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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대화로 살펴본 김영나 저, 『한국의 미술들: 개항에서 해방까지』
A Conversation with the Author: Youngna Kim, Korean Arts: From Early Modernity to Liberation

대담
김영나(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권행가(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2024년 7월 2일

작성: 권행가

그림: 이유태, 「인물일대—탐구」(부분), 1944, 종이에 채색, 212x1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권: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의 미술들: 개항에서 해방까지』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2020년 출간하신 『1945년 이후 한국현대미술』에 이어 올해는 이 책이 출간되어 한국 근현대미술사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개설서가 완성되어 여러모로 뜻깊은 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책과 함께 올해 4월에 『1945년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영문본(주 1)도 출간되어 무엇보다 보람을 느끼시는 한 해라 생각됩니다. 이 책 역시 영문본 출간이 된다면 해외에 한국 근현대미술을 알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제가 미술사에 입문한 초기부터 학자의 연구서 중 가장 늦게 쓰는 책이 개설서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인데 기존의 연구 성과가 다양하게 축적되어야 하고 그 성과들을 관통하는 저자의 일관된 시각이 확보되어야 해서 나온 말인 듯해요. 그뿐만 아니라 별처럼 많은 작가, 작품 중 무엇을 선별하여 미술사라는 성좌를 그릴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명료한 시각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실제 선생님께서 이 책을 쓰시면서 책의 제목에서부터 시대구분, 각 장별 핵심 키워드를 끌어내고 194점의 도판을 선정하는 모든 과정에 그러한 고민이 있으셨을 텐데 그 생각의 과정들과 도출된 문제들, 그리고 남겨진 과제들까지 뒷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도, 또 다른 개설서를 꿈꾸는 미래의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근대미술사 개설서를 출간하게 된 계기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김: 그동안 근대미술 연구가 많이 되어왔고 최근 3·1 운동 100주년 전시 등 근대미술에 대한 전시가 여러 형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자료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어요. 『한국의 미술들』에서 다루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은 한국 국내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알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한국의 미술이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했는지를 같이 파악해야 하는 시기이죠. 그동안의 새로운 연구들과 함께 제도의 변화와 미술 양식이 균형 있게 서술된 개설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이유로는 해외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는 분야가 흥미롭게도 근대로 가는 전환기였던 서양의 18세기 미술, 그리고 아시아 근현대미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대학에서 아시아 현대미술 또는 한국 현대미술을 과목으로 가르치는 곳이 많이 늘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참고로 할 수 있는 영문 책이 많이 부족해요. 외국인들이 쓴 한국 관련 책이 있지만 역시 기본적인 도서는 한국 국내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필요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거죠.

권: 그러면 애초에 이 책을 쓰실 때 영문 독자들을 염두에 두신 건가요?

김: 그건 아니에요. 『1945년 이후 한국현대미술』은 영문 출판을 처음부터 생각하고 썼지만, 이 책은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외국 학자들과 이 책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근대미술 책이 아주 중요하다고 모두 영문으로 내라고 격려해 주었어요. 아직 번역 중이고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지요.

권: 실질적으로 지금 외국에서는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이 주로 1945년 이후 현대미술에 집중되어 있지 않나요?

김: 그것은 미술관 전시들이 주로 현대에 집중되어서예요. 사실 미술관들은 근대미술보다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아요. 외국 대중들에게도 한국 현대미술이 훨씬 접할 기회가 많은 거죠. 그러나 대학은 보다 학구적인 곳이고 그들의 시각에서는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변화의 시기, 또는 근대의 시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한국 20세기 미술사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흥미를 끄는 부분이죠. 이 부분의 연구가 더 축적되면 미술관에서도 전시가 더 많이 있을 수 있겠지요.

권: 근대미술사 기본서의 필요성이 국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어요. 이어서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궁금한데요. ‘한국의 미술들: 개항에서 해방까지’라는 제목에서 ‘미술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셨어요. ‘미술들’이라는 표현이 문법적으로는 비문에 해당하는데요.

