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작가의 5년 만의 신작 그래픽 노블 『착한 척은 지겨워』가 출간되었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시민운동가 ‘나’가 거침없는 언행으로 정면 돌파하는 기후 활동가 마야와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현재 기후 위기를 맞은 전 세계가 당면한 현실에 일침을 날린다.
불가능한당을 만드는 불가능한 미션
활동가로 잔뼈가 굵은 지 오래, 시민운동 판에 진절머리를 내며 매일 아침 퇴직 준비를 하는 ‘나’ 앞에 홀로 피켓 시위를 하는 아이가 나타난다. 이름은 마야. 군더더기 없이 펼치는 마야의 당(황)당한 주장에 홀린 듯 이끌린 화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와 함께 기후 정치를 하는 당을 창당하기로 결심한다. 이름하여 불가능한당. 마야의 진단에 따르면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데 현대 사회에서 가장 첫 걸림돌은 아픔(원인)과 행동(결과)을 이어주는 회로의 고장이다. 어떤 종류의 아픔이든 제대로 느껴야 그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꼬여버린 것이다. 나의 고통으로 인한 아픔(상처)과 남의 고통으로 인한 아픔(연민) 모두 마찬가지다. 전자는 팔 걷고 해결해야 하는 상처가 아닌, 누군가가 받아 주고 위로받아야 하는 상처로 변질된 지 오래이며, 후자 역시 타인에 대한 공감에서 오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을 느끼는 꽤 괜찮은 ‘나’를 보여 주고 싶은 욕망으로 뭉친 아픔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마야의 이야기에 설득된 ‘나’는 회로 고장을 일으키는 주범 가운데 하나인 ‘쓰레기가슴’ 절제 시술을 받고 본격적으로 불가능한당 창당 준비에 뛰어든다.
인류세의 악당들에게 처벌을
‘나’의 눈에 비친 마야는 준비된 리더다. “명민했고 성실했고 열정적이고 확신에 찼으며 비전이 있었고 추진력이 엄청났고 깨끗했다. 이 세상 모든 정치인들이 추구하는 덕목들이지만, 유일한 차이라면 그녀는 정말로 그랬다는 것. 단, 착하진 않았다. 좀 덜 착한 게 아니라, 완벽하게 안 착했다.” 그리고 꽤나 과격한 변화를 꿈꾼다. 자본, 소유, 상속, 직업, 관료제, 대의제, 결혼제, 미술관, 도서관, 박물관, 데이터 센터 등등… 현시대를 유지하는 모든 시스템을 포맷하고(이른바 ‘거대한 포맷’) 다시 시작하는 세상. 동물을 해방시키고 지구의 절반을 자연에게 돌려주고 탈성장-탈자본-탈인간 중심의 원리로 움직이는 세상. 인류세의 악당들에게 처벌을 가하는 마야와 쫓아가기 바쁜 나, 그리고 이를 돕는 테크니션 해커 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말도 안 돼 보이고, 그러다 세상이 망할 것 같지만 실은 착한 척하느라, 너무 거대하고 감당 안 되고 닭살 돋아서 피했던, 그러나 정말로 망한 뒤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일 것이다.
발췌
기후 정치를 하는 당을 창당할 거야.
이름은 불가능한당!(19쪽)
이제는 남의 고통도 나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게 됐어. 좋은 얘기처럼 들리지? 근데 그 뜻이 아냐. 남의 고통을 대할 때도, 그것에 아파하는 나에게 주목한다는 얘기야. 나의 연민, 연민하는 나에게. 사랑을 할 때 상대가 아니라 사랑이란 행위를 하는 나를 사랑하며 그게 사랑이라 착각하듯이.(38쪽)
손을 호호 불면서 변화를 염원하는 훈훈한 마음들로는 이 썩은 판에 흠집 하나 못 내. 우리 앞에 떨어진 문제들은 인간을 넘어선 것들. 지구 가열, 빙하 붕괴, 6대 멸종… 자기 하나 못 넘어선 사람들은 백 발짝을 나가 봤자 한 발짝도 못 나가. 반드시 원점으로 미끄러지니까.(61쪽)
진짜 이상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진짜 피상은 듣는 사람까지 힘이 빠진다.(82쪽)
모든 사람은 기계와 붙어 일한다. 물질 생산 기계와 일하거나 정보 생산 기계와 일한다. 물질 생산기계와 가까울수록 죽음에 가깝다. 그 죽음은 시스템 오류가 아니라 공정의 일부다.(87쪽)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상을 추구해 본 적이 있었나? 그런 시간이 있기는 했나? 단 몇 년도 없다. 아니 일주일도 없다. 하루도 없다. 어쩌면 평생 딱 두 시간 정도 이상주의자였겠지. 그래서 얻은 게 뭔가? 현실이다. 어차피 아무 노력 안 해도 얻었을 그 현실만 얻었다. 그럼 실망이라도 안 했나? 상처라도 덜 받았나? 아니다. 실망은 실망대로, 상처도 곱절로 받았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일찍, 가 보지도 않은 길을 금기시했던 걸까. 뭐가 두려워서?(88쪽)
내가 동물을 구출한 이유는 동물을 사랑해서가 아냐. 측은해서도 아니고, 그게 정의로워서도 아냐. 해방됐을 때 세상을 가장 좋게 만들 활동이 바로 동물들의 활동이기 때문이야. 그게 동물 해방이 급한 이유야.(113쪽)
사회가 흥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데 이 사회의 방식은 성적인 동시에 남근적이지. 빨리 흥분하고 일방적인 절정에 달하고 빨리 식어. 섹스가 아냐. 대상이 필요한 자위지. 이게 무한 반복되면 섹스란 원래 그런 거라고 믿게 되지.(145쪽)
이제 그녀의 행동 패턴을 알 것 같았다. 거침없는 논쟁적 액션으로 물의를 일으킨 후 주목을 받으면, 그 효과를 이용해 영리하게 반사 이익을 챙기는 게 아니라, 더 큰 물의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해당 커뮤니티에서 추방당할 때까지 한계를 시험하다가 쫓겨나면 곧바로 다른 동네로 옮겨가 그다음 도발을 준비한다. 동네끼리의 폐쇄성을 잘 이용한 가로지르기 전략이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트릭스터였다. 사람보다 동물에 가까운.(159쪽)
아까울 것 같지? 좀만 지나 봐, 시원할걸. 사고로 지워졌다고 생각하면 돼. 벌벌 떨지 마. 그냥 날려, 백업은 잊어버려. 뒤돌아보지 말고 눈 딱 감고 누르는 거야. 삭제!(181쪽)
당연하지 이 쓰레기들아!(222쪽)
『착한 척은 지겨워』를 워크룸 프레스 웹사이트에서 구매하시면 저자 서명본을 보내 드립니다. (한정 수량, 10월 중 순차 발송)
토끼굴
우쭈쭈의 사회학
불가능의 지도
인류세의 악당들
자위는 집에서
불(가능)한당
증발
에필로그
저자 소개
김한민
서울 출생. 『유리피데스에게』, 『혜성을 닮은 방』, 『공간의 요정』, 『카페 림보』, 『비수기의 전문가들』, 『아무튼, 비건』 등의 책을 쓰고 그렸다. 『페소아와 페소아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등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편 『페소아: 리스본에서 만난 복수의 화신』을 썼다. 현재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와 창작 집단 이동시의 일원으로 환경 운동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