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말들」은 워크룸 프레스의 구글 크롬 확장 프로그램입니다. 새 창을 열 때마다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실유령 도서의 인용문을 출력합니다. 내려받기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한유주

워크룸 한국 문학 ‘입장들’의 다섯 번째 책, 한유주의 중편소설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가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들어본 이야기』(미디어창비, 2020)에 수록된 「헤엄치는 밤」의 연장선에 있으며, 계간 『문학동네』 2020년 봄 호에 수록된 「눈과 호랑이와 고양이가」를 다시 쓴 것이다.

점묘

아마도 겨울, 아마도 오후 세 시쯤, 눈이 내리기로 예정된 오후. 거리를 걷고 있는 여자. 여자가 음식점 앞을 지날 때 거기서 나오던 손님. 여자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삿대질하는 노인. 여자가 들어서는 아파트의 경비원. 그가 휴대폰으로 보고 있는 시베리아 벌판의 호랑이와 카메라맨. 경비실 옆 꽃밭의 고양이들. 경비실 앞을 뒷걸음질로 지나는 사람. 여자가 아파트 4층에서 바라보는 고양이.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상가 주택 앞 남녀와 그들의 개. 아파트를 돌고 있는 가스 점검원과 택배 기사. 음악에 맞추어 운동하는 2층 남자. 뉴스를 틀어 두고 바닥에서 수영을 연습하는 4층의 아이. 초소 창틀로 뛰어올랐다가 내려가는 고양이. 고양이가 지나가는 자동차공업사의 문구, 경이로운 광택. 경이로운…

한유주의 신작 소설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에서, 지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인물들은 언뜻 서로 스치는 것같이 보인다. 그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미묘하게 겹치게 되는 듯한 삶들은 그러나 긴밀한 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과 관련된 정보는 구체적인 듯하지만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독자는 여기저기 산재한 정보들을 조합해 시간을 설정하고 장소를 그리고 인물을 세우고 관계를 구성하려 해 보지만, 정교한 지형도를 그려 보기에는 몇몇 요소들이 미세하게 뒤틀려 있다. 이를테면 트렌치코트에 중산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걷던 노인과 일생 동안 세 번 도둑을 겪었고 딸이 둘 있는 102호의 노인과 역시 딸이 있다고 적힌, 미국에 간 적이 있는 402호의 노인 재형은 분명히 다른 인물인 것인가? 택배 상자를 수령한 재형은 발신인인가, 수신인인가, 402호에 사는가, 702호에 사는가? 건물에 배달된 일곱 개의 택배 상자는 여섯 개여야 했는가? 406호는 존재하는가? 짜여진 구조와 구성에 익숙한 독자에게 종종 오류로 보일 법한 여러 겹의 내용은 소설에 틈새를 만들어 가면서 글을 열어 둔다. 지면에는 또한 ‘심연’이 흩어져 있다. 인물이나 동물은 심연을 마주하고, 건너뛰고, 추억하고, 그 속으로 사라지고, 거기에 무언가를 내던진다. 때로 심연은 그들 모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심연에 대한 해석은 여러 관점에서 내려질 수 있겠지만, 표면적으로 이 심연이라는 존재 덕분에 소설은 공식적인 구멍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동안 일고여덟 권의 단편소설집과 장편소설을 발표해 온 한유주는 작가로서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작업은 일종의 점묘법을 시도해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데뷔 이래 계속해 온 글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글쓰기의 맥락 안에서 그는 소설의 요소들을 조금씩 찍어 나간다. 점들은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는 대신 형상과 형상 사이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면서 소설이 소설을 벗어나고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그러면서 한유주의 소설들은 일종의 연작이 되어 간다.

기입되는 세계

그런데 작가가 배치해 둔 요소들의 주변에 어떤 사건이 어른거린다. 간밤에 영동고속도로 인천 방면 혹은 평택화성고속도로 안녕 방향 어느 지점에서 발생한 듯한 자동차 추돌 사고. 인물 사이를 막연하게 배회하는 듯했던 사고의 윤곽은 뒤로 걷던 ‘그’가 신체를 되찾으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뜬다. 지금 그는 택배 기사도, 경비원도, 노인들도, 여자들도, 남자도, 아이도 아니다. 그에게도 곧 특성이 생겨나겠지만, 그리운… 지금은 그를 그라고 부르자. 그는 과거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분간 과거 시제를 유지해야 한다. 그가 마침내 현재를 얻게 될 때, 그에게도 이름이 생길 것이다. 그가 눈을 뜨자 어둠이 물러났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사실 간신히 눈을 떴다. (…) 그는 감각하고, 알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가 신체를 되찾았거나, 되찾는 중이었으므로.”(24–25쪽)

‘그’는 신체를 되찾는 중이므로, 신체를 잃은 상태였을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마포구 합정동 3층의 어느 집 문 앞에 서 있고, 아직 투명한 그의 앞에 택배 상자가 놓인다. 고양이 사료가 담긴.

죽음은 삶의 도처에 있다. 이 소설은 이를 증명해 보이듯 여러 죽음의 흔적을 곳곳에 드러낸다. 그중 정황상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고양이의 사료를 챙겨 주기 위해 살아나고 있는 듯한 ‘그’는, 고양이의 밥을 주기 위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던 작가의 희망 아래 부활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적어도 글쓰기 안에서라도 해 보고 싶었다고 작가는 밝혔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누구라도 다시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에는 또 다른 죽음들이 자리해 있지만, 되살아날 이유가 없는 인물들은 굳이 살아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게 된 상태다. 그러나 ‘그’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어야 했고, 그래서 살아났다.

