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와 관련하여 내 관심의 지향점은 그가 펼쳐 보인 위반의 제스처도 니체적 메시지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글쓰기의 문제이며, 글쓰기를 통해 극단적인 에로티슴의 구조를 완성한 한 작가이자 인간의 집요한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사드는 에로티슴의 수식을 다루는 위대한 수사학자다.” — 롤랑 바르트
“사드의 꿈은 실제 행위보다 텍스트 작성을 통해 그 정점에 도달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안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비틀고 해체하고 파괴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다. 에로티슴은 자식을 낳지 않는다. 에로티슴은 정신의 순수한 운동이며, 세상을 가로지르면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순수한 창조적 움직임이다.” — 알랭 로브그리예
사드를 텍스트로 바라보고 사드의 글쓰기에 주목하는 ‘사드 전집’ 3권 『알린과 발쿠르 혹은 철학소설』(성귀수 옮김)은 한국어로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주인공 알린과 발쿠르 및 그들 주변의 인물들이 주고받은 편지 형식의 장편소설로, 인물들의 뒤얽힌 정념과 사연이 겹겹의 여행기 속에서 철학적 견해들과 뒤섞이며 “비장한 철학적 드라마”(해설)를 그려 간다. 책의 자료로는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가 사드의 “문학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 주는 글 「문학의 역설」과, “여행과 낯선 세계”에 대한 사드의 해석을 인류학적으로 읽어 내는 민족학자 파스칼 디비의 글 「민족학적 직관」을 수록했다. 표지 그림은 사드 전집 1권과 2권에 (월터 와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했던 카를 나브로의 작품으로, 서신 교환과 여행기가 뒤섞인 글의 특징뿐만 아니라 다른 생각을 반영해 나가는 언어 자체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서간체와 여행기
사드가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집필 이후 역시 감옥에 수감된 채 완성한 『알린과 발쿠르 혹은 철학소설』은 총 72통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친구 데테르빌이 남자 주인공 발쿠르에게 보내는 편지는 여러 사람의 서신 교환을 거쳐 발쿠르가 데테르빌에게 보내는 편지로 맺어진다. 작가는 가상의 편집자를 내세워 권두에 ‘편집자의 말’과 ‘일러두기’를 싣는 한편, 권말의 ‘편집자 주’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이후 행보를 정리해 둔다.
편지글은 대개 수신자를 특정하며, 답장이 예비된다. 나의 생각과 글에 대한 상대방의 생각과 글을 기대하게 되는 틀 아래, 작가는 인물마다의 관점과 감정을 다각도로 드러내고 때로는 숨기며 이야기를 세밀히 직조해 나간다. 여자 주인공 알린의 아버지를 위시한 복잡한 가족 관계, 알린과 발쿠르로 대표되는 연인들의 사랑을 훼방하는 적나라하고 뒤틀린 욕망과 그에 따른 조작, 그러면서 거듭되는 삶의 역경이 서서히 비극으로 향한다. 한편 지난한 역경 속에서 인물들이 직간접적으로 겪게 된 우여곡절이 편지 속 여행기로 삽입되어 펼쳐지는데, 특히 남편 생빌과 아내 레오노르의 엇갈린 여정은 적잖은 분량으로 기술되면서 소설의 구성상 중요한 두 축이 된다. 인간의 욕정에 무방비로 노출된 인물들은 예기치 않게 방랑하는 가운데 세계의 다종다양한 면모를 두루 접하게 되고, 여러 방향의 견해에 눈뜨게 되면서 철학적 인간으로 성장해 간다.
철학소설
“사드는 시대의 혼란과 광기의 중심에서 눈을 뜨고 글을 썼다.” — 성귀수
『알린과 발쿠르 혹은 철학소설』은 사드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명기하고 발표한 작품이다. 이 소설이 출간된 1795년은 프랑스대혁명 시기와 맞물린다. 조판 과정 중 (사형 제도에 반발하는 등의 이유로) 혁명 반동 세력의 혐의를 뒤집어쓴 사드는 출판업자와 함께 구속되었고, 출판업자는 처형된다. 이후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출판업자 부인의 도움을 받아 소설을 출판하기까지, 사드는 작가로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명분을 잃은 혁명의 살육극 속에서 가까스로 잠시 빛을 보았다가 몇 년 후 사드의 정신병원 강제 수용과 함께 유통이 금지되고 사드 사후에는 폐기 처분 조치에 처해진 이 책을 두고, 한국어판 번역가 성귀수는 “윤리적 문제를 떠나 사회체제와 관련한 전복적 주장과 과격한 이론을 담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주된 단죄의 원인이 아니었나 추정”하며, “격동의 시대 기류를 내면화하여 인간 본성을 가혹하리만치 파고드는 언어의 진도(震度)가 느껴진다”고 쓴다.
