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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텍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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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텍스처
Post-texture

오민 엮음 / 문석민, 백지수, 신예슬, 앤드루 유러스키, 오민, 요세피네 비크스트룀, 장피에르 카롱 지음 / 오민, 전효경 옮김 / 박수지 진행, 인터뷰 공동 기획

『포스트텍스처』는 시간을 탐구하는 예술가 오민의 새로운 개념을 다룬다. 미술과 음악과 무용의 교차점에서, 시간 기반 설치와 라이브 퍼포먼스의 접점에서 주로 음악의 구조를 빌려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을 면밀히 주시하고 치환해 온 작가는 보편적이고 위계적인 체계와 선(음악에서의 선율, ‘텍스처’)을 벗어난 오늘날의 덩어리적 감각을 ‘포스트텍스처’(post-texture)라고 명명하면서 동시대적 동시 감각을 새로운 언어로 사유하고 선언한다.
책은 오민의 글 세 편(포스트텍스처의 시작을 알리는 「폴리포니의 폴리포니」, 시간 예술과 관련된 여러 개념들을 점검하는 「시간」, 포스트텍스처를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을 주축으로 오민이 동시대 음악가 및 연구자와 ‘물리적 감각과 지적 구조와 선험적인 것’(장피에르 카롱) ‘퍼포먼스에서의 기술의 의미’(요세피네 비크스트룀) ‘시청각적 텍스처 개념’(앤드루 유러스키)에 대해 나눈 대화, 오민과 함께 음악을 여러 관점에서 탐구해 온 작곡가 문석민과 비평가 신예슬의 비선형적 음악에 관한 글, 책과 같은 방향을 공유하는 오민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일민미술관, 2022년 8월 23일~10월 2일) 학예사 백지수가 새로운 시간 지각을 조망하는 글을 오가며 포스트텍스처의 비위계를 다각도로 드러내고 거듭 증명한다.
그동안 『토마』(2021년) 『부재자, 참석자, 초청자』(2020년) 『연습곡 1번』(2018년) 『스코어 스코어』(2017년) 등의 디자인과 출판 과정을 통해 오민의 작업과 연구를 함께 기록해 온 디자이너 슬기와 민은 『포스트텍스처』(2022년)에서 여러 글이 지면을 나누어 함께 평행하게 가로지르며 다성적이면서 정보의 덩어리 상태를 이루어 가는 포스트텍스처적인 본문 디자인을 구현하는 한편, “덩어리적 음향 현상에 관해 사유할 새로운 언어로서 ‘포스트텍스처’를 상정”(129쪽)하기 시작하는 본문을 표지로 삼아 개념을 제시하는 선언문으로서 책을 위치시킨다.

덩어리라는 동시 감각

“언제부터인지 동시대 음악에서 ‘선’이 들리지 않는다.”(본문 128쪽)
포스트텍스처는 음악에서 선율을 조직하는 방식과 그 결과 발생하는 음향을 지칭하는 텍스처 이후, 도처에 이미 도래해 있다고 여겨지는 현상을 새롭게 가리키는 용어다. 하나의 선(모노포니)으로 시작한 음악은 선을 다수로 확장하며(폴리포니, 호모포니, 헤테로포니) 여러 선적 체계를 만들어 갔지만 20세기 이후 조성이 무너지고, 선이 사라졌다. 그리고 음향의 덩어리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오민은 이렇게 음악의 기본 단위처럼 여겨졌던 선 대신 나타난 비선형적 덩어리가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 분야를 비롯해 일상에서 이미 부유하고 있다고 보고, 그것을 동시대적 동시 감각으로 명명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그동안 위계 관계에 의해 주인공이 되었던 선 아래 가려져 있던 다른 것들이 드러난 결과다. 덩어리적 감각은 자연히 “비위계적 관계를 지향”(31쪽)하고, “주변적이라 생각하던 것들을 내부로 흡수”(31쪽)하며,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운동”한다. 그러면서 “선형적 감각보다 강도 높은 독해를 요구”(32쪽)한다. 덩어리적 감각으로서 포스트텍스처는 작품 외부의 위계적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작품의 내부에서 비위계를 작동시키는 구성 언어를 실험”(137쪽)하는 데 집중하면서 “시간의 수직적 또는 동시적 측면에서 감각 정보 사이의 비위계적 관계를 모색”(137쪽)하고, 관습적으로 의미를 생성하지 않는 ‘비(非)노래’의 감각을 찾아 나간다.