‘기입되다’라는 단어는 ‘수첩이나 문서 등에 적히다’라는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나’는 소설을 위해 만들어 내게 되는 ‘그(들)’과 소설을 읽게 될 ‘너’를 포함한 ‘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작가와 등장인물과 독자는 적히게 되는 글에서 만난다. 이 책은 그 세계를 증명한다.


워크룸 한국 문학 ‘입장들’

우리가 당면하게 된 이름들.

이상우, 『warp』
정영문,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정지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배수아,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한유주,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김예령,
김유림,
강보원,
,
윤해서,

이상우의 『warp』, 정영문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정지돈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배수아의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한유주의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입장들’의 첫 다섯 작품이 이제 모두 출간되었고, 작가들이 또 다른 작가를 추천했다. 이상우는 김예령을, 정영문은 김유림을, 정지돈은 강보원을, 한유주는 윤해서를 추천했고 배수아는 아직 추천하지 않았다.
‘입장들’은 이렇게 열 명의 작품을 알리고 끝난다.


발췌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곳에 심연이 있었다. 노인은 지팡이를 내리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노인이 가는 방향으로 열다섯 발짝쯤 떨어진 곳에도 심연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금속의 온기와 처벌에 대한 수긍, 순간적인 역정과 튼튼한 지팡이에 의지해 심연을 통과했다. (8–9쪽)

경비원은 조그만 휴대폰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잠복 28일째를 맞이한 카메라맨의 마음을 공유했다. 화면 속 풍경은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지나고 있었다. 푸르거나 희거나. 무성한 녹색 이파리들 사이로 해가 비쳤다. 경비원은 맑고 청명한 시베리아의 여름에 몸을 숨긴 카메라맨과 그의 긴팔 셔츠를 보았다. 온통 눈이 내린 흰 풍경 속에서는 무엇도 그림자 지지 않았다. 사방이 더 흴 수 없을 정도로 흴 때, 카메라맨은 어디에 자신의 속된 신체를 숨기는가? 카메라맨이 화면에 등장할 때, 그를 찍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10쪽)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에 장식 접시들이 걸려 있었다. 농부들과 소들. 그는 파란색 하나로 그려진 접시 그림들을 바라보며 면을 끊고 고기를 씹고 국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애매한 얼굴로 미소 짓는 서버에게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오며 한 여자를 스친 뒤 휴대폰으로 다시 한번 고수에 해당하는 베트남어를 검색했고, 다시 한번 rau mùi라는 단어들을 발견했으며, 자신이 통사를 미처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가 식당 맞은편 골목으로 통사 없이 사라지면, 우리는 그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와 대부분의 행인들 사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는 아마도 슬픔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라우 므이, 라우 므이…라고 중얼거리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의 존재는 잃어버린 장갑 한 짝들의 세계와 이웃한 심연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17–18쪽)

노인은 경비원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큰딸과 작은딸이 번갈아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걸어 왔고, 그러면 노인은 자신의 초조함과 불안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딸들은 저마다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했다. 그러니 노인과 두 딸들을 조금이라도 안심하게 해 주자. 이 건물에는 아직까지 도둑이 들었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현재 시제의 세계로 넘어가겠지만, 여기서 미리 노인과 두 딸들이 현재를 살게 해 주자. 노인은 수화기를 든 채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차분해지고, 딸들은 안도한다. (23쪽)

여자는 앞으로도 한두 번쯤 사소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고, 20여 년 후, 집을 사는 데 사용한 대출금을 운 좋게 모두 상환한 뒤에도 살아 있기를. 큐빅이 하나씩 붙은 은제 귀걸이는 잃어버린 귀걸이 한 짝들의 세계로 사라지겠지만, 그렇더라도 여자는 심연 속으로 사라지지 않기를. 페이지 밖에서 이 여자에게도 이름이 주어지기를. (36쪽)

우리가 그의 모습을 보는 건 대략 30여 분 동안이다. 그는 합정동에서 망원동까지 1.5킬로미터가량을 뒤로 걸으면서 다행히도 전봇대에 뒤통수를 박거나 소화전에 허벅지를 부딪거나 기타 위협적인 장애물들에 발을 채여 넘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으므로. 간혹 간판이나 그림자, 혹은 추위, 혹은 다른 행인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어째서 뒤로 걷고 있는지 결코 모를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경우들이 있다. (37쪽)

3층의 그는 불투명을 되찾은 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쓸어내린다.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해, 지킬 수 없더라도 지켜야 한다. 어쩌면 기만이고 위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이지 안에서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누구도 놀라지 않을 수 있는 허구 속이라면, 트럭에 받혀 가드레일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승용차 안에서 한 사람쯤은 즉사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생의 저편으로 건너가려던 두 사람이, 물리적이고 의학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사력을 다해, 말 그대로 사력을 다해 한 사람쯤 살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79–80쪽)


차례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저자

한유주 — 소설가. 『달로』,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불가능한 동화』, 『끓인 콩의 도시에서』, 『연대기』, 『숨』 등을 썼다.


편집

김뉘연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