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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종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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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종착역
Terminus radieux

앙투안 볼로딘 / 번역 김희진

2018년 『미미한 천사들』, 2020년 『메블리도의 꿈』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프랑스 작가 앙투안 볼로딘의 장편소설 『찬란한 종착역』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김희진 옮김). 볼로딘의 작품 세계가 압축된 책 『미미한 천사들』이, 끝나지 않는 여행과 악몽이 뒤섞인 사랑 이야기 『메블리도의 꿈』이 그러했듯이 『찬란한 종착역』 역시 붕괴된 세상을 배경에 둔다. 앙투안 볼로딘은 이 작품으로 2014년 메디시스 상을 받으며 작품들의 평행 세계를 더욱 널리 알리게 됐다. 한국어판에는 옮긴이의 「용어 설명」을 더해 볼로딘이 구축해 나가는 세계의 부분을 더듬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미 무너진 세계

“프랑스 작가 앙투안 볼로딘이 쓴, 인류와 문명이 종말을 맞은 어느 먼 미래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책 말미에 수록된 「용어 설명」 도입부에서 옮긴이가 정리한 대로, 이 책은 위와 같은 한 문장으로 우선 간략히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을 좀 더 확장해 보자. 앙투안 볼로딘은 프랑스 작가이지만 러시아 문학의 영향이 역력해 보이는 소설을 쓰고, 소설 속에서 인류와 문명이 종말을 맞은 어느 먼 미래는 오늘날 전쟁과 각종 위기에 처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근미래로 읽힌다.

『찬란한 종착역』에서, 세계는 무너져 있다. 핵 사고로 인해 앞으로 1만 년은 거주 불능 상태가 된 아포칼립스. 구소련의 붕괴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재시도로 수립되었던 제2소비에트연방의 수도 오르비즈가 몰락하면서 문명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다. 이곳에서 탈출한 삼인조 탈영병 엘리 크로나우에르, 바실리사 마라시빌리, 일류셴코는 방사능의 타격을 받아 죽어 가고 있다. “미래를 단념하고 방사능에 오염된 무인 지대, 공백 구역, 적으로부터도 모든 희망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17쪽) 향했던 이들은 죽어 가는 서로를 지키겠다는 일념 아래 다시 ‘찬란한 종착역’으로 향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찬란한 종착역’은 소설 속에서 소련의 집단농장 체계이자 자치 공동체인 콜호스 중 한곳의 이름이다. ‘찬란한 종착역’은 한 인물이 지배한다. 변덕스럽고 위험한 샤먼이자 한때 작가였던 수장 솔로비예이는 주변의 존재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려 한다.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불현듯 출몰해 마구 휩쓸고 돌아다니며 자신의 말을 주입하는 이 뒤틀린 영웅의 침입과 감시 아래, 특히 그의 세 딸들이 괴로움을 겪는다. 한편 방사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몇백 년간 살아갈 수 있는 유전적 성향을 타고난 몇 명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불멸의 노파 우드굴 할머니는 솔로비예이의 전 부인이자 동지로, 그와 비극적으로 헤어졌다가 ‘찬란한 종착역’에서 재회한 사이다. 노파는 이 콜호스의 높은 곳에 위치한 핵폐기물 보관 창고에서 원자로가 깊이 파고 들어간 수직갱을 관리하며 그 속에 영원히 없애고 싶은 온갖 것들을 던져 넣는 한편 간간이 말을 건네며 암흑을 달랜다. 탈영병들을 대표해 엘리 크로나우에르가 방황 끝에 이 ‘찬란한 종착역’에 닿지만, 그의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은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시, 산문, 노래, 꿈, 목소리들

무너져 있는 세계에서, 목소리들이 맴돈다. 산 자들. 죽은 자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적인 인간들. 보이지 않는, 어쩌면 존재하지조차 않았을지도 모르는. 어긋난 자들. 이상한 자들. 미치광이들. 돌연변이들. 이 모두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솔로비예이의 힘 아래, 그의 말 아래 있다.