비(非)노래라는 형식

오민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노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소통 지향적으로 정돈된 감각 정보의 위치, 방향, 질서.”(135쪽) 그리고 ‘비(非)노래’를 이렇게 말한다. “관습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계로 연결된 감각 정보의 집합 양상 및 그 행동.”(135쪽) 음악을 통해 처음 인지된 노래와 비노래는 이제 음악을 넘어 보다 보편적인 감각 언어로 지시된다.
책 『포스트텍스처』와 같은 주제를 두고 공명하는 오민의 개인전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는 페미니스트이자 무정부주의 활동가였던 옘마 골드만의 말, “춤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를 비튼 것이다. 춤은 대의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행위라는 동료의 훈계에 춤을 부정하는 혁명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골드만의 비위계적 태도를 주목한 오민은 이 시대의 미술에서 형식이 (당시의 춤처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은지 의심한다. 그리고 내용 없는 형식이 정말로 문제인지, 내용 없는 형식이란 실은 이미 내용이 집적된 형식이 아닌지 질문한다. 그렇다면 내용과 형식은 더 이상 위계 관계 아래 있지 않다. 이는 노래의 반대 항으로서 비노래가 오늘날 예술에서 효과적인 표현 방식으로 떠오른 노래의 바깥에서 “곧바로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생소한 소리와 생소한 운동성을 탐구하며 시간 감각과 어울림을 재정의하기 위해”(136쪽) 힘쓰는 모습과 맞닿아 있다.

“춤출 수 없다면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이, 대의를 손상하는 하찮은 것을 대의 주변에서 배제하겠다는 생각에 반대하듯, 노래해야 한다면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찮은 것이든 하찮지 않은 것이든 대의에 봉사하는 대상으로 포섭하겠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이는 어떤 훌륭한 대의가 예술계를 관통하는 중이더라도 형식을 그 대의의 하위 위계에 두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어떤 노래가 대의를 효과적으로 받들기 위해 불러진다면, 그런 노래는 부르고 싶지 않다.
시간 예술에서 형식 실험은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많은 실험이 축적된 시간 동안 새로운 재료와 기술과 사유와 태도가 끊임없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이미 모종의 답을 얻었더라도, 오늘 얻은 답이 내일 역시 여전히 답이라 확신할 수 없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그 답을 찾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긴급한 문제다. 즐거움이고 또 대의다.”(134~135쪽)


발췌

덩어리 / 나는 시대마다 그 시대 특유의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학문적으로 규명되기 이전, 언어로 구체화되기 이전, 모두가 동감할 정도로 공공연해지기 이전부터, 시대의 감각은 이곳저곳에서 마치 징후처럼 나타난다. 동시대의 감각 역시 이미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두었다. 내가 그 흔적들을 제대로 추적했다면, 동시대적 감각은 덩어리적인 것이라 짐작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비위계적 관계를 지향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우리가 주변적이라 생각하던 것들을 내부로 흡수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운동한다. 그렇다고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은 아니다. 덩어리적 감각은 선형적 감각이 능숙하게 만들어 내는 환영에는 관심이 없다. 덩어리적 감각은 이야기를 생산하지 않는다. 덩어리적 감각은 선형적 감각보다 강도 높은 독해를 요구한다.(31~32쪽)

선 / 음악은 선율에서 출발했다. 선율은 지금껏 음악에서 주인공으로 행세했고 실제로 그렇게 작동했다. 때때로 한 음악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율을 흐리며 동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덩어리적 음향은, 선율이 최근까지 음악사에서 누렸던 지위와 역할을 되돌아보게 한다. 분명 다수의 소리가 함께 울렸는데 하나의 선으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소리 사이에 부여된 위계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선율보다 하위 위계에서 작동하던 다른 것들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전경화된 선율이 음악의 표면에서 주요한 임무를 수행했음은 사실이지만, 사실상 새로운 음악을 촉발해 온 수많은 계기는 오랜 시간 동안 선율 아래 가려져 있던 다른 것들이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32~33쪽)

