런 멘털 머시시트)에서 일하게 된다.
실리아 켈리 — 머피의 애인. 부모를 여의고 거리에서 일하다가 머피를 만났다.
윌러비 켈리 — 실리아의 할아버지. 종종 연을 날린다.
니어리 — 머피의 정신적 스승. 아내를 떠났고, 카우니핸 양을 흠모하게 된다.
쿠퍼 — 잡역부. 니어리의 조수. 머피를 찾는 니어리를 돕다가 해고당한다.
카우니핸 양 — 머피의 또 다른 애인. 와일리와도 사랑을 나누는 사이다.
니들 와일리 — 니어리의 제자. 머피를 찾는 카우니핸 양을 돕는다.
캐리지 양 — 머피가 옮긴 방의 집주인. 체취가 심하고, 실리아와 자주 얽힌다.
오스틴 티클페니 — ‘음주’ 시인. 머피에게 자신이 근무하는 요양원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
토머스 (‘빔’) 클린치 — 요양원에 근무하는 남자 수간호사. 티클페니에게 집적댄다.
티머시 (‘봄’) 클린치 — 빔의 쌍둥이 동생. 형과 함께 요양원에 근무한다. 사디스트 유형.
엔던 씨 — 요양원의 조현병 환자. 자살 위험 주의를 받은 상태. 머피와 체스를 둔다.
앵거스 킬리크랭키 — 요양원 상주 의무부장. 머피의 친구들에게 그의 마지막을 확인해 준다.


발췌

그가 알몸 채로 걸터앉은 의자는 갈라지거나 뒤틀리거나 수축하거나 좀먹거나 오밤중에 삐거덕대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 보장된 헐벗은 티크재 흔들의자였다. 오로지 그의 차지요 한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 머피가 앉은 자리는 커튼 쳐진 구석 자리로, 처녀자리만도 벌써 억만 번째인 저 가여운 늙다리 태양이 들지 않았다. 목도리 일곱 장이 그를 정자세로 붙들어 맸다. 두 장은 정강이를 의자 다리에, 한 장은 허벅지를 좌석에, 두 장은 가슴과 배를 등받이에, 한 장은 뒷짐 진 손목을 뒤쪽 버팀대에 각각 결박하고 있었다. 고로 지극히 국부적인 동작만 가능했다. 땀이 흥건히 흘러 뱃대끈들을 한층 옥좼다. 호흡은 감지되지 않았다. 갈매기처럼 서늘하고 동요 없는 두 눈은 처마 돌림띠에서 아롱져 사그라지는 얼룩을 향했다. 어디선가 20–30여 차례 아스라이 울리던 뻐꾹종이 길가 행상의 외침을 되받는가 싶더니, 이제 막다른 말간 골목에서 주거니 받거니! 주거니 받거니! 하고 예의 외치는 소리가 곧장 귓전을 때렸다. (9쪽)

머피는 자기가 난 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면 부디 그 말을 믿어 달라고 실리아에게 빌었다. 안 그래도 이미 이런저런 시도로 푼돈 재산이나마 탕진하지 않았던가? 자기가 명예직이란 만성질환을 앓고 있음을 믿어 달라고 빌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적으로 경제적 문제인 것만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형이상학적인 고려 사항도 관여돼 있는데, 그 암담한 빛에 비추건대 어느 머피가 됐건 머피로선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밤이 닥쳤다고 봐야 했다. 익시온이 언제 제 수레바퀴를 멀쩡한 상태로 유지 보수해야 한다는 계약을 맺었던가? 탄탈로스는 소금 먹을 일에 미리 대비했던가? 머피로서는 들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22–23쪽)

머피의 별점이 담긴 수크의 천궁도는 이 불운의 출생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동행했다. 그새 천궁도의 내용을 몽땅 외운 머피는 길을 가면서도 점괘를 속으로 읊었다. 적의 손에 들어갈까 두려워 아예 파기할 각오로 주머니에서 꺼낸 것만 수차례였다. 그러나 제 기억력이 얼마나 못 미더운지 잘 알기에 감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는 제 능력 닿는 데까지 천궁도의 지침을 따랐다. 레몬 한 줌을 의복에 뿌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자신의 힐렉과 신체 일체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항시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발의 통증을 크게 겪었으며 목 또한 통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에 그는 만족감을 느꼈다. 그로써 천궁도가 확증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확률로 신장염과 갑상선 질환, 배뇨 곤란과 발작의 위험성은 감소할 터였다. (61쪽)

이 순간 흔들의자에 5분이라도 앉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머피는 기꺼이 하(下)연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것이요, 벨라콰처럼 바람이 미치지 않는 바위 면에 기대어 태아처럼 웅크리는 자세도 단념할 터, 그리하여 새벽녘에 갈대 너머로 전율하는 남쪽 바다와 상승하며 북으로 기우는 해를 바라보는 일도, 그 전부를 갓난아이가 꿈꾸듯 정자터에서 화장터에 이르기까지 죄다 다시 꿈꾸기 전에는 속죄로부터 면역되는 일도 단념할 것이었거늘. 이러한 사후의 상태를 그는 굉장히 중시했고 그 여러 이점이 마음속에 워낙 상세히 그려졌기에 실제로도 자신이 노년기까지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에 이르거든 아주 오랜 시간 꿈에 젖어, 또 동틀 녘이 제 황도대를 통과해 지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누워 지낼 것이요, 그런 뒤에야 낙원에 이르는 수고로운 오르막길을 오를 것이다. 일대일에도 못 미치는 어처구니없는 경사도를 지나. 그러니 신실한 상인의 선의의 기도가 머피의 명을 단축하지 않기를 신에게 간곡히 바랄밖에. 이것이 그의 벨라콰 환상이요, 어쩌면 그의 여러 환상 중에서도 가장 체계가 잡힌 환상에 속할지 몰랐다. 또한 고난의 경계 바로 너머에 놓인 환상 중 하나이자 자유의 첫 풍경이기도 했다. (63쪽)