김: 문법적으로 틀리긴 한데 달리 생각하면 영어에서는 art도 있고 arts도 있기는 하지요. 워크룸 프레스와 의논하는 과정에서 여러 장르를 다루고 있는 내 책의 의도에도 맞아서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보통 미술사가 회화, 조각을 위주로 다루는데 개항 이후의 시기는 회화, 조각이 주도하지는 않았어요. 미술 인구도 많지 않았고요. 특히 건축의 경우는 중요한 미술의 한 분야인데도 기존 연구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죠. 당시 사람들에게 높이 솟은 명동성당이 얼마나 놀라웠겠어요? 이런 물리적 변화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력한 것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사진도 대중들에게는 매우 신기한 문물이었고 삽화나 포스터, 표지화 등도 그런 역할을 했죠. 반면 회화나 조각은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와서야 본격적인 활동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미술들’이라고 해서 회화, 조각뿐 아니라 건축, 공예, 디자인, 제도, 전시 등 좀 더 민주적인 배치를 하려고 했지요.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근대는 전통 시대와 비교해 현격히 장르 간의 경계가 불확실해진 시대라는 점이죠. 전통미술에서는 실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불상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서화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시스템이 아니었죠. 반면에 20세기에 들어오면 도쿄미술학교 유학생들이 장르 간 경계 없이 같이 공부하고 교류했죠. 또 새롭게 변모한 도시 건축물에 둘러싸인 거리를 거닐고 그 안에서 문학가들과 화가들이 같이 토론하고, 이상(李箱)과 같은 시인은 그림을 그리고, 화가들이 문학잡지 삽화를 그리는 그런 시대였어요. 근대는 그렇게 장르의 경계 없이 상호 교류하는 새로운 시대였죠. 그래서 따로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미술들’이라는 제목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권: 그렇다면 근대의 시각문화 전체를 포괄하시는 것인데 시각문화라는 표현을 제목에 넣는 것은 생각해 보시지 않으셨나요?

김: 이 시기를 시각문화라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각문화라고까지 부를 만큼 우리를 사로잡는 대중적 시각문화가 발달했던 단계는 아니었죠.

권: ‘미술들’이라는 제목이 장르 간에 상호 교류하던 시대의 다양한 양상들을 최대한 포괄하는 용어로 택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제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흔히 한국 근현대미술사 개설서에서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근대’나 ‘현대’와 같은 시대구분 용어를 사용하시지 않은 점입니다. 『20세기의 한국미술』(1998) 같은 선생님의 이전의 책들에서도 이처럼 근대, 현대라는 용어를 제목에 넣지 않으셨어요. ‘근대’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김: ‘새로운’, 또는 ‘앞서가는’을 의미하는 modern이라는 개념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근대와 현대가 시기적 구분으로 자리 잡았는데 나는 그렇게 근대와 현대를 분리해서 쓰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일본의 경우 근대 시기가 길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하나의 시기로 보기에는 짧아요. 예를 들어 김환기나 이응노 같은 작가들을 근대와 현대 어느 시기로 분류해야 하나요? 이 작가들은 근대와 현대를 이어갔던 작가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언제까지가 근대인지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계에서는 근대와 현대라 부르는 시기 간에 그만한 단절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로 연결되는 시기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던 아트’가 언제부터인지에 대해서는 외국에서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뉴욕의 MOMA는 컬렉션의 시작이 후기인상주의부터 지금까지를 포함하고, 샌프란시스코 MOMA는 마티스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를 다루고 있어요. 언제부터를 ‘모던’으로 볼 것이냐는 이렇게 각기 다를 수 있지만 분리하지는 않고 있죠. ‘Contemporary’라는 이름을 가진 미술관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대의 모든 미술을 포괄하겠다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20세기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물론 제 책에도 근대성과 모더니즘이라는 개념과 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시기 구분 용어로는 근대와 현대를 분리할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시기로 보아야 하는 거죠.