서사 / 서사란 무엇일까? 서사가 무엇이길래, 서사 없는 작품을 감상 중인 관객들이 서사를 찾지 못해 번뇌하고, 심지어 가끔은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찾아내고야 마는 것일까?
여기서의 서사는 원인과 결과, 혹은 인물의 감정, 혹은 이야기나 메시지에 가깝다. 서사의 사전적 의미는 ‘일련의 사건에 관한 기술’로 정리할 수 있으며, 이는 이야기보다는 조금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폴 리쾨르의 관점은 조금 더 유연하다. 리쾨르에게 서사란, 세계(prefiguration)에 관한 이해를 내적 규칙에 의해 조직화(configuration)하는 탐구며, 이것은 독자에 의해 재조직화(reconfiguration)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찾아내는 관객에게도, 가사도 이야기도 없이 형식과 번호로 이름 지어지는 절대 음악의 관념적 시간 구조 역시 서사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믿는 나에게도, 큰 의심을 남기지 않을 만큼 충분히 넓은 시각이다.(…)
서사란 결국 연쇄적으로 분화되는 층위와 각 층위의 구성체들이 맺는 유기적인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나 메시지와 같이 좁은 의미의 서사는 선에 가깝지만, 수직적 층위와 수평적 흐름 안에 조직되는 정보 관계와 같이 넓은 의미의 서사는 덩어리에 가깝다.(37~38쪽)

감상 / 시간 예술의 감상은 거대한 나선형으로 진행된다. 여러 번 감상하기가 불가능한 시간 예술 작품도 있지만, 가능만 하다면 시간 예술은 다수의 감상을 통해 보다 더 완결된 구조적 청취에 도달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독해를 마치고 작품을 다시 보고 들으면 이전에 감각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들이 감지된다. 새로운 정보는 기억과 독해를 수정한다. 다수의 감상을 통해 수많은 비동시가 동시로 중첩되기를 반복하는 동안, 감상은 회전하며 전진한다.(45쪽)

창작 / 시간 예술의 창작 또한 거대한 나선형으로 진행된다. 창작의 골자가 되는 사유는 수행의 반복으로 다듬어진다. 무언가를 이전과 똑같이 반복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복은 변화를 전제하고 그런 점에서 반복과 변화는 늘 한 몸이다. 따라서 반복은 태생적으로 동질 감각과 이질 감각을 중첩한다. 반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공통과 차이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과정이다. 형태가 바뀌는 반복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동안, 창작은 회전하며 전진한다.(45쪽)

푸코의 헤테로크로니는 시간 예술이 한시적으로 구축하는 시공간을 닮았다. 동시에 미술이 사유해 온 시간과 미술 안에서 내가 실험 중인 음악적 시간 사이의 간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미술은 20세기 이후 음악, 무용, 영화, 과학 등 다양한 타 장르를 흡수했고, 이와 함께 실질적인 시간, 즉 듀레이션이 자연스럽게 미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21세기의 나는 다원예술이라는 시류를 타고 작품을 창작하고 발표할 여러 기회를 얻었다. 그때마다 음악 연주(시간과 수행)를 모국어로 하여 내가 구사하는 시간 언어와 듀레이션 개념이 오랫동안 부재했던 미술이 시간을 재료로 받아들인 이후 주로 구사해 온 시간 언어 사이에서 대립하며 공존하는 이질적 태도를 감지한다. 이러한 헤테로크로니 안에서 나는 이 두 가지 이형적 시간 언어의 차이를 탐구 중이다.(58~59쪽)