솔로비예이는 크로나우에르에 이어 만난 탈영병 일류셴코에게 선언하듯 말한다. “콜호스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 그건 나와 관련되어 있지. 콜호스는 내 꿈이고, 내가 원하는 만큼 오래 지속될 걸세.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한 지속될 것이고, 그 점에 대해 난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지.”(152쪽) 솔로비예이의 맏딸 한코 보굴리안과 결혼했다가 솔로비예이에 의해 쫓겨나고 그의 ‘침입’으로 아내의 기억마저 영영 잃게 된 알돌라이 슐로프는 솔로비예이가 “자신의 꿈의 비전 하나를 구체화시켜 전부터 존재하던 마을에 이식”했거나, “아니면 혹시 마을 전부가 한 조각 한 조각 그에 의해 창조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내뱉는다. “확실한 건, 그가 ‘찬란한 종착역’의 절대적 지배자였단 겁니다. 꿈의 골수까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구도 콜호스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그 안에 들어가 대신 방향을 결정하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의 운명과 싸울 수 없었지요. 그는 모두를 일종의 꼭두각시로 변신시키고, 지루함을 덜기 위해 그에게 저항하거나 그를 속이거나 귀찮게 할 수 있는 꼭두각시들도 만들었지만, 결국 모두 그의 손바닥 안이었습니다. ‘찬란한 종착역’은 사실 콜호스가 아니라, 그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하품만 하며 영원을 보내지 않기 위한 극장이었고, 마을에 사는 이들에게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더러운 꿈이었죠. 하지만 내가 그걸 깨닫기까지는 한참 걸렸습니다.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한참 후에요.”(203쪽) 엔지니어 바르구진과 결혼했던 솔로비예이의 둘째 딸 미리암 우마리크 역시 탈영병 크로나우에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찬란한 종착역’에서 우린 모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에요. 우린 모두 솔로비예이의 꿈들의 조각이죠. 우린 모두 그의 머릿속 시나 꿈의 부분적 조각이에요.”(277쪽)

부분적인 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절대 익숙해지지 못한 채 겪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끝없이 겹쳐 나간다. 시간의 파편들이 어긋나게 세워 놓은 무너진 세계에서, 누군가의 웅얼거림, 누군가의 시, 누군가의 산문, 누군가의 노래, 누군가의 꿈이었던 이야기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이며 끝없는 목소리로 맴돈다. 『찬란한 종착역』에서 말들이 이루는 세계의 모습은 자연히 작가가 써 나가는 글의 거울상과 같다. 볼로딘의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가는 다른 곳의 문학”이란 여러 종류의 ‘이상함’을 한없이 수용하고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제시하는 문학일 수 있음의 연장선에서 본다면, 죽음을 향한 공동의 행진, 방랑의 오디세이는 과연 영원히 끝날 수 없다. 제2소비에트연방 시대가 드디어 끝나고 7세기의 공백 이후 타이가의 빈터에 안착해 자급자족하며 살게 된 한코 보굴리안이 어느 날 불현듯 ‘찬란한 종착역’에서의 독서의 기억을 재구성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사라진 문학을 재생시키려는 노력을 다시금 꾀하게 되듯이. 앙투안 볼로딘의 평행 세계들이 수십 편의 작품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주되고 확장되듯이. 끝이 이미 시작된 세계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이 또 다른 끝을 기다리면서 열려 있듯이.


발췌

“어쩌면 나는 잠들어서 꿈을 꾸고 있나 봐.” 죽어 가는 여자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크로나우에르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전에도 그녀가 헛소리를 중얼대는 걸 들은 적이 있었고, 열에 들떠 나오는 듯한 그 말들로 보아 다시 그 착란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고 여겼다.
“응.” 바실리사 마라시빌리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면 잠든 건 그들이고 우리가 그들의 꿈을 보고 있든가.”
향기로운 풀 냄새가 또 한 차례 강렬하게 풍겨 왔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일류셴코가 연민을 느끼며 동조했다.
“흠.” 크로나우에르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건 그들의 꿈일지 몰라.” 바실리사 마라시빌리가 거듭 말했다.
“그럴까?” 일류셴코가 말했다.
“응. 아마 우리는 셋 다 이미 죽었고, 우리가 보는 건 그들의 꿈일지 모르지.”
그리고 그녀는 조용해졌고,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20쪽)

‘찬란한 종착역’ 콜호스는 농업 시설이라기보다 산적단 소굴에 가까웠고,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탈선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는 우드굴 할머니가 상상했던 망명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청춘의 충동들은 그 과격함, 격렬함, 젊은이들이 현실 세계를 볼 때의 만족할 줄 모르는 시선과 함께 깨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계혁명의 승리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소망 이외에도, 마음 깊은 곳에 그녀는 모험 영화 같은 운명을 살고 싶다는 어린애 같은 욕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로비예이야말로 그 결정체였다. 모든 법과의 단절, 예측 불가능함, 사랑, 금지된 것을, 다른 곳을, 미탐험된 꿈의 공간을, 마술적 현실을 향한 과격한 전환. 그는 그녀를 굽어보며 지지, 동조, 통찰력과 아나키스트적 비순응주의를 아낌없이 쏟았다. 그녀가 변절이나 고통 없이 당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도왔다. 그녀가 평온해지기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하지만 첫날부터 그는 그녀가 ‘찬란한 종착역’ 콜호스라는 마법의 건물의 부족한 한 조각, 먼 옛날 잃어버렸으며 돌아오기까지 평생을 기다렸고, 마침내 되찾아서 너무도 행복한 한 조각이라는 듯 그녀를 환영했다. (42쪽)