권: 실제 일제강점기부터 영어의 modern이 근대와 현대로 혼용되어 번역되면서 많은 혼선을 일으켜 왔죠. 이미 1920년대 초부터 김찬영은 ‘모던 아트’를 현대미술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일본 유학기에 배운 거죠. 이후에 근대와 현대는 혼용되다가 그것이 명확한 시대 개념으로 구분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작가들이 그들의 시대와 과거 앞세대를 구분하고자 하면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구열선생님과의 구술에서 1950년대 이후 왜 근대와 구분되는 현대미술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많이 사용되었냐고 여쭤본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쓰는 용어가 들어왔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당시에도 충분히 검토된 용어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김: 내가 1945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미술들, 개항에서 해방까지』와 『1945년 이후의 한국현대미술』 2권의 책으로 낸 것은 해방 이후 정치체제나 제도, 교육 등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인데 그것이 곧 미술에서의 단절을 의미한 것은 아니에요.

권: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책의 방향성과 구성에 대해 몇 가지 여쭐게요. 우선 이 책은 구성이 개항부터 1945년까지 약 60–70여 년 동안의 역사를 ‘근대미술의 서막’, ‘서화에서 미술로’, ‘근대성과 모더니즘 미술의 탐구’,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회색지대’라는 제목하에 총 4개의 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기존의 근대미술사 서술이 연도별 또는 10년 단위로 나뉘어 연대기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책은 시대별 기술과 주제적 접근이 입체적으로 교차하도록 구성된 점이 특징적으로 보여요. 이런 구성은 분리될 수 없는 동시대적 현상을 기계적으로 잘라 순차적 시간개념으로 보게 되는 것이 갖는 오류를 보완하고 보다 입체적이고 유연하게 역사를 볼 수 있게 하지 않나 생각되는데요.

김: 각각의 방법에 장단점이 있다고 봐요. 이번 책은 기본적으로는 주제별 구성이 중심을 이루면서 시기별 이해도 가능하게 써 보았어요. 요즘은 미술사 강의도 주제를 앞세우는 식으로 하죠. 연대순 서술 방식은 모더니즘적 사고로 앞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변해간다는 가정 아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인데 지금은 그런 진보 발전적 사관을 부정하는 것이 역사 서술의 경향이죠.

그런데 『1945년 이후 한국현대미술』을 쓸 때는 미술운동과 작가가 너무 많고 다양해서 특정 주제별로 구성하면 배제되는 작가들이 많아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의 전반은 연대별 서술을 했으나 1990년대 이후 미술을 다룬 장에서는 주제별로 구성을 했는데 이 장에서 중요하지만 누락되는 작가들이 있었어요. 반면에 근대기는 제도나 환경의 영향이 워낙 강하게 작용했고 상대적으로 화가들의 수도 적어 주제별 구성이 어렵지 않았던 거예요.

권: 비슷한 맥락인데 또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즘’별로 서술하는 것이 근대의 경우 가능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이즘별로 서술하는 것 자체가 모더니즘의 흐름을 따라서 서술하는 방식이긴 한데 한국현대미술의 경우 어느 정도는 스타일별로 집단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에 엥포르멜, 단색화, 민중미술식의 분류가 가능하다면 근대기의 경우 한 작가의 작업에서도 다양한 이즘들이 혼재하여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접근방식과 구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이즘별 분류는 작가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죠. 옛날에 지인에게 야수주의에 관해 설명해 주었더니 그 내용을 마티스 작품 전체에 적용을 시키더라고요. 그런데 마티스에게 야수주의 양식은 1905년 이후 3년 지속했고 그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는데 후기 작품도 야수주의 경향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이즘이라는 것은 한정된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즘을 내세우면 그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못 보게 되죠.

권: 지금까지 책의 구성 방식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결국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는 책의 궁극적인 방향성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책의 서문에서 근대를 혼성의 시기로 보시고 미술가들이 어떻게 표현하고 활동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미술사가로서의 도전이자 과제라고 하셨어요. 서문에 간략히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근대기를 혼성의 시기로 보시는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김: 한국의 근대기는 전통과 근대, 집단과 개인,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등뿐 아니라 가장 크게는 한국, 일본, 서양의 문화 사이의 혼성의 시기이자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때문에 이 시기를 알려면 한국뿐 아니라 일본, 서양의 당시 상황도 같이 봐야죠.

권: 그런데 책의 1장 근대의 서막을 보면 실질적으로 서구의 건축, 미술 개념과 제도 등이 어떻게 도입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단순히 서구문화의 수용 또는 영향의 관점과 혼성이라는 관점이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집니다.

