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 시인, 퍼포먼스 예술가이자 활동가인 사야크 발렌시아의 『고어 자본주의』가 출간되었다. 부를 생산하는 도구로서 자본주의와 공모한 폭력이 어떻게 우리 삶을 위협하는 현실이 되었는지 살피고, 이것을 규정할 언어를 발명하고, 이를 넘어서는 반격을 제안하는 이 책이 말하는 바는 뚜렷하다. 우리가 당장 무언가 하지 않으면, ‘이것’이 우리에게 무언가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맨 처음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대 티후아나. 오후 6시. 몇 년 만에 고향을 찾은 사야크 발렌시아는 동생과 함께 집으로 향하던 도중 앞을 달리던 픽업트럭에서 떨어진 검은 자루와 마주친다. 도로에 튕기며 그들의 눈앞에서 찢어진 자루에서 튀어나온 것은 토막 난 몸통. 아직 머리가 붙어 있는, 짙은 색 머리카락과 커다란 눈을 가진 한 남성의 절반. 순간 닥쳐 온 쇼크와 긴장증, 실어증, 무력감. 사야크는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조수석에 앉은 여동생에게 간신히 묻는다. “저거 뭐였어?” 자신이 본 것이 제발 헛것이었기를 바라는 그 질문에, 동생은 차분히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토막 난 남자 몸통이었어, 사야크. 여기 티후아나야.” 이 책은 “여전히 어떤 밤에는 반복해서, 느린 동작으로 떨어지는” 그 몸통에 대한 저자의 응답이다.
고어의 수도 티후아나에서 보내 온 자본주의와 폭력의 공모에 대한 고발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신체를 파괴하고, 시신을 훼손하고, 내장을 전시하는, 살아 있는 ‘몸’을 대상으로 한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 그것이 어떻게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품으로 변하고, 전 세계에 유통되고, 부를 생산하는 ‘합리적인’ 선택지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첫째 목적이며,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도시 티후아나의 사례를 통해 이 현상에 접근한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로 옳고 그름을 논하는 대신, 그 폭력에 꼬리표를 달아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 넣는 대신, 현 자본주의 담론이 이 현상을 설명하기에 역부족임을 입증하고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공포 영화 장르에서 ‘고어’라는 용어를, 중세 문학에서 ‘엔드리아고’라는 용어를 빌려온다. 생생한 폭력을 묘사함으로써 육체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몸의 훼손을 극화하는 고어적 행위는 이미 스크린을 뚫고 나와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를 완전한 치사 상태에 빠뜨리는 스너프의 단계로 신속히 이행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갈리아의 아마디스』에 등장하는 인간과 히드라, 용이 섞인 괴물 엔드리아고는 이 고어적 행위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현재의 세계는 괴물들의 귀환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고 주장한 메리 루이스 프랫의 논지를 따른 선택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세계화 기획이 어떻게 노동과 자본에 대한 가치의 해체와 재구성을 가져왔는지 추적하고, 남성 우월주의적인 이성애 가부장제 아래에서 어떻게 엔드리아고라는 극단적인 주체가 탄생했는지 밝히며, 창의적이고 합리적인 기업가 정신을 장착한 이들이 어떻게 폭력을 자본을 생산하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는지 낱낱이 고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얼마 전에 한 멕시코 신문에 이런 만평이 실렸습니다. 악마가 굉장히 근심스러운 듯이 지금 국가적으로 심각한 폭력 사태에 대해서 동료와 이야기하는데요, 악마가 말합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멕시코가 콜롬비아처럼 될까 봐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지옥이 멕시코처럼 될까 봐 무서워….’”(41쪽)
2008년의 인용문이다. 2020년 멕시코에서는 3만 4515명의 살인 피해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티후아나에서만 2000명이 넘는 사망자 수가 기록됐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상황 탓인지 전년보다 줄어든 숫자다. 저자는 티후아나와 같은 국경 지대는 고어 자본주의가 좀 더 확연히 드러나는 곳일 뿐, 고어적 관행은 이미 소위 제1세계가 당면한 문제라고 말한다. 오히려 고어 자본주의에 대해 무지하고 설명할 논리도 부족한, 그동안 고어 자본주의의 최대 소비자로서 이를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겨 온 곳들이 더 취약할 수도 있다.
역자도 후기에서 밝히듯, 고어적 관행과 이를 실천하는 엔드리아고 주체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한창 이 책을 번역하고 있을 때 N번방 사건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죽은 몸, 학대당하고 훼손당한 몸이 살아 있는 몸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남성 우월주의적 폭력을 휘두르는 새로운 범죄 계급의 탄생과 거대한 성 착취 카르텔. 고어 자본주의의 세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가 책에서 밝히는 “윤리적이고 휴머니즘적인 규범과의 이러한 단절을 명확히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서 “합법 경제의 테두리 안에서, 수백만 생명을 구할 수 있을 특정 의약품을 사유화하고 상업화하는 제약 회사” 역시,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한다.