서로를 찾는 과정 속에서 의도치 않게 세계 곳곳을 누비게 되는 인물들은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 각자의 기준과 논리에, 또한 생존 투쟁의 한가운데에 거듭해 놓인다. 종교, 법과 처벌, 결혼 제도, 식습관 등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논하는 논쟁은 그동안 선악을 가르고 금기를 구분해 온 일반적인 편견과 습관에 질문을 던지고, 가치의 상대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끔 한다.
한편 인간의 행동 양식을 둘러싼 이러한 상대성에 천착하면서 영혼이 육체라는 물질에 종속하며 영혼을 원소들의 결합이 낳은 결과물로 여기는 18세기 기계론적 유물론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여자 주인공 알린은, 사랑과 영혼을 두고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신념을 끝까지 지켜 가며 영적인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사드는 이 영적인 존재를 철저히 희생자로 그려 내며 “사드적”인 세계를 이루어 낸다.
발췌
일부 연설이나 암시에 이르러서는 표현을 조금은 부드럽게 다듬어 볼까도 생각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허약하게 만들지 않고서 과연 부드럽게 다듬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아! 악덕이 제아무리 두드러졌다 한들 골수 추종자들 가운데서나 걱정할 일이거니와, 한껏 그 기세를 떨쳐도 미덕에는 더 이상 누가 되지 못하리니. 악덕의 색조를 완화하는 것만큼 위험한 짓은 없다. (24쪽)
안녕, 걱정하지 말아요, 나를 사랑해 주고, 내 생각 많이 해 줘요. 편지해 주세요… 당신이 내 마음을 채우는 만큼, 나 역시 당신의 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오, 다정한 이여! 이처럼, 별것 아닌 일로도 우리가 아득히 헤어져 버릴 수 있군요. 하지만 불행 가운데서 최소한 이 점만큼은 내게 위안이 되고 있어요. 신의 힘도 인간의 힘도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만들 수는 없다는 확신 말예요. (36쪽)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무언가를 배우길 원한다면, 우선 이야기가 정확해야 합니다. 한데 적당히 다듬어 넘어간다면 정확한 이야기가 될 리 없죠. (263쪽)
요컨대, 특별히 아름다운 것과 유별나게 흉한 것 모두가 오직 신체 기관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정해진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美)라는 객관적 실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런 기후, 저런 기후 속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이는 어떤 대상일 따름이다. 지상의 모든 거주민이 미에 대해 만장일치 같은 의견이 아닐진대, 같은 나라 안에서도 누구는 흉측한 것이 무척 아름답다 생각하고, 누구는 무척 아름다운 것이 흉측하다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두 취향과 체질의 문제이며, 이와 관련한 문제를 놓고 ‘법칙’이라는 현학적 발상을 고집하는 사람은 그냥 바보일 뿐이다. (264쪽)
여보게, 우리는 자연보다 습관에 더 좌우되는 존재라네. 전자는 우리를 태어나게 할 뿐이지만, 후자는 우리를 다듬어 완성하지. 세상에 도덕적 선의가 존재한다고 믿는 건 정신 나간 망상에 불과해. 그 자체로 불편부당한 인간의 행동 양식은 그걸 평가하는 지역에 따라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하네. 누구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 아니라, 현명하기까지 하다면, 운명이 점지해 준 기후의 행동 양식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272–273쪽)
우리의 어떤 부분이 죽음을 넘어 살아남는다고 상상하는 것은 일부러 앞 못 보는 소경이 되겠다는 거나 다름없네. 그건 이성과 양식에 입각한 논증 일체를 외면하는 것이고, 자연이 우리에게 베푼 모든 지식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서 물질 아닌 무언가를 색출해 내겠다는 거야. 이는 물질의 속성을 오해하는 소치일뿐더러, 그 변화의 차이가 온갖 작용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거지… 아! 숭고한 영혼이 우리가 죽고 나서도 살아남는다면, 영혼이 정녕 비물질적인 실체로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신체 기관을 따라 그것이 변질될까? 우리의 체력에 발맞춰 영혼이 성장하겠어?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의 영혼도 쇠락하겠는가 말이야! 우리 몸에 아픈 데가 없다고, 영혼이 기세등등하고 건강할까? 건강이 엉망이라 해서 영혼까지 서글프고, 의기소침하고, 침울해지겠어? 육체의 모든 변화에 이렇게까지 부응하니, 영혼이 정신에 귀속할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하다고 봐야지. 그러니 여보게,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를 존재토록 해 주는 것이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의 독특한 구성 말고 다른 것이라 어찌 생각하겠는가? 바로 그 원소들을 변조해 보게, 영혼을 변조할 수 있을 테니. 원소들을 분리하면 모든 게 허물어지는 걸세. 요컨대 영혼은 그 원소들 가운데 있는 거라고. 원소들의 결합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인 셈이지. (317쪽)