김: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다 보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수용한 것은 물론 아니지요. 서화협회에서 미술이라는 이름보다 서화라는 이름을 붙였다든가, 공예에서도 전통공예의 형태나 문양 등을 계승하려고 했다거나 강화성당에서 사찰 형식에 신랑과 측랑의 구분이 확실한 바실리카 형태를 사용했다든지 하는 예는 혼성의 예죠. ‘혼성’이라는 용어는 최근 미술사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어요. ‘글로벌 현상’이라는 지구가 좁아지기 시작한 것이 사실은 19세기 후반부터로, 산업혁명 이후 서구의 물질문화가 발달하고 제국주의로 확장되면서 다른 문화로 밀고 들어오면서예요. 예를 들어 인상주의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시아나 중남미의 여러 미술관을 다녀보면서 느낀 점은 대부분 인상주의를 거치면서 현대미술이 시작됐다는 것이죠. 인상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요. 아마 그래서 예전에 『World Impressionism』인가 하는, 제목이 확실하지는 않은데, 책이 나오기도 했어요.(주 2) 새로운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미술가라면 당연한 일이에요. 당연히 지역적인 특성과 섞이면서 혼성이 일어나는 거지요.

또 하나의 예는 예전에는 이슬람 문화와 서구문화를 다른 문화로 보았지만, 요즈음은 서로 간의 교류에 관해서도 연구가 많이 되고 있어요. 일본도 처음엔 서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다가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같은 사람이 나오면서 저항이 생기고 하죠. 결국 당시 서구문화 수용은 전 세계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던 현상이기 때문에 단순히 자생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어느 시대나 문화는 서로 교류, 영향을 받으면서 수용하거나, 변형시키거나 배척하면서 변화하는 거지요.

권: 그러니까 일단 서구문화의 수용이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그것이 자생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그 안에서 서구, 일본, 한국의 갈등, 저항, 소화의 양상을 보신다는 말씀이네요. 책의 3장 근대성과 모더니즘, 4장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회색지대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도 그 방향성 내에서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각 장의 구성에 대해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데요. 1장에서 1880년대를 근대의 서막으로 설정하셨어요. 서양식 건축양식의 도입에서 시작하여 미술교육 제도, 전시, 사진 같은 시각 매체, 미술 개념의 도입 등을 기준으로 1880년대를 서막으로 보고 계신 데 이것은 앞에서 ‘서양 문화의 도입과 그 안에서의 혼성 양상’으로 근대 시작을 서술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2장 ‘서화에서 미술로’에서는 한일 병합 이후 특히 1920년대 이후 미술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다루고 계신 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장에서 재조선 일본인 미술가들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된 것이 주목되었어요. 물론 재조선 일본인 미술가들에 관한 연구가 개별적으로 진행되어온 것은 사실인데 이처럼 한 국가의 미술 개설서에 포함되는 것은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어서요. 재조선 일본인 미술가들, 또는 조선물산공진회 미술관 즉 후일의 조선총독부박물관 천장화(1915) 같은 일본인 작가들의 작품들을 포함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김: 재조선 일본인에 대해서는 처음 미국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후 귀국해서 한국근대미술에 관심을 가질 때부터 그들이 한국에 와서 했던 활동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당시에는 연구된 논문이 없었어요. 제가 김인승이나 여러 작가와 인터뷰했는데 그 작가들이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같은 일본인 교사들에게 배우고 서로 교류도 많았다고들 증언했어요. 일본 미술교사와 한국인 학생들과의 관계들은 당시 한국미술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합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박물관 천장화 같은 경우는 문화적인 식민정책을 아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넣었죠. 그런데 그 벽화들이 우리나라에 미쳤던 파급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되어 있지 않아요.

권: 이상범이나 김규진 등 초기 서화가들이 창덕궁 부벽화(1920) 같은 새로운 형식의 벽화를 그린 것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 벽화를 본 경험도 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 1930년대 후반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했던 일본 근대미술 상설전들도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는 아직 연구가 안 되어있어요. 동경 유학생들이 많이들 가서 봤을 거예요.

