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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 다음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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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 다음은 무엇?
What Comes after Farce?

핼 포스터 지음 / 조주연 옮김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핼 포스터의 『소극 다음은 무엇?』 한국어판이 출간됐다. 오늘날 미술과 비평이 처한 험난한 상황을 직시하며 그다음을 묻는 이 책은, 저자가 “허구에서 깜빡이는 유토피아”의 불빛을 좇아 써 내려간 지난 15여 년의 산물이다.

비극 다음에 소극이 온다면, 소극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20세기 이래 미술과 비평이 주요하게 삼아 온 전략 가운데 하나는 폭로다. 현실을 은폐하거나 떠받치는 이면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폭로가 더 이상 소용없다면 어떡할 것인가. 진실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상대에게 진실을 밝혀 본들 돌아오는 것은 헛소리뿐이라면, 온갖 모순과 부조리를 일삼은 이들을 어떻게 조롱할 수 있을까. “거짓말쟁이는 거짓말을 다 알면서도 하는지라 진실과 관계를 유지하지만,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는 진실성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지라 진실을 한층 더 부식시킨다.”

“지난 15년간, 즉 2008년의 금융위기와 트럼프라는 영구적 재앙이 터져 나왔던 시기에 쓰인 이 원고들은 극도의 불평등, 기후 재난, 대중매체의 분열은 물론 전쟁, 테러, 감시도 일삼는 현 정권에 직면하여 미술과 비평과 소설에서 일어난 변화를 따져본 논평이다. 이 상황을 가늠해 보려고 나는 광범위한 작업들을 다양하게, 즉 징후적 표현, 비판적 탐색, 대안적 제안으로 고찰한다. 1부의 초점은 9.11 이후 비상사태 시기의 문화정치로, 외상, 편집증, 키치의 활용과 남용을 다룬다. 같은 시기에 시장과 미술관은 둘 다 거대하게 확장되었고 미술가들도 이 스펙터클한 변화에 비판적으로, 또 다른 식으로 대응했는데, 2부는 이 시기에 미술 제도를 개편한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되짚어 본다. 마지막으로, 3부는 최근의 미술, 영화, 소설에 반영된 매체의 변형을 개관한다. 여기서 탐색된 현상 중에는 ‘기계 시각’(machine vision, 인간의 개입 없이 기계가 다른 기계를 위해 만든 기호), ‘가동적 이미지’(operational images,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개입하는 이미지), 우리의 일상생활에 무척이나 널리 퍼져있는, 정보의 알고리듬 스크립팅이 있다.

이 모든 것은 끔찍한 소리 같은데, 사실이 그렇다. 여러 면에서 우리가 내다보는 세계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 그리고 이 극단적 상황은 미술가와 비평가 모두에게서 극단적 표명을 촉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혼란의 “비상사태” 속에서도 “디스토피아적인 절망이 아니라 유토피아의 열망”을 내비친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그다음은 소극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논리를 지나 현실의 질서와 관례, 제도를 깨부수는 결괴의 힘을 통해 소극 다음에 올 “다른 시간”을 내다본다. “아무리 소소할지라도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곳에서 말이다.


발췌

비극 뒤에는 소극이 온다는 패턴은 지금도 신통찮은 논리로서, 역사에는 아무리 진부한 것이라도 서사가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런 정합성은 어쩌면 환영이었을지도 모르니, 대체 소극 다음에는 무엇이 올 수 있단 말인가? 딱히 아무것도 없다. “우주의 도덕적 활은 정의를 향해 당겨져 있다”거나 “우리는 더 완벽한 국가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임시방편의 말로 누군가를 달래기는 더 이상 어렵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고, 모든 것이 투쟁이다. 다시 근처를 보면, 미술이 과거에 의존할 수 있는지는 이제 분명하지 않은데, 미술의 현재 또한 제도적으로 지극히 허약한 것 같다.(9쪽)

오늘날 미술 관람에 널리 퍼져있는 방식은 정동적(情動的) 방식이다. 칸트가 재개한 것이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라는 고대의 질문이었고, 뒤샹이 구성한 것은 ‘이 작품은 과연 예술인가?’라는 아방가르드의 의문이었다면, 우리의 일차적 규준은 ‘이 이미지 또는 오브제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가?’인 것 같다. 한때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미술과 비교해서 판단되는 작품의 ‘특질’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다음에는 당대의 미학적 그리고/또는 정치적 논쟁들과의 관련성에 의해 평가되었던 작품의 ‘관심사’와 ‘비판성’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제 우리는 파토스를 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객관적 시험도, 심지어는 많은 논의도 가능하지가 않다.(23쪽)

확실히, 탈진실 정치는 엄청난 문제지만, 이는 수치를 모르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당혹감을 모르는 지도자를 어떻게 흠잡을 수 있는가? 또는 부조리를 일삼는 자를 어떻게 조롱할 수 있는가? 위뷔 왕 같은 대통령의 망언을 어떻게 격파할 수 있는가? 그리고 분노를 먹고 사는 미디어 경제에 분노를 추가하는 것이 우리가 겨냥할 목표여야 하는가?(55쪽)

