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활동하는 시각예술가 라파엘 로젠달은 하이쿠를 즐겨 쓴다. 일본의 정형적 단시(短詩)로 잘 알려진 하이쿠는 짧고, 가볍고, 작다. 로젠달은 2013년부터 휴대전화로 이 ‘작은 시’를 썼다. 인터넷을 주요한 캔버스로 삼아 코딩의 추상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시각화해 온 그가 쓰는 최소한의 말은 일종의 코드와 같이 읽는 이의 무언가를 움직이는 계기가 되어 왔다.
『하이쿠』는 라파엘 로젠달이 써 온 287편의 영어 하이쿠 가운데 150편을 골라 한국어와 일본어로 옮긴 책이다. 책의 1부에서는 라파엘 로젠달이 쓴 영어 하이쿠(haiku), 시인이자 번역가 정새벽이 엮고 옮긴 한국어 하이쿠, 하이쿠 시인이자 작가 오노 유조가 이어 옮긴 일본어 하이쿠(俳句)가 한 지면에 드러나 있다. 일본에서 비롯된 장르인 하이쿠가 영어로 먼저 쓰인 후 한국어로는 물론 일본어로도 옮겨지게 된 일련의 과정이 흥미로운 한편, 일상의 말투를 지켜 가며 시의 리듬과 위트를 살린 번역이 돋보인다. 시가 수록된 지면에는 표지부터 본문까지 언어별로 절취선이 있어 마음에 드는 시편을 뜯어내 카드나 책갈피 등으로도 활용해 볼 수 있다. 책의 2부에는 라파엘 로젠달의 자유로운 하이쿠를 오늘날 어떻게 읽고 생각해 보면 좋을지 안내하는 옮긴이들의 글 두 편이 한국어와 영어로 실려 있다. 오노 유조의 산문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를 자유율 하이쿠의 정통 후계라고 하자」는 ‘5–7–5의 정형’과 ‘계절어[季語]’라는 정통 하이쿠의 제약을 벗어나 있는 이 시들이 선승처럼 유랑했던 일본의 옛 자유율 하이쿠 시인들을 닮은 중얼거림을 통해 “일상의 작은 어긋남”을 포착해 가고 있음을 읽어 낸다. 정새벽의 옮긴이의 말 「세 줄 안에서, 일상의 말로」는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가 선명한 이미지와 말을 넘어 침묵과 흔들림 그리고 질문을 남기는 지점을 주목하며, “가장 가까운 말이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깊은 순간을 이야기한다.
작은 시
everything
you see
is in the past
네가 보는 건
전부
과거
あなたが見る
すべては
過去のこと
(25쪽)
하이쿠라는 시의 가장 직관적인 매력은 길이가 짧다는 점에 있다. 짧은 말이 작은 말이 되어 가볍게 움직이고, 그만큼 멀리 갈 수 있어 보인다. 이러한 작음은 하이쿠라는 시가 계속 쓰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면서, 더불어 시의 효율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이쿠의 경우 특히 짧으면서 즉흥적으로 쓰인다는 점이 그 효율성을 극대화한다고도 여겨진다. 2024년 오노 유조와 나눈 인터뷰에서 라파엘 로젠달은 자신은 항상 “단순한 것”을 좋아하며, 자신에게 하이쿠는 “즉흥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의 필수 도구로 자리 잡은 휴대전화로 시를 쓰는 그에게 이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감각과 닮아 있다. 이러한 단순성과 짧음 그리고 즉흥적인 태도와 접근을, 최소한의 분량과 제약 아래 작업을 무한히 구동하는 효율적인 방식으로 읽어 보면 어떨까?