권: 기본적으로 한국어와 일본어 이중언어적 환경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미술계 상황에서 작가들이 경험했을 여러 새로운 자극들이 지녔던 의미나 반응들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네요. 이어서 3장은 모던 경성, 모던 보이, 모던 걸을 키워드로 시각문화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근대성의 경험을 드러내고 모더니즘 미술의 본격적인 전개를 다루고 계십니다. 이 장에서 핵심어로 사용하고 계시는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개념이 어떤 면에서 서구와 다른 것인지, 그 지역적 특성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하셨는지요? 어떻게 보면 가장 선생님께서 역점을 두신 부분이 이 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 모더니즘 미술과 모더니티는 다른 개념이죠. 책에서도 썼지만 모더니티는 근대사회에서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하는, 보다 사회적 개념이라면 모더니즘 미술은 그 도시적 삶의 유동성과 개인의 자유를 동반하는 모더니스트들이 탄생시킨 미술을 말하죠. 과학기술의 발전을 근거로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과거의 아카데미즘과 결별하면서 인간의 경험을 독자적인 감각과 심미적인 표현으로 추구하기 시작하여 미술의 자율성, 예술가의 무제한의 자유를 주장하게 되죠. 모더니티는 이렇게 서구에서 먼저 나타난 현상이지만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는데 지역마다 시차를 달리하며 다르게 전개되죠. 이 장의 주제는 경성이라는 도시공간 속에서 일본을 통해 도입된 서구적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미술의 한국적 전개를 다루는 것이었어요.

권: 김인승은 늘 보수적 아카데미즘으로 분류되어 모더니즘과 대비됐는데 이 책에서는 첼로 연주자라든가 도시 남녀의 일상 같은 도시적 감수성을 예로 들어 모더니티로 읽고 계셔서 주제적 접근이 기존의 양식사적 분류를 흐트러뜨리는 예로 읽혀요.

김: 우리가 아는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것이 주로 추상이라든지 미술 자체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모더니즘 미술의 시작은 사실 마네나 인상주의부터잖아요. 인상주의가 변화하는 도시의 근대성을 담았기 때문이죠. 모더니즘 미술의 전환점은 인상주의가 그 근대성을 표현했지만, 그들의 인본주의 자체를 배척하면서 추상으로 간 시점이었어요. 그 과정에서 미술가 각각에 따라 모더니즘 미술을 적극 수용하거나 소극적으로 수용하거나 하는 것은 작가에 따라 다릅니다. 김인승과 같이 아카데믹한 양식을 사용하면서도 근대성에 매혹된 화가는 본격적인 모더니즘 미술가는 아니지만 모더니티를 논할 때 중요한 화가입니다. 말하자면 인상파 화가 중의 카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와 같다고 할까요.

권: 선생님께서는 이 장에서 그런 모더니즘 미술이 1920년대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보셨는데 그렇다면 한국근대미술은 서양화의 경우 김찬영이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오는 도입기부터 모더니즘 미술이 시작된 것이라는 의미인지요?

김: 신문 잡지에 모더니즘에 관한 언급이 1920년대부터 나오죠. 알려진 김찬영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작 「님프의 죽음」(1917) 도판은 내가 동경에 있을 때 발견해서 김병기 선생에게 드렸던 것이에요. 그 작품은 내용성이 많이 들어간 세기말 상징주의에 더 가까워서 모더니즘 미술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권: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해 문학계와 미술계에서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논의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지만 작가의 작품으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라는 말씀이네요. 마지막으로 자유미술가협회전과 추상미술의 수용 양상에 관해 서술하시면서 1940년대 이후에 추상회화가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결국 모더니즘 미술은 아직 본격적으로 받아들일 단계가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셨거든요.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 전쟁 때문에 단절되면서 결국 1950년대로 연결되죠. 사실 1940년대의 뛰어난 작품들이 이쾌대 작품이잖아요. 이쾌대는 모더니즘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전통에 더 관심을 가졌던 화가이지요.