이제 더는 “그저 자신이 사는 방식은 다르니까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질문하고 저항하는 새로운 인식론적 범주로서 트랜스페미니즘
서두에서 경고하듯, 저자는 서구 세계가 제공하는 “온정적인 위계질서” 내에서 고어 자본주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주변화된 남성성에 뿌리내린 엔드리아고 주체성을 전복할 저항의 축으로서 이 주제를 복수의 페미니즘(들)과 연결한다. 엔드리아고 주체는 단순히 자본주의 시스템에 부적응한 실패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고어적 행위와 시신정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패권적 자본주의가 결합해 선사하는 좌절과 실패의 감각을 뒤바꿀 하나의 돌파구이자, 버팀목이기도 하다.
그 반대편에 트랜스페미니즘이 있다. 둘 다 세계화의 맥락 속에서 등장하고, 반체제적 투쟁의 방식으로 형성되었지만, 엔드리아고 주체성과 달리 디스토피아적이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힘에 반격할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트랜스페미니즘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한계를 넘어 생각하는 길을 열어 준다. 좁은 의미의 사회적 운동이 아닌, 질문과 저항을 위한 새로운 인식론적 범주로서 트랜스페미니즘은 퀴어 다중을 통해 우리 몸을 해방시킬 가능성을 열어 젖힌다.
발췌
몸이 파괴되는 것 자체가 생산물이자 상품으로 바뀌고, 부의 집적은 사망자의 숫자를 기입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18쪽)
고어 자본주의가 진행되는 과정은 공식 경제의 담론에서 비가시화되어 있고 자본주의 사상 체계에서 도외시된다. 주목할 만한 해석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거나 복잡한 문제로 간주되지도 않으며, 암시장의 일부로 한정하거나 자본에 대한 영향만을 따진다. 그러나 범죄 총생산이 적어도 전 세계 무역의 15퍼센트를 차지하리라 추정되는 상황에서 고어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자명하다.(20~21쪽)
고어 자본주의가 출현하고 수용되고 정상화된 이후로, 폭력 행위를 설명하는 데 있어 합법성과 불법성의 범주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무엇이 폭력을 합법적인 것으로 바꾸는가? 폭력을 행사하는 우리에게 청구될 금액은? 폭력의 독점권은 더 이상 국민 국가의 배타적 소유물이 아니다. 폭력의 독점권은 경매에 붙여졌고 가장 높은 입찰가는 조직범죄가 부르고 있다.(48쪽)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의 대표적 예로 2009년 1월 24일 티후아나 국경에서 붙잡힌 청부 살인 업자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청부업자는 티후아나 카르텔 두목의 채무자와 반대자들을 산에 용해시키는 일을 하다가 체포된 후 첫 공판에서, 자신이 시신 300구를 용해시켰고 그게 자기 일이자 평범한 직업이었다고 진술했다. 주당 600달러를 받던 일이었다. 그런데 노동의 불안정화는 제3세계 국가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권력이 모이는 중심부에도 상수처럼 존재하며 막대한 부와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51쪽)
고어 자본주의, 노골적이고 눈에 띄는 폭력 행위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스템의 이름하에 “매일 5만 명씩 당연한 듯 죽어 나가며, 거대 다국적 제약 회사가 세계적 전염병 대처에 기여하지 않아도 무방하며, 이러한 끔찍한 사회적 불평등이 허락되고 있다.”(72쪽)
우리가 도덕적으로 확고한 관점에서 엔드리아고 주체의 행동을 평가하는 것은 그들을 재단하고 단죄하는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낳을 것이며, 고어-되기(devenir gore)에 대한 대안을 세우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순전히 도덕적인 담론적 입장에서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단순화시키고 낡은 척도로 구분해 꼬리표를 붙이도록 만든다. 구체적인 일상의 현실은 윤리적 명명법 안에 가둘 수 없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변화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곤의 사회학 혹은 게토의 형이상학”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엔드리아고 주체성을 해석하는 담론을 만들려는 타자화의 유혹을 경계해야만 한다.(89쪽)
이제 살인은 하나의 거래로, 극단적인 폭력은 정당성을 얻기 위한 도구로, 고문은 고수익을 보장하며 권력을 전시하고 행사하는 수단으로 이해된다. 한때 글로벌 지하 세계로 이해되던 것이 빠르게 약진하여 이제는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고어 자본주의는 그간 우리의 삶에 침투해 왔으며, 우리가 단순한 소비자/구경꾼 역할에 머문 상태에서는 그 사실로부터 우리를 분리할 수 없다. 우리에게 일상화된 수많은 현상은 조직범죄와 유착되어 있다. 고어는 더 이상 영화 장르로 축소될 수 없으며, 찌라시나 선정적인 언론에만 등장하는 이름도 아니다. 고어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93쪽)
엔드리아고 주체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행위 축으로서,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근대성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슬로건을 박살낸다. 이제 견고하고 소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피 위에 세워진다.(95쪽)
