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대한 집요한 의심과 정교한 질문들이 응축한 『토마』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여섯 명의 살아 있는 인물과, 한 명의 실체 없는 인물이 등장한다. 태어난 시대도, 국적도, 성별도 불분명한 자, 토마는 ‘(예술을) 의심하면서 믿는 자’로서 자신의 의심에 부응할 여섯 필자를 초대한다. 토마의 초대에 응한 여섯 필자는 각자 자신이 불려 온 자리를 살피고, 그곳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 가늠하며, 자신의 전문성과 관심사에 기반한 의심을 풀어 놓기 시작한다.
초기 퍼포먼스 비디오의 반복성을 둘러싼 해석에 의심을 던지고(조선령), 영화 매체를 중심으로 소리와 이미지가 작동시키는 지금-여기에 의심을 던지고(남수영), 현대 미술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다원적 재료의 결합에 의심을 던지고(신예슬), 예술의 재료이자 형식, 구성 등을 포괄하는 사유로서 시간에 의심을 던지고(오민), 다채널 영상의 경험적 측면과 관람의 형태에 의심을 던지고(최장현), 오늘날 지배적인 예술의 증상 혹은 징후가 예술의 추상 능력 퇴보를 가리키는 건 아닌지 의심을 던진다.(박수지)
책의 앞부분과 지면 곳곳에 실린 토마의 글과 질문들은 필자들의 의심을 다층적으로 작동시키는 기제이자 그들의 미학적 태도가 귀결할 곳을 가리킨다. 질문하는 자를 위태롭게 만들지언정 예술에 관한 더 나은 의심, 더 명확한 의심을 위한 시간을 요구하고, ‘왜’가 아닌 ‘어떻게’를 물으며 “끝까지 예술 체계가 가진 부정의 운동성을 믿고 추구”하는 이 모든 의심과 그로부터 비롯하는 비평적 토대, 즉 “모든 질문의 기저에는 하나의 간결한 의문이 자리 잡고” 있는바, 오늘날 “예술은 어떤 의심을 필요로 하는가?” 혹은 “예술은 어디에서 발생하나?
창작으로부터?
감상으로부터?
해석으로부터?”
발췌
작가와 큐레이터가 공동으로 만들어 낸 실체 없는 인물 ‘토마’(Thomas)는 이 책을 만들 수 있도록 종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태어난 시대도, 국적도, 성별도 없이, 다만 ‘(예술을) 의심하면서 믿는 자’라는 성격만 부여된 채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다음 질문을 던져 주었다. 그렇게 지난 1년간 서로에게 쏟아 냈던 질문의 8할은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질문하는 수고로움, 질문에 질문으로 화답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에게 어떤 질문이 남아 있을까? 이 많은 질문들을 어떻게 나눠야 할까?
—박수지·오민, 「시작」 중에서
예술의 체계를 만드는 것은 예술이 가진 운동성이지, 시대적 요구와 유행이 아니다.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기대가 한 가지 있다면, 예술이 성취할 수 있는 실험의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는 것이다. 이 실험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다시 번복되었던 예술의 정의를 토대로 한다. 확장된 재료, 형식, 구성에 대한 정의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지금의 ‘실험’에 대해 집요한 의심을 멈추지 않을 때, 정작 예술의 빈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토마, 「부정」 중에서
초기 퍼포먼스 비디오의 이 반복성은 때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때로는 미니멀리즘적 제스처로 해석되곤 한다. 반복은 전자에서 어떤 잃어버린 것의 실패한 반복,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이해되며, 후자에서는 자본주의 대량 생산 논리의 퍼포먼스적 번역으로 이해된다. 어느 쪽이건 반복은 결국 현대 사회의 ‘증상’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실패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구축하는 부정성의 미학을 넘어서는 방법은 없을까?
—조선령, 「만일 반복이 가능하다면…」 중에서
안녕하세요, 저는 토마의 목소리에 초대받은 자입니다.
나는 소리를 만듭니다. 나는 말을 합니다. 나는 텍스트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텍스트가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기록합니다. 나는 말을 전합니다. 나는 텍스트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텍스트가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남수영, 「토마의 ‘지금-여기’」 중에서
그 어떤 것도 도구화되지 않는 종류의 퍼포먼스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수단도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재료일까? ‘기타 등등’이라는 영역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자연스레 생겨 버린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중심 없는 퍼포먼스는 존재하는가? 정말로 주변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나? ‘퍼포먼스’는 형식인가? 혹은 태도인가?
—신예슬, 「음악 혹은 음악이 있다는 사실」 중에서
물질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은 과거-현재-미래의 방향을 거스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방향을 잘 다뤄야만 수행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다.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수행은 절단되지 않는다. 경첩에서 빠져나온 시간을 라이브로 수행할 때는 경첩과의 간극만큼을 운동으로 연결해야 한다. 때때로 수행은 시간을 압도하기도 한다. 이때 시간은 정상적인 운동보다 훨씬 더 비정상적으로 강력하게 운동에 종속된다. 나는 이것을 ‘수행적 시간’이라 부른다.
—오민, 「선형적 시간은,」 중에서
다중 채널만이 가진 관람객의 경험적 특징에 초점을 맞춰 이를 시각 예술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예술적 시도와 결합하는 접근법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제작된 일련의 새로운 작업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평적 가능성은 ‘조율’이라는 개념을 통해 수렴한다.