권: 그러면 이제 조금 넘어갈게요. 근대미술사를 강의하다 보면 학생들에게 왜 근대미술사 책에는 작품 설명보다 단체, 조직, 시대 배경에 대한 설명이 많냐는 말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실제 작품 자체에 관한 연구나 서술이 아직도 부정확한 경우가 많아서 작품이 시대를 설명하는 수단으로만 제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조직, 단체가 아니라 작가와 작품 중심으로 전체 서술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라 생각됩니다. 마치 작가나 작품을 먼저 선정하시고 그것들을 축으로 전체 이야기를 써 내려가신 듯이 쉽게 읽히는데요 실제 선생님의 서술 방식은 어떤지요?

아울러 작품 선정에 있어 선생님의 기준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한 작가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대표성을 띠는 작품으로 어떤 작품을 선정하는지는 필자의 역사관뿐 아니라 미적 기준과도 관련됩니다. 예를 들어 오지호의 초기 작품 「풍경」, 배운성의 「자화상」 등 일반적으로 잘 인용되지 않는 작품들이 여럿 보입니다.

김: 작품이나 작가의 리스트를 먼저 잡지는 않지만, 그동안 연구를 해오면서 생각해 둔 대략의 윤곽과 중요도가 있었죠. 미술사를 배울 때 항상 우리는 작품을 중심에 두고 하잖아요. 작품을 모르면 우리가 미술사를 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미술 작품이 다른 일반 물건과 다른 어떤 특별한 미적, 조형적, 역사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가 작품을 미술사에서 다루는 거죠. 그러니까 미술사에 입문할 때 하는 훈련이 작품 분석이죠.

권: 예를 들어서 근대기에는 비평 활동은 자주 했지만, 작품이 거의 없는 작가들 또는 좋은 작품이 없는 작가들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작가가 작품으로 얘기를 해야죠. 글만 있다면 미술 평론가 같은 사람이죠. 이 책에서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남다른 미적 감각이나 실험정신 같은 것이 보이는 작품을 많이 선정하려고 했어요.

권: 미적 감각이라 하면?

김: 예를 들어서 이 책에 실은 도상봉의 「도자기와 여인」(1933)을 보면 도상봉의 일반적으로 알려진 작품들보다 좋았어요. 도상봉은 미술사적으로는 김인승을 이어가는 아카데미즘 계보에 있는 작가지만 좌우 대칭이라든지 기물의 섬세한 배치 등에서 균형 감각이 돋보이고 색조도 독자적인 감각이 보입니다. 작품을 선정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좋아하고 말고가 아니라 이렇게 화단의 흐름에 대한 대표성을 띤다거나 작품 그 자체로서의 독자적인 미적 감각이 보여서 분석의 여지가 있는 작품이어야 하죠. 그런데 미적 감각에 대해 받는 느낌은 주관적일 수도 있어요.

권: 윤효중의 「사과를 든 모녀상」 같은 경우는 어떤가요?

김: 이 작품은 내가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을 할 때 행정 직원이 자연과학대학에 이 작품이 방치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땔감을 할까 한다고 하길래 누구 작품이냐고 하니까 윤효중 작품이라고 해요. 그래서 깜짝 놀라서 당장 가지고 오라고 해서 봤더니 상태가 형편이 없었어요. 그래서 자연과학대학에서 공식적으로 기증을 받아서 보수 처리를 해서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이죠. 근대기 조각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역사적으로도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고 두 인물을 연결시킨 구성도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그 후에 이런저런 전시회에서 그 작품을 볼 때마다 당시의 생각을 합니다.

권: 저는 이 책을 받아 보고 오지호의 초기 작품 「풍경」(1927)을 넣으신 것이 매우 눈에 들어왔어요.

김: 오지호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쓰면서 오지호라는 화가를 재평가하게 되었어요. 오지호의 「풍경」을 보면 화면 전경에 나무들을 쭉 배치해서 풍경 너머를 보지 못하게 그렸어요. 원근감을 배척했다는 것인데 원근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에요. 보통 인상주의라면 빛을 이야기하지만, 오지호는 마네 이후 원근법이 점차 없어지면서 화면 표면의 물감에 집중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남향집」에서는 다양한 색채가 화면 전체에 퍼져서 소위 화면을 삼차원의 공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이차원적인 화면 표면에 발라진 물감을 먼저 느끼게 하죠. 색채와 이차원적인 표면에 대해 이처럼 이해한 화가는 많지 않아요. 작품을 선정할 때 나는 그 작가의 초기 작품에 관심이 많아요. 초기 작품이 그 작가가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를 잘 설명해 주죠.