인간의 본질적인 상태란 곧 야생의 삶입니다. 숲속 호랑이와 곰처럼 태어나, 자신의 욕구를 다스려 가는 가운데 그것들을 충족시킬 수단들을 터득해 가는 것이죠. 그런 인간을 야생에서 끄집어내 문명화할 땐 그 본래의 원시 상태를, 자연이 그를 위해 빚어 준 자유의 상태를 충분히 감안해야 하는 거요. 그리하여 문명화 이전에 그가 누렸던 행복한 삶을 보다 완벽하게 다듬어 주는 문명화가 되어야만 하오. 능력을 키워 주되 강제해서는 안 되거니와, 바라는 바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월하도록 편의를 봐주어야 하오.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얼토당토않게 잡다한 법률로 제약을 가해선 안 되오. 그대가 주도하는 문명화 작업은 삶을 가능한 한 오래 확실히 즐기는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쾌락을 배가하는 데 모아져야 하오. 종교는 그것이 모시는 신처럼 너그러워야 하며, 믿음에만 의존하는 태도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신앙보다는 실천에 뿌리내린 종교여야 해요. 당신네 국민은 이런저런 사람들의 주장을 맹신할 생각부터 버려야 하오. 그래 봤자 그 사람들, 당신들보다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대신 꼭 필요한 것, 영원한 존재의 마음에 드는 일은 조물주의 손에서 날 때와 같이 영혼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태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의 행복에 필요한 미덕만을 요구하는 신이라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기꺼이 칭송할 거요. (375–376쪽)
종교에 관한 내 이론은 쉽거나 단순한 무엇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예요. 나는 젊은이들의 정신과 기억에 부담만 주는 종교의 온갖 유치한 발상들을 모조리 떨쳐 버렸어요. 종교 운운하며 횡설수설 시간을 허비하느니, 배우고 깨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여타 도덕적 문제만큼이나 종교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원칙들을 세워 봤어요. 그렇게 확립한 공고한 원칙들은 아직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물론 나도 어떤 동인(動因)의 존재를 상정합니다. 그것이 자연이든 신이든,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항상 그것의 동작 주체가 있지요. 인정합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종교의식을 통해 받들어 섬기진 않습니다. 그쪽에서 섬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할 뿐 아니라, 딱히 섬길 만한 존재인지도 극히 불확실한 마당에, 내가 무슨 명분으로 그걸 섬긴단 말입니까! 차라리 사람들이 기도하느라 빼앗기는 시간을 미덕을 실천함에 활용하는 것이 낫지요. 그 동인이 의로운 존재라면 자기 제단 앞에만 달라붙는 것보다 인간에게 이로운 일을 하는 내 모습에 더 기꺼워할 겁니다. 지상의 해악이 지금보다 덜하고, 더 적은 사기꾼과 더 많은 정직한 사람들로 세상이 굴러감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우주를 만든 존재에게 감사의 정을 표할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반면 도처에 악의가 만연하고, 인간의 온갖 패륜과 잔혹, 배반과 악행, 음모와 사악함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토록 악을 방임하는 존재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고는 너무 얌전한 한계에 스스로를 가둔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나는 그런 입장은 아닙니다. 단지 종교의 터무니없는 이론에는 실소를 금치 못하는 편이죠. 잡다한 종교의식이 우스울 따름이에요. 나는 내 머리와 가슴에만 귀 기울이므로, 종교에는 무관심으로 대응할 뿐… 설혹 비난할 일이 있어도 소용없는 짓이라 그냥 입을 다무는 편입니다. (524–525쪽)