머피의 정신은 속이 빈 커다란 구체, 외부 우주에 단단히 닫혀 있는 하나의 공으로서 스스로를 상상했다. 우주에 닫혀 있다고 해서 결핍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 그로써 배제된 것치고 저 내부에 자체적으로 갖추지 않은 게 전혀 없었다. 그 바깥에 자리한 우주 가운데 한때 존재했거나 현재하거나 앞으로 존재할 것들 중에서 이미 그 내부에, 가상으로 혹은 실제로, 혹은 가상에서 실상으로 부상하거나 실상에서 가상으로 낙하하여, 현재해 있지 않은 것이라곤 없었다. (85쪽)

이들 중 누구도 머피에게 공포감을 안겨 주지 않았다. 그가 이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느낀 감정 중 가장 쉽사리 정체가 가늠되는 감정은 존경심, 그리고 스스로가 가치 없다는 느낌이었다. 조증 환자를 제외하고는 — 이이는 빈 주머니와 청렴결백함에 맞서 승승장구한 모든 자수성가형 황금만능주의자의 전형에 가까웠다. — 환자 전원이 자기 몰두에 빠져 우발적인 세계의 여러 우발적인 일들에 관해 철저한 무관심을 보인다는 인상이었는데, 이 무심함은 머피 본인이 선택했으나 그리도 드물게 달성해 온 바로 그 무심함이었다. (129쪽)

머피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체스 판을 챙겨 오락가락실의 조용한 한쪽에 판을 차리고는 첫수를 두었고(머피는 언제나 백만 두었으므로), 잠깐 일을 하고 돌아와 엔던 씨의 응수를 확인하고 두 번째 수를 두고, 다시 일을 하러 갔다가 돌아와 다음 수를 두기를 종일 반복했다. 두 사람이 판을 앞에 두고 마주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엔던 씨는 이리저리 서성이던 발길을 1–2분 이상 멈춘 적이 없었고, 머피는 주어진 임무와 봄의 눈초리를 피해 1–2분 이상 할애할 엄두를 못 냈다. 두 사람이 이렇듯 상대 없이 각기 자기 수를 두고, 남은 시간에 기물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갈 길을 갔다. 그렇게 게임이 진행되다 보면 저녁이 되도록 딱히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는 양쪽의 실력이 막상막하라거나 게임을 진행하는 환경이 불리해서라기보다는, 두 사람 다 지구전을 펼치길 선호하는 데서 비롯한 결과였다. 실제로 교전을 벌이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는 이 게릴라전이 여덟아홉 시간 동안 지속된 시점에도 여전히 기물을 잃거나 상대의 킹을 공격조차 한 쪽이 없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머피는 바로 이 점을 흐뭇하게 여겼는데, 그가 보기에 이는 자기와 엔던 씨의 동질감의 표현이요, 그런 만큼 자기의 평소 성향대로 공격을 개시하는 데 있어서도 훨씬 신중해지는 듯했다. (143쪽)

“마침내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
보이는 그는 보는 이를 보지 않고
그리하여 보는 이 자신의 모습” (190쪽)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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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J. C. C. 메이즈
작가 연보
작품 연표


지은이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89)는 1906년 4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 남쪽 폭스록에서 유복한 신교도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과 이탈리아문학을 공부하고 단테와 데카르트에 심취했던 베케트는 졸업 후 1920년대 후반 파리 고등 사범학교 영어 강사로 일하게 된다. 당시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제임스 조이스에게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에 대한 비평문을 공식적인 첫 글로 발표하고, 1930년 첫 시집 『호로스코프』를, 1931년 비평집 『프루스트』를 펴낸다. 이어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되지만 곧 그만두고, 1930년대 초 첫 장편소설 『그저 그런 여인들에 대한 꿈』(사후 출간)을 쓰고, 1934년 첫 단편집 『발길질보다 따끔함』을, 1935년 시집 『에코의 뼈들 그리고 다른 침전물들』을, 1938년 장편소설 『머피』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발판을 다진다. 1937년 파리에 정착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며 프랑스에서 전쟁을 치르고, 1946년 봄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후 198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수십 편의 시, 소설, 희곡, 비평을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갈아가며 쓰는 동시에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스스로 번역한다. 전쟁 중 집필한 장편소설 『와트』에 뒤이어 쓴 초기 소설 3부작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프랑스 미뉘 출판사에서 출간되고, 1952년 역시 미뉘에서 출간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파리, 베를린, 런던, 뉴욕 등에서 수차례 공연되고 여러 언어로 출판되며 명성을 얻게 된 베케트는 1961년 보르헤스와 공동으로 국제 출판인상을 받고, 196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희곡뿐 아니라 라디오극과 텔레비전극 및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직접 연출하기도 했던 그는 당대의 연출가, 배우, 미술가, 음악가 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평생 실험적인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1989년 12월 22일 파리에서 숨을 거뒀고,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옮긴이

이예원은 문학 번역가다. 데버라 리비의 『살림 비용』과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주나 반스의 『나이트우드』, 조애나 월시의 『호텔』, 앨리 스미스의 『겨울』과 『호텔 월드』 등을 한국어로 옮겼고, 이상우, 김숨, 천희란의 소설과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영어로 옮겼다.

표지 사진

EH(김경태)는 사진가, 그래픽 디자이너다. 중앙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스위스 로잔 예술 대학교(ECAL) 대학원에서 아트 디렉션을 공부했다. 작품집으로 『온 더 록스』, 『로잔 대성당 1505–2022』 등이 있다.


편집

김뉘연, 신선영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