—최장현, 「조율의 가능성」 중에서
전적으로 예술은 이제 다시 예술 인간의 문제여야 하며, 그것을 가동시키기 위한 사유의 총체로서의 추상이 요구된다. 그러나 지금의 미술계는 재현의 파생 상품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이 파생 상품으로 이윤을 남기려면 단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추상적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포이에시스와 아이스테시스의 관계가 정해져 있다고 전제하는” 재현 체제는 그것의 추상적 특질의 수준을 전미학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눈앞의 종말을 시한부로 두고 있을 때 우리는 되는 대로 차악을 선택할 것인가?
—박수지, 「모든 손님 가운데 가장 불편한 존재」 중에서
시작 / 박수지·오민
부정 / 토마
만일 반복이 가능하다면… / 조선령
토마의 ‘지금-여기’ / 남수영
음악 혹은 음악이 있다는 사실 / 신예슬
선형적 시간은, / 오민
조율의 가능성 / 최장현
모든 손님 가운데 가장 불편한 존재 / 박수지
의심 / 토마
저자 소개
조선령
미학 연구자, 기획자. 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부교수. 정신분석학과 후기 구조주의 철학을 이론적 토대로 미학, 현대 미술, 이미지/미디어 이론을 연구한다. 『라캉과 미술』, 『이미지 장치 이론』 두 권의 책을 썼으며, 현대 미술 연구자로는 주로 비디오 아트, 사운드 아트, 퍼포먼스, 이미지 아카이브 등에 대한 논문과 에세이를 썼다. 부산시립미술관, 아트 스페이스 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일했으며, 2010년 이후 독립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기획자로는 사회적 장과 예술적 장의 생산적 만남을 주요 주제로 삼아 왔으며, 영상 작품 큐레이팅 방법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의 큐레토리얼 프로젝트로는 『무용수들』, 『알레고리, 사물들, 기억술』, 『떠도는 영상들의 연대기』, 낭독 퍼포먼스 『창백한 푸른 점』 등이 있다.
남수영
영화 이론 및 미디어 연구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교수. 서울대학교, 워싱턴 주립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고, 뉴욕 대학교에서 비교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비평 이론과 시지각의 현상학에 이론적 관심을 두고 연구해 오고 있다. 저서 『이미지 시대의 역사 기억: 다큐멘터리, 전복을 위한 반복』은 2010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17년에는 우호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최근 연구로 「몸-짓, 영화의 논리: 환영적 신체에서 ‘매체로서의 신체’ 개념으로」, 「사라진 매체: 암호, 또는 ‘가시적인 것’의 비밀」, 「영화 이미지의 인용 불가능성, 또는 어떻게 ‘콧수염’은 신화가 되었는가」, 「거짓으로서의 영화: 영화의 매체 특정성에 대한 고찰」, 그리고 『텍스트 테크놀로지 모빌리티』(공저) 등이 있다.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동시대 음악에 관한 호기심으로부터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고, 음악을 기록하고 되살리는 매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을 썼다. 2013 객석예술평론상과 2014 화음평론상을 받았고,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 위원, 음속 허구(sonic fiction) 연구 모임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민
예술가. 시간을 둘러싼 물질과 추상적 사유의 경계 및 상호 작용을 연구한다. 주로 미술, 음악, 무용의 교차점, 그리고 시간 기반 설치와 라이브 퍼포먼스가 만나는 접점에서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고 운용하고 소비하고 또 발생시키는 방식을 주시한다. 서울대학교와 예일 대학교에서 피아노 연주와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그의 작업은 국립현대미술관(서울 2021년, 과천 2018·2014년), 수원시립미술관(2021·2016년), 독일 모르스브로이 미술관(레버쿠젠 2020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서울 2020·2019·2017년), 포항시립미술관(2019년), 아트선재센터(서울 2018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18년), 네덜란드 드메이넨 미술관(시타르트 2018년), 대구시립미술관(2017년), 아르코미술관(서울 2017·2016년) 등에서 전시되었다. 네덜란드 국립미술원과 삼성문화재단 파리 국제 예술 공동체에서 거주 작가로 활동했으며,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2017년), 송은미술대상 우수상(2017년), 신도 작가 지원 프로그램(2016년), 두산연강예술상(2015년)을 수상하였다. 『부재자 참석자 초청자』, 『스코어 스코어』, 『연습곡』 등을 출간했다. 현재 암스테르담과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최장현
미술사학자, 큐레이터.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뉴욕 현대미술관과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 근무했고, 현재 『아트포럼』(Artforum), 『아트아시아퍼시픽』 (ArtAsiaPacific), 『텍스트 주어 쿤스트』(Texte zur Kunst) 등의 매체와 다수의 전시 도록에 기고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수지
독립 큐레이터.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AGENCY RARY)를 운영하며,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를 공동 운영한다. 학부는 경제학을, 석사는 미학을 전공했다. 부산의 독립 문화 공간 아지트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미술 문화 비평지 『비아트』 편집팀장, 제주비엔날레 2017 큐레토리얼팀 코디네이터, 통의동 보안여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7인의 지식인』, 『줌 백 카메라』, 『어리석다 할 것인가 사내답다 할 것인가』, 『유쾌한 뭉툭』, 『우정의 외면』 등을 기획했다. 이전에는 현대 미술의 정치적, 미학적 알레고리로서 우정, 사랑, 종교, 퀴어의 실천적 성질에 관심이 많았다. 이 관심은 수행성과 정동 개념으로 이어져, 이를 전시와 비평으로 연계하고자 했다. 최근에는 예술 외부의 질문에 기대지 않는 추상의 가능성, 예술의 속성 자체로서의 추상에 대해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