단순하게 효율적으로 움직여 가기 위해,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는 형식상 ‘세 줄’이라는 제약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하이쿠의 일반 규칙을 내려놓았던 일본의 자유율 하이쿠 시인들이 “끝까지 붙들었던 (…) 딱 하나, 짧음”(317쪽)의 급진적인 실험을 자연스럽게 이어 간다. 최소한의 시로 여겨지는 하이쿠의 기존 제약마저 최소화한 상태에서 일상 속에서 조금 달라 보이는 지점이나 다른 생각이 스치는 순간을 포착해 거기에 “21세기의 가벼움, 경쾌함, 혹은 ‘팝’함”(323쪽)을 더해 가는데, 이 지점에서 라파엘 로젠달 고유의 위트가 빛나며, 짧은 시가 촉발한 긴 여운이 그 뒤를 잇는다.
oh no
forgot to buy
avocados
아이고
아보카도
안 샀음
なんてこった
買うのを忘れたよ
アボガドを
(163쪽)
explaining art
is like
explaining jokes
예술 설명은
농담 설명이랑
비슷함
アートを説明するのは
冗談を説明するのに
似ている
(213쪽)
시가 될 수 있는 재료를 일상에서 발견하며, 그것을 최소한의 틀 안에서 즉흥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리듬이 생성되고 변주되며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이 ‘작은 시’는 자신의 몸체를 최소화하면서 이후의 생각을 위한 여백을 남겨 둔다. 간결하기에 더욱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가볍기에 계속 맴돌게 되는, 읽는 이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는 출발점으로서의 시. 작은 시는 이렇게 자신을 넘어선다. 오늘날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가 품을 수 있는 여러 잠재성을 살피며, 언어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도록 이끄는지를, 최소한의 말을 통해 언어를 넘어서려는 시가 다시금 비추게 되는 삶을 생각한다.
perhaps
everything
is perfect
아마
모든 게
완벽
たぶん
すべては
完璧
(217쪽)
발췌
in my chair
wondering if i’m
sitting too much
의자에 앉아
나 지금
너무 앉아 있나
自分の椅子にいて思う
僕はちょっと
座りすぎかなって
(107쪽)
fuck the syllables
this
is a haiku
음절 따위 엿
이거
하이쿠임
音数なんてクソくらえ
これが
俳句だ
(135쪽)
can’t sleep
tried everything
still can’t sleep
잠 안 옴
다 해 봄
그래도 안 옴
眠れない
なんでも試してみた
まだ眠れない
(143쪽)
the plural
of haiku
is haiku
하이쿠 복수형
도
하이쿠
俳句の
複数形は
俳句
(261쪽)
라파엘 로젠달은 하이쿠를 정말 많이 쓴다. 하이쿠를 깊이 사랑한다. 그리고 아마, 하이쿠가 아주 현대적인 어떤 것을 표현해 낼 수 있는 도구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하이쿠를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다룬다.
(오노 유조, 산문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를 자유율 하이쿠의 정통 후계라고 하자」, 313쪽)
시란 말로 쓰이지만, 시에는 언제나 말 너머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하이쿠는 그 욕망을 아주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하이쿠의 짧음은 거의 말의 부재에 가깝고, 때로는 말의 부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방식으로, 역설적으로, ‘말 너머의 말’을 성취한다.
(오노 유조, 산문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를 자유율 하이쿠의 정통 후계라고 하자」, 317쪽)
그래, 라파엘은 호사이와 산토카의 정통 계승자이며, 동시에 이들이 남긴 유산을 새롭게 발전시키고 개발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본다면, 전 세계 하이쿠 시인들의 지평은 어떻게 달라질까. 어떤 생각들이 가능해질까. 그 새 지평에서 어떤 하이쿠들이 태어날까.
(오노 유조, 산문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를 자유율 하이쿠의 정통 후계라고 하자」, 325쪽)
얼마나 ‘하이쿠답게’ 보이느냐보다, 얼마나 짧은 말로 오래 남는가. 얼마나 가벼운 말로 깊은 흔들림을 남기는가.