엔드리아고는 문학 속 인물이자 괴물로 인간, 히드라, 용 사이의 잡종이다. 거대한 신장, 민첩한 움직임, 잔혹한 성격이 특징인 엔드리아고는, 갈리아의 아마디스가 맞서 싸워야만 하는 적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엔드리아고는 어떤 적수라도 두려워하고도 남을 만큼 공격과 방어에 천부적 자질을 지녔다고 묘사된다. 엔드리아고의 잔혹성이 어찌나 유명한지, 그가 살고 있는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 일종의 지상 지옥으로 소개된다. 오직 영웅심이 광기의 경계에 닿을 정도로 넘쳐나는 기사만이 들어간다는 이 섬에 대한 설명은 현대의 국경 지대와 비슷해 보인다.(96~97쪽)
우리는 티후아나에 대한 접근하려면 이 도시에 대한 세 가지 가장 흔한 클리셰와 대화하는 동시에 거기에 도전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실험실, 티후아나. 지나가는 도시, 티후아나. 악덕 도시, 티후아나. 물론 이러한 특징이 티후아나의 꽤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며 존속한다는 사실은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회피해 버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클리셰만으로는 이토록 모순적인 국경을 형성하고 있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티후아나의 중심핵인 폭력의 경제를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35쪽)
고어적 관행이 두려운 이유는, 점점 더 가까이에 다가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직면은커녕 생각하도록 훈련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사는 방식은 다르니까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론을 폭력적으로 망가뜨리고 상상과 현실 사이의 구분을 지워 버리는 한없이 불길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167쪽)
여성들, 그리고 이성애 가부장제 범주에 반하거나 하위 주체로 이해되는 모든 주체들은 역사를 통틀어 고어 안에서 살아왔다.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극단적 폭력, 그리고 근래 미디어를 통한 매개적 폭력은 우리 일상, 우리 교육의 일부였다. 마치 “악질적이고 야만적인 러시안 룰렛에 우리를 끼워 넣는 낙인”과 같은 역특권처럼, 취약성과 폭력으로 점철된 조건이야말로 여성의 명백한 운명(destino manifiesto)에 내재된 것이라고 전제하는 담론이 구축될 때, 폭력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고어 자본주의가 행사하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응답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183쪽)
남성성을 해체하고 복수의 남성성을 생성하는 움직임은 젠더 관점과 트랜스페미니즘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트랜스페미니즘은 여성의 사회적 운동뿐 아니라, 디스토피아적이지 않은 새로운 정체성(여성과 남성 모두를 포함한)을 만들어 내고 이해하기 위한 인식론적 범주를 의미한다. 새로운 주체적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전제에 매달리는 것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 (194쪽)
추천사
『고어 자본주의』의 이론적, 철학적 기여는 멕시코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예외적이거나 단편적 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근대성의 구조적 특성으로 이해하기 위한 새롭고도 긴급한 범주를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 엑토르 파라 가르시아, 멕시코 UNAM 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고어 자본주의』의 가장 훌륭한 지점은 부르주아적 연민을 자아내려는 서구화된 폭력의 묘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독자들에게 거들먹거리는 진정성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연민 말이다.
— 이반 A. 라모스, 메릴랜드 대학교 여성학자
발렌시아의 책은 자본주의적 포스트모더니티에서 폭력과 가치가 얽혀 들어가며 나타난 새로운 주체와 상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두에게 탁월한 어휘를 제공한다.
— 알렉스 피트만, 버나드 대학교 여성학자
경고
처음
서문
고어에 대한 주석: 스너프 되기
정치적 형성체로서의 국가의 붕괴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자본주의
새로운 마피아
시신정치
국경의 가장자리에 선 나의 이름은 칼날: 고어 자본주의와 페미니즘(들)
결론
맨 처음
역자 후기
참고 문헌
저역자 소개
사야크 발렌시아(Sayak Valencia)
1980년 멕시코 티후아나 출생. 트랜스페미니스트, 철학자, 시인, 퍼포먼스 예술가이자 활동가. 스페인 마드리드의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페미니즘 철학, 이론 및 비평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학제 간 페미니스트 연구 및 활동 그룹인 라 리네아(La Línea)를 공동 창립했으며, 레즈비언 여성, 트랜스젠더, 흑인 여성, 성 노동자와 이민자 여성, 이성애반대자 여성들의 투쟁인 ‘트랜스 페미니스트 반란 선언’을 주도하기도 했다. 현재 티후아나의 프론테라노르테 대학교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이슬기
고려대학교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중남미 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다.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에서 글을 썼고, 이후 여성주의 문화 운동 단체 ‘언니네트워크’의 편집팀장이자 운영진으로 활동했다. 제12회 한국 문학 번역상을 수상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영원성의 역사』(공역), 『엄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