여기서 뒤샹이 암시하는 것은 레디메이드가 가장하는 그 모든 평등주의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이 같은 범주들이 꼭 필요한 자본주의 경제에서 마법의 묘약—천재의 숨결, 미술가의 아우라, 또는 (바버라 크루거가 표현한 대로) 신들의 향수—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또한 미술은 어느 정도 베일에 덮여있을 때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내비친다. 그런데 우연찮게 자크 라캉도 팔루스에 대해 바로 이런 말을 했다. 팔루스가 노출되면 그것은 페니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미술이 노출되면 그것은 사물에 불과하다.(86쪽)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모두 시인이라고 상상했고, 요제프 보이스는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예술가라고 믿었다. 미학적 평등주의를 신봉했던 유토피아적 시대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하고,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아마도, 모아 엮는 사람은 누구나 큐레이터라는 말일 것이다.(104쪽)

어떤 미술관이든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을 대변하는 작품들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모든 설정을 어떻게든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하나의 건물 안에서 또는 하나의 건물군 안에서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건축적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건축적 문제는 어쨌거나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것은 미술가와 비평가뿐만 아니라 관장과 큐레이터도 관련시키는 집단적 질문으로서, 이질적일뿐더러 흔히 적대적이기도 한(더욱이 의도적으로 적대적이고자 하는) 미술작품들을 전시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질문이다.(115쪽)

여기서 파로키는 하나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눈/기계」가 개관하는 세계는 인간이 세계로부터 소외된 경우만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경우까지, 강도 높은 소외의 세계다. 그것이 보여주는 환경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면서도 우리의 범위를 넘어서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브레히트식 소외 효과가 이런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극도의 소외가 일반적인 사태라면, 이를 모방해서 악화시킨다—물화된 조건들을 제 곡조에 맞추어 춤추게 한다는 마르크스의 대단하고 대담한 구식 시도—고 해서 진정한 도전의 방식으로 나오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173쪽)

오늘날 필수적인 문해력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캡차 체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슈타이얼에 따르면, 우리는 이 체제를 그것의 무정형한 토대 위에서 대해야 하고, 그 체제의 프로그램들이 스캔하고 암호를 풀고 연결하는 것처럼 보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비록 이 게임에서 우리는 이 프로그램들에 완패를 당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178쪽)

최근의 픽션은 삶과 예술이라는 과거의 이분법을 극복하려 하면서 현실 경험을 징발해 소설 쓰기를 되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픽션은 대단히 인위적인 장치를 배치하기도 하는데, 이는 탈신비화를 위해서나 실재를 교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다시 실재적으로, 말하자면 실재를 그 자체로 다시 실질적이게, 다시 느껴지게 만들기 위해서다.(227쪽)

“거짓이 진실보다 내 삶을 더 잘 묘사했다”고 화자는 『10:04』에서 말한다(또는 그런 말을 한다고 상상한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라고 배우는 「무대를 위한 이벤트」에서 (아마도 이 작품을 만든 미술가를 위해서) 토로한다. 이러한 발언들은 역설을 즐기고 스타일을 옹호하는 오스카 와일드풍의 재담이 아니라 제안들로서, 픽션에서 깜박이는 유토피아의 빛처럼 인위적 장치가 어떻게 하면 실재에 도움이 되는 지점에 위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제안이다.(234쪽)


차례

1부 테러와 위반
1 외상의 흔적
2 부시 시대의 키치
3 편집증적 양식
4 거친 것들
5 트럼프 아빠
6 공모자들

2부 금권정치와 전시
7 신이 된 물신
8 아름다운 숨결
9 인간의 파업
10 전시주의자
11 그레이 박스
12 바탕칠

3부 매체와 픽션
13 자동 피아노
14 로봇의 눈
15 박살 난 스크린
16 기계 이미지
17 모형의 세계
18 실재적 픽션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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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 소개

핼 포스터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현대미술 · 건축 · 이론을 가르치며 『옥토버』 (October)의 공동 편집자다. 저서로 『나쁜 새로운 나날』(Bad New Days), 『콤플렉스』(The Art- Architecture Complex),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al), 『강박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미술, 스펙터클, 문화정치』(Recodings: Art, Spectacle, Cultural Politics), 『디자인과 범죄』 (Design and Crime) 등이 있다. 특히 그가 로절린드 크라우스, 벤저민 부클로, 이브-알랭 부아, 데이비드 조슬릿과 함께 써낸 『1900년 이후의 미술사』(Art since 1900)는 현대미술을 응축한 기념비적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조주연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미술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대미술의 미학적 기원과 전개를 밝힌 『현대미술 강의』를 썼다. 이후 사진을 중심으로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이 연접 또는 이접하는 지점을 연구하는 한편, 최근에는 현대 조각의 미학적 독창성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비포 앤 애프터: 사진 이론의 약진과 롤랑 바르트」, 「벤야민과 바르트 사이: 수잔 손택의 사진론」 등의 논문을 썼고, 『실재의 귀환』(공역), 『60년대 미술』, 『순수예술의 발명』,『강박적 아름다움』, 『롤랑 바르트의 사진』, 『첫 번째 팝 아트 시대』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