나는 장르에 상관없이 동시대 수행자가 단련해야 하는 기술이란 계획(과거), 상황(현재), 결정(미래)을 ‘인식’하거나 이에 ‘반응’하는 기술이라 생각한다. 수행자가 (몰라야 하는 것을 포함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는 동시에 지금-여기에서 다시 무엇을 할지 결정할 때 발생하는 수행성이, 내가 연구 중인 수행성에 가깝다. 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표현과는 조금 다르다. 수행자는 무언가를 보여 주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상황에 반응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미세하면서도 유일하게 발생하는 즉각 반응(kinesthetic response), 이 즉각 반응을 촉발하는 장치로서 인식의 안과 밖을 횡단하는 경로를 안무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70~71쪽)

선을 조직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조직된 결과로 발생하는 음향을, 음악에서는 ‘텍스처’라 부른다. 그 선이 하나인지, 여럿인지, 여럿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인지, 하나를 다른 여럿으로
표현하는지에 따라 각각 모노포니, 폴리포니, 호모포니, 헤테로포니로 칭한다. 하나의 선으로 시작한 음악은 다수의 선을 조직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며 선적 사고 체계를 정립했고, 그렇게 체계화된 선의 언어가 텍스처이다.
하지만 조성이 무너진 20세기 이후의 음악 실험에서 텍스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음향적 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선은 사라졌고 이미 희미해진 선의 흔적 사이를 부유하는 음향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음악에서 선 대신 덩어리가 들린다는 것은 음악이 더 이상 선이 아니라 덩어리로 사고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선으로 사고하지 않는 덩어리적 음향을 선형적 사고방식인 텍스처 개념으로 독해하는 것은 얼마큼 타당할까? 지각되는 현상과 사고의 체계가 충돌하는 현재의 곤란함을 비껴가기 위해, 나는 덩어리적 음향 현상에 관해 사유할 새로운 언어로서 ‘포스트텍스처’를 상정했다.(128~129쪽)

선의 소멸과 덩어리의 등장은 음악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닌 듯하다.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 특히 미술의 범주에서 만들어지는 영상 역시 20세기 이후 계속적으로 비선형의 기류와 맞닥뜨려 왔다. 단발적 정보를 발산하는 다양한 소셜 미디어, 혹은 링크를 타고 참조 지점으로 즉각 임의 이동하는 하이퍼텍스트, 혹은 리모컨 버튼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전환되는 텔레비전 채널, 혹은 누벨바그 영화에서 “무리수적으로 절단된” 장면들, 혹은 다다가, 초현실주의가, 절대주의 필름이 시도한 무빙 이미지 콜라주,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인지도 모르지만, 시작점이 어디든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이제 비교적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링크가 내러티브를 대체”했고, “디지털 네이티브의 관점에서 텍스트라는 형식은 점차 고루해지고” 있다. 내러티브가 선형적이라면 링크는 덩어리적이다. 언젠가 카타리나 그로세가 말했던 것처럼 텍스트가 선형적이라면 정보의 다발은 덩어리적이다.(129~130쪽)

내용 없는 형식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형식에 이미 내용이 집적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의 형식은 형과 색에 한정되지 않는다. 형식은 더 넓은 의미에서 창작에 필요한 모든 재료이자 사유이고 결과이며, 역사에 축적된 지식이기도 하다. 특정 형식이 재료로 선택되고, 그 형식이 이룬 성취가 진지하게 탐구된 후 비판적 사유에 의해 적절히 부정되는 동시에 새로운 형식 실험으로 연결될 때, 형식은 곧 내용과 동일해진다. 이런 형식 실험에서, 형식의 명분이 될 혹은 형식이 복무할 별도의 내용은 필요하지 않다.(134쪽)