(정새벽, 옮긴이의 말 「세 줄 안에서, 일상의 말로」, 331쪽)
이런 시들을 한국어로 옮길 때 나는 가능한 한 일상의 말투를 지키고 싶었다. “–음”으로 툭 끝나는 종결, 가끔은 장난처럼 들리는 리듬, 너무 설명하지 않는 생략, 그리고 문장이라기보다 호흡에 가까운 세 줄. 하이쿠의 깊이는 고상한 어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말이 어느 순간 낯설어지는 데서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선불교와 가까운 하이쿠의 전통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큰 진리는 큰 문장으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한 사물, 짧은 체념, 우스운 깨달음, 별것 아닌 메모를 통해 슬며시 다가온다. (정새벽, 옮긴이의 말 「세 줄 안에서, 일상의 말로」, 335쪽)
좋은 하이쿠는 다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건드린다. 아주 조금 밀어 주고, 그다음은 읽는 이의 몫으로 남긴다. 로젠달의 하이쿠 역시 그렇다. 화면 위에 잠깐 떴다가 사라지는 알림처럼 가볍고, 농담처럼 건조하고, 메모처럼 무심한데, 이상하게도 그 뒤에 남는 여운은 길다. (정새벽, 옮긴이의 말 「세 줄 안에서, 일상의 말로」, 337쪽)
I
haiku
하이쿠
俳句
II
오노 유조, 산문 「라파엘 로젠달의 하이쿠를 자유율 하이쿠의 정통 후계라고 하자」
정새벽, 옮긴이의 말 「세 줄 안에서, 일상의 말로」
지은이
라파엘 로젠달(Rafaël Rozendaal)
라파엘 로젠달은 네덜란드-브라질 출신으로 뉴욕에 거주하며 활동하는 시각예술가다. 인터넷을 캔버스로 삼아 코딩의 개념적이고 미학적인 가능성을 실험하며 생동감 넘치는 디지털 풍경을 시각화해 왔으며, 회화, 설치, 하이쿠 등 다양한 매체로 활동을 확장하고 있다. 단순한 추상을 통해 지각을 강화시키는 작업으로 잘 알려진 만큼, 그에게 하이쿠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읽는 이의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
로젠달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퐁피두 센터, 휘트니 미술관,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 등에서 소개되었고, 뉴욕 현대미술관, 퐁피두 센터, 휘트니 미술관,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하이쿠 시집으로 『하이쿠』(롤로 프레스, 2016), 『하이쿠』(스피어스 프로젝트, 2018)가 있다. www.newrafael.com
옮긴이
오노 유조(小野裕三, Yuzo Ono)
오노 유조는 일본 오이타현 출신의 하이쿠 시인이자 작가다. 도쿄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왕립 예술대학교에서 미술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일본 가와사키에 거주하며, 하이쿠 시와 순수 미술,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의 관계에 깊이 관심을 두고 있다.
2002년 근대 하이쿠 협회 비평상과 2005년 근대 하이쿠 협회 신인상(가작)을 수상했고, 국제 하이쿠 협회 이사이자 영국 하이쿠 협회 회원이다. 2023년부터 2026년까지 일본 영어권 연합 웹사이트에서 매달 진행되는 영어 하이쿠 프로그램의 심사 위원을 맡았다.
하이쿠 시집으로 『멕시칸 레스토랑』(가도카와 출판사, 2006)과 『신하이쿠 21선집』(공저, 유쇼린 출판사, 2010)이 있다. yuzo-ono.com
정새벽(Jack Saebyok Jung)
정새벽은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에서 트루먼 카포티 펠로로 시를 공부했다. 『이상 선집』(웨이브 북스, 2020)의 공동 번역자로, 미국 현대 언어 학회가 수여하는 알도·잔 스카글리오네 문학 번역상을 받았다. 2024년 미국 국립 예술 기금 번역가 펠로이며 김혜순 시인의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에코, 2026)를 영어로 옮겼다. 2025년 첫 영어 시집 『호커스 포커스 보거스 로커스』(블랙 스퀘어 에디션스)를 써냈다. 현재 데이비드슨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www.jacksaebyokj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