솔로비예이는 그녀에게 핵폐기물 관리 말고도 자신의 기록 보관소라 이름 붙인 것의 관리를 맡겼는데, 실상은 손으로 쓴 노트들이 든 궤짝 몇 개였다. 수용소에 대한 증언, 감옥에서 읽은 성명문, 당과 그 미래에 대한 비판적 연구, 서사시 노래 필사본, 흑마술 비법, 전쟁 이야기, 꿈 이야기, 이에 더해 그가 난해하고 극도로 기묘한 심란한 시들을 녹음해 놓은 왁스 실린더가 다량 있었다.
이는 전부 우드굴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안락의자 가까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고, 처리 작업이 일단락되면 그녀는 솔로비예이의 기억들을 보존하는 데 몰두했다. 때때로 어떤 글은 지독하게 반혁명적인 색채를 띠어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분개했고, 그럴 때면 갑자기 까탈스러운 볼셰비즘의 억양이 섞였다. 또 어떤 때는 다른 독기 어린 페이지에서 시적인 폭력에 휩싸임을 느꼈고, 그럴 때 그녀는 초등학교 때 받은 교육을, 그녀 안에 새겨져 이러저러한 이야기나 사상적 선택을 선호하거나 싫어하도록 좌우한 엄정한 원칙들을 잊고 말았다. 모두 잊은 채 연애소설에 푹 빠진 소녀 독자처럼 만족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솔로비예이의 산문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그녀는 깊은 애정을 느꼈고, 분류해서 정리한다는 구실로 언제고 깊이 빠져들었지만, 사실은 결코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녀는 생의 끝에 솔로비예이와 완전히 결속되어 완전한 공모자가 되길 바랐고, 그래서 그녀가 보기엔 비도덕적이고 대부분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는 털끝만치도 담기지 않은 그 저작들을 읽고, 또 읽고, 혹은 듣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45~46쪽)

그때에 그는 얼굴 앞에 숨겨 두었던 칼을 지닌 그림자였고, 칼을 지닌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고, 때로는 검고 때로는 어두운 단 하나의 그림자였으며, 잉걸불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얼굴이 음험하게 번뜩일 때면, 그는 목구멍에서 소리를 쥐어짜고 주변에 그의 신봉자들이 있다고 상상했으며, 가늘디가는 칼날에 남은 용기를 집결시켜,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거만한 낮은 음역으로, 풍부하지만 믿기 어려운 음역으로 한숨을 요란하게 울리며, 육중한 파동으로 최후의 저주를 내뱉으며, 꺼져 버린 별들보다 더 미약한 음들을 혀끝으로 웅얼대며, 또한 자신의 흩어진 딸들을 생각하며, 그를 저버린 딸들을 생각하며, 영원히 그에게서 멀어지고 사라진 잃어버린 고귀한 딸들을 생각하며, 복수하는 새로운 속삭임의 방식들을 되는대로 만들어 내며, 살해하는 단어와 살해하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속삭임들을 고안해 내며, 자신의 짧은 생과 짧은 웃음들과 죽은 자들과 딸들의 추억으로 스스로를 감싸며, 딸들이 그에게 겪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미래들을 생각하며, 남아 있는 헛된 거짓말을 칼날에 응축시켜, (54쪽)

오래된 숲은 솔로비예이에게 속한 장소다.
그곳은 솔로비예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다.
오래된 숲속을 걸을 때, 몇백 년 묵은 전나무, 검은 낙엽송, 나무에서 떨어진 잔가지들을 밟을 때, 늘어진 이끼가 얼굴을 때리거나 어루만질 때는, 중간 세계에 있는 것이고, 그곳에는 모든 것이 강렬하게 존재하며, 그 무엇도 환영이 아니지만, 동시에 어떤 장면 내부에 갇혀 있다는, 그리고 낯선 꿈속에서, 바르도에서 이동하고 있다는 불안한 감각이 들고, 그곳에서는 스스로가 낯선 존재이며, 달갑지 않은 침입자,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로 출구도 없이 끝나지 않는 꿈속에 있다.
알든 모르든, 당신은 솔로비예이가 절대적인 주인인 영역에 있다. 식물이 우거진 어둠 속에 움직이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고 생각하려 애쓰지만, 오래된 숲에서 당신은 무엇보다도 솔로비예이가 꿈으로 꾸는 존재다.
그리고 거기서, 결국 당신은 솔로비예이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74쪽)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을 기르고, 덥수룩하고, 화 잘 내는 영웅 같은 투박한 얼굴이었다. 머리칼과 수염은 아직 새카매서, 사실은 우드굴 할머니와 비슷한 나이였음에도 여전히 40~50대로 보였다. 그는 크로나우에르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컸고, 체격에서 두 남자는 비교가 안 되었다. 격투 흥행사 같은 흉곽과 어깨에, 배에는 복근이 울퉁불퉁한 콜호스의 수장은 적수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구릿빛 도는 엷은 황갈색 홍채는 흰자가 있어야 할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었는데, 보통 맹금류에게서 보이는 특성이고 마법사들에게서도 종종 보이는 눈이었다. 그 안에 빠져 죽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 않고서는 그런 시선을 마주 볼 수 없고, 눈길을 피하며 초라함과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이 솔로비예이라는 자는 깃 없는 흰 셔츠에, 가죽 허리띠로 허리를 꼭 조이고, 허리띠에는 도끼를 걸고 있었다. 바지는 두터운 캔버스로 되어 있고, 거대한 검은 가죽 장화 속으로 바짓단을 쑤셔 넣은 부분이 부풀어 있었다. 한마디로, 그는 무지크와 쿨라크가 등장하는 톨스토이의 이야기, 선사시대, 최초의 농촌 집산화보다 이전 배경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81~82쪽)