그렇다면 ‘노래’란 무엇인가? 여기서 노래는 사전적 의미의 노래를 지칭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노래의 의미와도 다르다. 노래는, 소통 지향적으로 정돈된 감각 정보의 위치, 방향, 질서를 의미한다. 반면 비(非)노래는, 관습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계로 연결된 감각 정보의 집합 양상 및 그 행동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의 ‘노래’와 ‘비노래’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운동 방향을 지시하는 것으로, 음악에 한정되지 않는 보다 보편적인 감각 언어를 지시한다. 그럼에도 이 두 언어를 굳이 노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유는, 이 두 언어의 이질적 운동성을 음악을 통해 처음으로 명확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해와 소통을 지향하는 노래와 이해와 소통을 지양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비노래는, 음악 안에서 늘 갈등하고 공존해 왔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관념적으로 정량화하면서 시간을 가시화하려 했다. 즉 노래하기를 꿈꿨다. 노래는 가사, 리듬과 펄스, 어울림이라는 공통 감각을 전략으로 취한다. 동시에 음악은 새로운 기술과 사유로 인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때마다 그 구조에 근거하여 기존의 노래 관습을 뒤집으며 낯선 방식으로 말하는 언어를 촉구했다. 즉 노래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비노래는 곧바로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생소한 소리와 생소한 운동성을 탐구하며 시간 감각과 어울림을 재정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135~136쪽)


차례

오민 — 폴리포니의 폴리포니

오민 — 시간
오민·장피에르 카롱 — 구성적 해리와 선험적 미학에 관하여
오민·요세피네 비크스트룀 — 퍼포먼스 기술의 변증법
오민·앤드루 유러스키 — 시청각적 ‘텍스처’—다원적 장르를 향해
오민 — 노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문석민 — 비선형적, 비서사적 음악
신예슬 — 노래?
백지수 — 별미 빵을 만들겠다는 제빵사의 마음으로

저역자 소개


지은이, 옮긴이

문석민
작곡가. 일반적인 악기 소리부터 소음까지 감각 가능한 다양한 소리를 발굴하고 또 그 소리 재료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탐구해 왔다. 미술가, 안무가 등과의 협업을 통해 비음악적인 재료를 음악 안으로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공연으로 「물질과 시간」(2020년, 오민과 공동 기획)이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 미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등에서 디베르티멘토 앙상블, MDI 앙상블, 네오 콰르텟, 앙상블 미장, 앙상블 TIMF 등에 의해 연주되었다.

박수지
큐레이터.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RARY)를 운영하며,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이전에는 현대 미술의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 우정, 사랑, 종교, 퀴어의 실천적 성질에 관심이 많았다. 이 관심은 수행성과 정동 개념으로 이어져, 이를 전시와 비평으로 연계하고자 했다. 최근에는 예술 외부의 질문에 기대지 않는, 예술의 속성 그 자체로서의 상태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부산대학교 대학원 예술문화영상학과에서 미학을 수료했다. 독립 문화 공간 아지트 큐레이터, 미술 문화비평지 『비아트』 편집팀장, 제주비엔날레 2017 큐레토리얼팀 코디네이터, BOAN1942 큐레이터로 일했다.

백지수
학부에서 서양화를, 석사는 예술학을 전공하며 퍼포먼스 이론을 공부했다. 눈과 손과 몸을 통해 목격하고 경험한 것의 진실함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서 비롯되는 작품과 관람자의 관계나 생산과 수용 사이에서 벌어지는 특수한 현상에 관심을 둔다. 2019년부터 일민미술관 학예팀에서 『언커머셜: 한국 상업사진, 1984년 이후』, 『IMA Picks 2021』, 『Ghost Coming 2020 {X-ROOM}』 등의 전시 기획에 참여했다.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음악학을 공부했고 유럽 음악과 그 전통을 따르는 근래의 음악에 관한 호기심에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을 썼고, 종종 기획자나 편집자로 일한다.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 위원을 맡고 있다.