권: 배운성의 작품도 흔히 인용되는 「모자를 쓴 자화상」(1930년대) 대신 베를린민족학박물관 소장의 「자화상」(1930년대)을 넣으셨어요.

김: 「모자를 쓴 자화상」은 좀 삽화적인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이 작품은 회화적 구성을 보이면서 한국, 일본, 유럽 사이에서 겪었던 작가의 정체성 갈등 같은 것이 많이 보이는 작품이죠. 프랑스에서는 일본인 단체의 후원도 받았지요.

권: 또 백남순의 「낙원」(1936년경)도 도상적인 연구는 아직 제대로 안 되어 있는데 에밀 오통 프리에즈(Emil Othon Friesz, 1879–1949)의 작품과 연결하신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김: 오통 프리에즈는 내 박사 논문의 일부로 많이 다루었던 작가예요. 조르주 브라크와 친구여서 둘 다 초기에는 강렬한 원색 류의 포비즘 양식으로 그렸어요. 그러다가 많은 포비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가도 큐비즘으로 가는 과도기에 세잔의 「수욕도」 영향을 받아요. 당시에는 자연 속에 누드를 그리는 것이 대유행했는데 이 작가의 작품에도 그런 것들이 나오죠.

권: 백남순이 오통 프리에즈의 제자여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시는 건가요?

김: 화가들은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당하는 것을 싫어하지요. 그러나 백남순은 당시 배우는 젊은 화가였고 당연히 프리에즈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자연과 화음을 이루는 ‘황금시대’(Golden Age) 주제는 당시에 많이 유행했어요. 마티스의 해변에서의 누드를 그린 「생의 기쁨」(1906) 같은 작품들을 비롯해서. 그런데 백남순은 그것을 굉장히 한국적으로 만든 거죠. 병풍 형식에 동서양 도상을 섞는 이런 시도가 의미가 있죠.

권: 『한국의 미술들』은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큰 판형에 시원시원하게 배치되어 한국 근대미술사가 한눈에 쉽게 들어오는 효과를 가집니다. 작품 이외에 사용된 자료 도판들도 상당히 많아서 근대기 시각문화 전반에 걸친 변화와 추이를 마치 전시 도록처럼 보게 됩니다.

김: 시카고박람회와 파리박람회 한국관 사진은 박람회 논문을 쓰면서 처음 발굴한 자료들이죠. 시카고박람회 관련 자료가 가장 많은 곳은 시카고 히스토리컬 소사이어티(Chicago Historical Society)라는 도서관이 있어요. 그 외에도 시카고의 여러 도서관을 다니면서 마이크로필름으로 한국대표단이 초청한 저녁 식사 메뉴까지 자료를 봤는데 정작 한국관 전시 장면 사진 자료가 안 나오는 거예요. 시카고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열람실 벽 책장에 책이 쭉 꽂혀 있길래 하나하나 뒤지는데 거기서 한국관 사진이 나왔죠. 그래서 100불을 내고 도서관에서 찍어준 사진을 가지고 왔죠.

권: 박람회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을 때 이 연구가 많은 참고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김: 그 후에 콜롬비아 대학의 에이버리 라이브러리(Avery Architectural and Fine Art Library)에서 건축 부문을 뒤지다가 파리박람회 한국관 자료도 찾게 되었죠.

권: 덕분에 박람회 사진 자료는 지금은 거의 보편화된 듯해요. 그 외에 새롭게 보이는 자료로 「조선 보물 고적 명승 기념보전위원회 총회」 사진이 눈에 들어와요.

김: 이 사진은 우리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사진이에요.

권: 그러면 김재원 박사님과 관련성이 있는 사진인가요?

김: 직접적인 관련은 없죠. 아버지가 박물관 관장을 하실 때 어떻게 가지고 계셨던 자료인 것으로 보여요.

