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류이치
토니 타키타니 OST
커먼스
2007년
영화 「토니 타키타니」(Tony Takitani)에는 여백이 많다. 화면에 보이는 공간들은 대부분 비어 있다. 실내 공간에는 벽이 없거나 통창이 벽을 대신하고 있고, 야외에는 얕은 심도로 흐릿해진 풍경이 피사체 너머로 길게 펼쳐진다. 영화 내내 카메라는 천천히 우측으로 이동하면서 장면들을 보여 준다. 시간이 흐르듯, 공간이 흐른다. 공간은 교실이 되었다가, 거실이 되었다가, 욕실이 되었다가, 사무실이 되었다가, 침실이 된다. 흘러가는 공간 속에서 주인공 토니는 거의 언제나 혼자인 채로 작업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작곡한 영화 음악은 「토니 타키타니」의 공백과 고독을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사운드트랙은 크게 두 개의 테마로 나누어지는데, 그중 하나인 「DNA」는 앨범의 첫 번째 트랙이자 영화의 오프닝을 알리는 곡이다. 비어 있는 오선지 위에 물방울처럼 음표들이 떨어져 내린다. 건반을 누를까 말까 손가락은 망설이고, 음표와 음표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파동의 여운이 길게 이어진다. 시간이 흐르듯, 음악이 흐른다. 앨범의 두 번째 트랙이자 또 다른 테마인 「고독」(Solitude)에서는 토니가 느끼는 고독과 적막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화면의 채도는 여전히 낮고, 그림을 그리는 토니의 작업실은 늘 어둡다. 반복되는 두 개의 테마 사이에서 토니의 아내 에이코가 녹색 하이힐을 신고 옷 가게를 들어서면 배경음악은 가볍고 경쾌한 분위기로 전환된다. 「포토그라피아」(Fotografia)는—영화 중반부 에이코의 쇼핑 장면처럼—혼자만 색깔을 입은 채로 앨범의 중간에 꽂혀 있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천천히 우측으로 이동하지만 프레임 속 에이코의 발걸음은 자유롭게 방향을 넘나든다.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춰, 혹은 그보다 빠르게, 손가락이 피아노 위를 걷는다.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구경하다 보면 계절보다 먼저 계절을 입은 마네킹들이 감각적인 포즈로 서 있다. 늘어선 옷 가게 사이로 바퀴를 굴리면서, 가끔 에이코처럼 쇼핑을 하는 상상을 한다. 나는 에이코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네킹과 눈을 맞춘다. 한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걸려 있는 옷을 살핀다. 당신처럼 마음이 끌리게 옷을 입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토니의 말에 에이코는 이렇게 답한다. “뭐랄까, 옷은 말이에요. 자기 안에 부족한 부분이 있잖아요. 그걸 채워 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러나 나의 쇼핑은 언제나 실패한다.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마네킹에 얹혀 있는 옷들, 그런 옷들이 내게는 항상 부자연스럽다. 야윈 팔과 휘어진 허리, 뻗뻗하게 위로 굳은 목, 가늘고 짧은 다리. 내 안의 부족한 부분은 아무리 옷을 입어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다. 마네킹은 휠체어를 타지 않는다.
1991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서울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휠체어 위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휠체어에서 듣는 음악』을 썼다. 서울에 살고 있다. 첼시 FC의 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