‘그’이건 ‘나’이건 상관없다. 눈[雪]이든 눈의 부재든 전적으로 동일하다. 불꽃의 터널, 타이가, 콜호스, 스텝의 풍경은 모두 똑같다. 여기든 다른 곳이든, 똑같은 꿈의 반죽이다. 뻑뻑하든 묽든 상관없다. 부동과 동요, 가까운 현재와 먼 현재도 마찬가지다. 죽음 뒤의 삶이나 꿈속에서 살아 낸 죽음, 혹은 별안간 끝나는 삶과 별안간 끝나는 죽음도 물론 똑같다. 단 하나의 동일한 화염. 그것이 빠르게 집어삼키든 아니든 상관없다. 불꽃들이 태우든 떨게 하든 상관없다. 어느 경우든 동일한 이야기의 재다. 풍경이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려면 말로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산 자들이나 죽은 자들이나 똑같이 연극의 등장인물이다. 연극이든 서툴게 연출된 꿈이든 상관없다. 살아남은 자들의 연극이든 이상한 아지프로 회합이든 상관없다. 내가 가거나 오거나, 내 구두 밑창이나 발톱이 닿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말하는 이가 입을 다물든 시끄럽게 떠들든, 관객이 존재하지 않든 존재하든 똑같다. 사악한 수수께끼를 늘어놓든 유치한 장난을 늘어놓든 듣는 건 본인뿐이다. 때때로 그는 불가능한 현재를 보다 잘 말하기 위해 석탄 가면을 쓴다. 때때로 그는 산 자들, 죽은 자들, 꿈꾸는 자들을 되살리기 위해 불타는 원자로 노심에 고함을 지른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힘을 지녔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자신의 목적들을 이루지는 못하고 가슴 아파한다. 그가 가슴 아파하든 기뻐하든 상관없다. 한동안, 오직 그의 딸들만이 중요하고, 그는 간다. 이따금 그는 불 깊은 곳에서 산 여자들, 죽은 여자들, 꿈꾸는 여자들을 되살리기 위해 노호한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그의 딸들은 헤아릴 수 없고, 그는 그들을 내면에서 찾아가고 종종 수 세기 동안 그들의 이름을 잊는다. 딸이나 아내들은 그의 몸이나 그의 가면을 만족시키기 위한 동일한 꿈의 재료다. 그의 몸이 깃털로 덮여 있든 비늘이나 인간의 피부로 덮여 있든 상관없다. 그가 악마적인 바람을 닮았든, 새나 험상궂은 무지크를 닮았든 상관없다. 불꽃들이 나를 파괴하든 구축하든 상관없다. (224~225쪽)


차례

1부 콜호스
2부 수용소 찬가
3부 아모크
4부 타이가

옮긴이의 글
작품 목록


앙투안 볼로딘 선집

『미미한 천사들』
『메블리도의 꿈』
『찬란한 종착역』


지은이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
1950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번역했으며,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40여 편에 이르는 소설을 통해 문학적 평행 우주 ‘포스트엑조티시즘’을 구현했다. 『미미한 천사들』(1999)로 베플레르 상과 리브르 앵테르 상을, 『찬란한 종착역』(2014)으로 메디시스 상을 받았다.

옮긴이

김희진
성균관대학교에서 프랑스어문학과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출판 기획 번역 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한다. 『곰』, 『초속 5000킬로미터』, 『뱀파이어의 매혹』, 『송라인』, 『고양이의 기묘한 역사』, 『바스티앙 비베스 블로그』, 『대면』, 『시간의 밤』, 『우연히, 웨스 앤더슨』, 『7월 14일』, 『쿠사마 야요이』 등을 한국어로 옮겼다.


편집

김뉘연, 신선영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