앤드루 유러스키(Andrew V. Uroskie)
미술사가, 미디어 문화 역사가. 스토니브룩 대학교 현대 미술과 미디어 학부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대 미술사와 비평 석/박사 프로그램, 철학과 인문학 석사 프로그램, 미디어, 예술, 문화, 기술 준석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영화, 비디오,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시간을 다루는 매체가 어떻게 미학적 생산, 전시, 관람성, 사물성의 사례를 재맥락화하는지 탐구한다. 『블랙박스와 화이트 큐브 사이: 확장 영화와 전후 시대 예술』(Between the Black Box and the White Cube: Expanded Cinema and Postwar Art)의 저자로, 근대와 동시대 미술, 영화, 시각 문화에 대한 글이 『옥토버』, 『그레이 룸』, 『오거나이즈드 사운드』를 비롯한 다수의 학술 저널과 비평집에 실렸다. 최근 출간된 『요나스 메카스: 카메라는 항상 켜져 있었다』(Jonas Mekas: The Camera Was Always Running)와 『확장하는 시네마: 동시대 미술을 통한 영화 이론화』(Expanding Cinema: Theorizing Film through Contemporary Art)는 여섯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키네틱 심상: 전후 미국 미술에서 시간성과 운동의 출현에 관한 다원적 역사』(The Kinetic Imaginary: An Interdisciplinary History of the Emergence of Temporality and Movement in Postwar American Art)를 출간할 예정이다.

오민
예술가. 시간을 둘러싼 물질과 사유의 경계 및 상호 작용을 연구한다. 주로 미술, 음악, 무용의 교차점, 그리고 시간 기반 설치와 라이브 퍼포먼스가 만나는 접점에서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고 운용하고 소비하고 또 발생시키는 방식을 주시한다. 서울대학교에서 피아노 연주와 그래픽 디자인을, 예일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의 작업은 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21년/과천, 2018·2014년), MAIIAM(치앙마이, 2021년), MCAD(마닐라, 2021년), 대전시립미술관(2021년), 토탈미술관(2021년), 수원시립미술관(2021·2016년), 독일 모르스브로이 미술관(레버쿠젠, 2020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서울, 2020·2019·2017년), 포항시립미술관(2019년), 아트선재센터(서울, 2018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8년), 네덜란드 드메이넨 미술관(시타르트, 2018년), 대구시립미술관(2017년), 아르코미술관(서울, 2017·2016년) 등에서 소개되었다. 네덜란드 국립미술원과 삼성문화재단 파리국제예술공동체에서 거주 작가로 활동했으며, 『올해의 작가상 2021』 4인(2021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2017년), 송은미술대상 우수상(2017년), 신도 작가 지원 프로그램(2016년), 두산연강예술상(2015년)을 수상하였다. 『토마』(박수지와 공동 편집), 『부재자 참석자 초청자』, 『스코어 스코어』, 『연습곡』 등을 출간했다. 현재 암스테르담, 파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요세피네 비크스트룀(Josefine Wikström)
비평가. 동시대 예술에서 퍼포먼스와 무용을 중심으로 문화 이론과 후기 칸트-마르크스 철학의 교차점에 대해 연구한다. 현재 쇠데르턴 대학교 미학과의 후원을 받아 1989년 이후 예술의 자율성의 가능성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스톡홀름의 유니아츠에서 책임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2017년 런던의 킹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스크-댄스와 이벤트-스코어에서의 관계의 실천: 퍼포먼스 비평』(Practices of Relations in Task-Dance and the Event-Score: A Critique of Performance, 2021년)을 썼고, 마이야 티모넨과 함께 『페미니즘의 사물』(Objects of Feminism, 2017년)을 공동 편집했다. 『쿤스트크리티크』와 『다겐스 뉘헤테르』의 무용 크리틱에 기고한다.

장피에르 카롱(J.-P. Caron)
철학자, 음악가. 리우데자네이루 연방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음악 레이블 ‘세미날 레코드’를 공동 운영한다.

전효경
큐레이터, 번역가. 회화와 미술사학, 전시학을 공부했고,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공동체가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감각과 생각을 공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시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2011년 작가들과 함께 서울 목동에 전시 조직 이븐더넥을 만든 후 현재까지 전시와 전시 관련 출판물을 만들고 있다. 박가희, 조은비와 함께 『스스로 조직하기』(2016년)를 번역했고, 『하루 한 번』(2018년), 김희천 개인전 『탱크』(2019년), 이미래 개인전 『캐리어즈』(2020년), 기획전 『호스트 모디드』(2021년)를 기획했다. 아트선재센터, 아르코미술관 등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영상 매거진 『오큘로』의 편집진을 맡고 있다.


편집

김뉘연

디자인

슬기와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