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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민, 신예슬, 오민 지음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300년간 서양 음악사를 관통하며 동시대 음악에서 맞춰지지 않은 채 남겨진 조각들을 찾는 ‘악보들’ 5권이 출간되었다. 노래의 선율과 다른 선이 형성되는 장면을 포착했던 『비정량 프렐류드』, 서로 다른 것이 어떻게 한 음악에서 양립할 수 있는지 살핀 『판타지아』, 노래하며 노래하지 않는 음악의 변주를 관찰했던 『리토르넬로』, 그리고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분화하는 여러 점들을 따라간 『멜로디 과잉』에 이어, 『모티프』는 노래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구성의 언어로서 서양음악을 읽는다.

지금-여기에서 관찰되는 음악의 동시대성

‘악보들’의 출발점은 지금-여기의 음악이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음악이 가진 동시대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예컨대 “동시대 음악 실험에서 ‘멜로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선이 사라지고, ‘음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덩어리가 그 자리를 대체한 현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보들’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양 음악사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두 경향의 운동, 즉 음악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보이려 하는) 움직임과, 반대로 먼 곳으로 향하는 (보이지 않으려 하는) 운동을 우리 신체와 맞닿은 ‘노래’라는 틀로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운동성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협력한다. 때때로 간단히 분리해 내기 어려운 상태로 뒤얽힌다. 하지만 서양 음악사의 흐름에서 특정 경향이 더 강하게 또는 독특하게 운동하는 순간들이 도래했고, ‘악보들’은 그 순간들을 포착”한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움직이는 음악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흔적이 구체적으로 담긴 악보를 통해 긴 여정을 이어 간다.

구성

베토벤의 대푸가 Op. 133은 원래 총 6악장으로 이루어진 현악사중주 13번에 속했던 곡이다. “서정적인 짧은 노래를 뜻하는 ‘카바티나’라는 별칭이 붙은 5악장에 이어지는 마지막 악장으로 쓰였지만, 노래의 관습에 기반하며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카바티나 악장에 바로 뒤따른 이 곡은 노래와 정반대 지점에서 구성적 아이디어를 펼치는 악장이었고, 혹독한 평가를 받은 이 곡은 결국 독립적인 곡으로 떨어져 나왔다. 이 악장이 나간 자리에는 활기찬 론도 소나타 형식의 알레그로 악장이 새로 들어왔고, 탈락된 이 곡은 추후 ‘대푸가’라는 별도의 이름을 얻었다.”
1826년 발표되었을 당시 “푸가 피날레의 의미는 감히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중국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평을 받았던 이 곡은, 그러나 오늘날 위대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악보들’은 베토벤의 대푸가를 경유해 노래의 영역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구성’(composition)의 영역을 가늠한다.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같았던 구성의 언어가 지금은 서양음악의 전통에서 모국어처럼 익숙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면, 현재에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음악의 언어도 “후대의 공통 감각”이 될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발췌

서양 음악사에서 형성되어 온 음악은 어느 순간 노래나 선율 중심의 구조에서 조금씩 멀어져 한층 더 크고 복잡한 구조체를 이뤘다. 서양 음악사의 전통에 기반한 작곡가들은 좋은 선율보다 좋은 구성을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하는 것 같기도 했다. 탁월한 구성을 위해서는 선율과 리듬, 화성, 텍스처, 형식 등 전체를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각각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했고, 이는 서양 음악에서 형성되어 온 관습적 언어와 그 쓰임새에 대한 충분한 선이해를 요구했다.

카바티나 악장은 베토벤의 곡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으로 노래하는 곡 중 하나고, 대푸가는 그의 모든 곡 중에서도 단연 가장 난해하다는 평을 받았던 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가 피날레의 의미는 감히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중국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의 ‘대푸가’에 대해 널리 회자되는 익명의 비평은 이 곡을 중국어에 비유한다. 이것은 신랄한 혹평으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이 음악에 대한 예리한 판단 같기도 하다. 이 곡을 그저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 나름의 체계를 갖춘 ‘다른 언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구성을 듣는다는 일은 음악의 근본 조건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음악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여겨지는 선형적 시간 위에서, 소리 난 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새로운 소리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지만, 구성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 순간에 집중하는 동시에 사라진 소리를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시간 축을 동시에 활성화하는 일은 청취를 단순한 청각적 경험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점과 점들로 연결된 어떤 상을 떠올리는 일로 확장해 낸다.

이 책에 담긴 음악은 비노래의 영역 중에서도 노래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카바티나 뒤에 이 곡을 배치했던 베토벤은 아마도 그가 만든 구성의 언어가 노래의 언어와는 완전히 상반된 영역에 있었다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차례

총론
노래하는 음악, 노래하지 않는 음악

서문
구성

루트비히 판 베토벤
대푸가, Op. 133


저자 소개

문석민
작곡가. 일반적인 악기 소리부터 소음까지 감각 가능한 다양한 소리를 발굴하고 또 그 소리 재료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탐구해 왔다. 미술가, 안무가 등과의 협업을 통해 비음악적인 재료를 음악 안으로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세계 각지에서 디베르티멘토 앙상블, MDI 앙상블, 네오 콰르텟, 앙상블 미장, 앙상블 TIMF 등에 의해 연주되었다.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음악학을 공부했고 동시대 음악을 구성하는 여러 전통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을 썼고, 종종 기획자, 드라마터그, 편집자로 일한다.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 위원을 맡고 있다.

오민
예술가. 시간을 둘러싼 물질과 사유의 경계 및 상호 작용을 연구한다. 주로 미술, 음악, 무용의 교차점, 그리고 시간 기반 설치와 라이브 퍼포먼스가 만나는 접점에서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고 운용하고 소비하고 또 발생시키는 방식을 주시한다. 『포스트텍스처』, 『토마』(공저), 『부재자, 참석자, 초청자』, 『스코어 스코어』 등을 출간했다.


편집

박활성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