모든 게 사라지고, 이 몸 또한 한 줌 먼지로 화할지언정, 당신을 사랑한 영혼만은 영원히 건재할 겁니다. 그 본질이 순수해서라기보다, 오로지 당신의 불꽃이 빚어낸 작품이기에 그래요. 알린의 영혼 속에 당신이 불 지펴 놓은 것, 당신의 사랑이 창조하고 살아 숨 쉬게 해 준 존재는 그렇게 영원해야 마땅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한 그녀의 영혼을 당신은 보게 될 거예요. 당신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모습을 드러낼게요. 당신의 꿈속에 나타나겠습니다. 항상 당신 가까이 떠돌아, 당신과 하나 되겠어요. 신의 손길이 광활한 별들의 운행을 유도하듯, 그렇게 당신의 영혼과 동행하겠습니다. (977쪽)
작가에 대하여
사드 전집에 대하여
해설
비장한 철학적 드라마
알린과 발쿠르 혹은 철학소설
편집자의 말
일러두기
편지 I–IV
편지 V (발쿠르의 이야기)
편지 VI–XV
편지 XVI (소피의 이야기)
편지 XVII–XXXIV
편지 XXXV (생빌과 레오노르의 이야기)
편지 XXXVI–XXXVII
편지 XXXVIII (생빌과 레오노르의 뒤이은 이야기)
편지 XXXIX–LXXII
편집자 주
자료
문학의 역설 / 알랭 로브그리예
민족학적 직관 / 파스칼 디비
저역자 소개
D. A. F. 드 사드(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 1740–1814)
유서 깊은 프로방스 지방 대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장래가 촉망받는 군인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20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불같은 기질과 극단을 탐하는 상상력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격리가 요망되는 이단아의 삶을 살게 된다. 평생 두 번의 사형선고와 15년의 감옥살이, 14년의 정신병원 수감 생활을 거치면서, 최소 열한 곳 이상의 감금 시설을 전전했다. 이는 프랑스대혁명을 통한 구체제의 충격적인 붕괴와 피비린내 나는 공포정치, 혁명전쟁 그리고 나폴레옹의 등극과 몰락에 이르는 유럽 최대의 격동기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험난한 삶을 헤쳐가며 그가 써낸 엄청난 분량의 기상천외한 글은 상당수가 압수당하거나 불태워졌고, 그나마 발표한 작품들도 명성보다는 오명으로 그의 운명을 구속했다. 사후에 혜안을 지닌 극소수 작가들이 진가를 알아보았으나,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정신 혁명을 만나기 전까지 100여 년 간 그는 이상성욕을 발광하는 일개 미치광이 작가로 줄곧 어둠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필리프 솔레르스는 이렇게 말했다. “18세기를 휩쓴 자유의 파도가 사드를 태어나게 했다. 19세기는 그를 검열하고 잊어버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20세기는 야단법석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를 드러내는 데 아주 열심이었다. 이제 21세기는 명확한 의미로 그를 고찰하는 일에 매진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문학뿐 아니라 언어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의학, 신학, 예술 등 인간을 논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담론에 등장하고 있다. 이는 그의 독보적 상상력이 펼쳐 보인 전인미답의 세계가 인간의 가장 심오하면서 치명적인 영역의 비밀들을 폭로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 모두가 사드적(sadique)이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아마, 아직까지도, 그는 사람들이 작품을 잘 읽지 않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중요한 작가일 것이다.
성귀수
음절배열자, 번역가.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시집 『정신의 무거운 실험과 무한히 가벼운 실험정신』과 ‘내면일기’ 『숭고한 노이로제』가 있고, 옮긴 책으로 아폴리네르의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 장 폴 브리겔리의 『사드—불멸의 에로티스트』, ‘스피노자의 정신’의 『세 명의 사기꾼』, 디누아르의 『침묵의 서』, 샤를 루이 바라의 『조선기행』,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꽃의 지혜』(선집 3권), 폴린 레아주의 『O 이야기』, 장 퇼레의 『자살가게』, 크리스티앙 자크의 『모차르트』(4권), 토르케마다의 『카인의 턱뼈』, 모리스 르블랑의 『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10권), 수베스트르와 알랭의 『팡토마스』 선집(5권), 앙리 코뱅의 『막시밀리앙 헬러』, 래그나 레드비어드의 『힘이 정의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진』, 장 주네의 『꽃피는 노트르담』,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 등 100여 권이 있다. D. A. F. 드 사드 사후 200주기를 맞아 2014년부터 사드 전집을 번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