권: 제가 찾아보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자료에 이 사진이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사진은 사진 위에 총회 참석자 명단이 수기로 다 쓰여 있어요. 한국인으로 최남선, 오세창 등이 보이고 동경미술학교 교장을 비롯한 나머지는 당시 보전위원회에 참여했던 일본인들이어서 1930년대 후반에 조선 명승고적 보물을 지정하는 과정에 참여한 한일 연구진들과 관료들 등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듯합니다.

김: 글씨는 일본인 글씨로 보여 아마 아버지가 일본인 학자에게 확인해 받은 것 같습니다.

권: 자유미술가협회전 관련 자료들도 지금은 기초 자료로 많이 쓰이고 있는데 선생님 책에 보면 당시에 무라이 마사나리를 만났던 이야기가 각주에 짧게 나와요. 그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요. 지금은 이분이 돌아가셔서 가도 만나기는 어려워서요.

김: 자유미술가협회전 논문 쓸 때 1990년 7월에 도쿄에 가서 1년간 자료 조사를 하면서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1905–1999) 등 여러 일본 화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었죠. 무라이 마사나리는 키가 크고 매우 점잖은 사람이었어요. 자기가 살던 시나가와구의 ‘포플러의 집’이라는 아파트에 김환기도 살았다고 하면서 김환기가 고향이 그리워서 바다를 보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어요. 내가 김환기 초기 작품을 몇 개 보여주면서 무라이 마사나리 작품과의 관계를 물었는데 그냥 웃더라고.

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쓰시면서 가장 어려우셨던 점이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김: 어려운 점이 많죠. 작품의 제목, 제작연도가 제각각 다른 것이 아직도 너무 많고 작가의 생몰 연대도 달라서 기본적으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기준으로 했어요. 작품의 경우 위작 문제가 가장 조심스러운데 많이 알려져 있지만 문제가 있는 작품은 제외했어요. 저작권을 해결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1945년 이후 한국현대미술』 영문판은 200건 도판 모두 허가를 받고 오리지널 이미지를 받아서 실었는데 내가 직접 하기 어려워 조수를 두었어요.

권: 저작권 제도가 점차 정착되고 있지만, 아직도 분명한 기준이 없어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저작권자들도 있고 연락처도 없는 저작권자들을 일일이 연구자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니 미술사 책을 내는 일이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은퇴 후에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이처럼 큰 과제를 마무리하셨으니 참 후련하실 듯합니다.

지금까지 책의 구성에서 방향, 작품의 선정 기준, 세부 자료 관련 에피소드 등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들으면서 용어부터 작품 해석, 자료 발굴에 이르기까지 근대미술에 관한 선생님 연구의 흔적들이 곳곳에 녹아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후학으로서 앞으로 무엇이 더 연구되어야 하는지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Youngna Kim, Korean Art since 1945: Challenges and Changes (Leiden: Brill, 2024).

2. Norma Broude ed., World Impressionism: The International Movement, 1860-1920 (New York: Harry N. Abrams, 1990).

참고

  • 출처: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47집(2024년 상반기): 413–430, DOI: https://doi.org/10.46834/jkmcah.2024.7.47.413.
김영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뮬렌버그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덕성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도쿄대학과 하버드 대학교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서양미술사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교육연구회,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서울대학교박물관 관장을 역임하는 한편,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을 이끌며 연구, 전시, 교육 분야에서 박물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저서로 『조형과 시대정신』, 『서양현대미술의 기원』, 『20세기의 한국미술』,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 『Twentieth Century Korean Art』,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Korea: Tradition, Modernity and Identity』, 『韓國近代美術の100年』, 『한국의 미술들』 등이 있다.

권행가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미술과 시각문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학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 『이미지와 권력: 고종의 초상과 이미지의 정치학』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1930년대 고서화전람회와 경성의 미술시장」, 「컬렉션·시장·취향: 이왕가미술관 일본근대미술컬렉션 재고」, 「자유미술가협회와 전위사진: 유영국의 경주사진을 중심으로」, 「북한 수예와 여성미술」, 「근대 남성의 몸 만들기와 미술해부학적 지식: 이쾌대의 「미술해부학 노트」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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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ary
김영나, 『한국의 미술들』, 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