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말들」은 워크룸 프레스의 구글 크롬 확장 프로그램입니다. 새 창을 열 때마다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실유령 도서의 인용문을 출력합니다. 내려받기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
온라인 판매처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

박정현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은 20세기 후반, 발전의 파고 속에서 한국 현대 건축이 남긴 발자취를 추적한다. 이 시기 건축은 때로는 턱없이 부족한 재료와 공법으로 현대 모더니즘 건축을 좇으며, 때로는 과거 기와지붕으로 표상되는 한국성을 강요받으며, 이상과 현실 두 양극을 끊임없이 오갔다. 이 책은 온전한 건축을 상정하고 한국의 사정을 비판하기보다, 지난 세기 한국에서 건축이 ‘무엇을 했는지’ 묻고, 여러 희미한 흔적들을 통해 거꾸로 건축이 무엇이었는지 살핀다. 무엇보다 이 시기 최대 건축주였던 국가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내고, 그 속에서 한국 현대 건축의 생산과 재현을 이야기한다. 이 자취야말로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를 쓰기 위한 중요한 단서다.

예술로 편입된 건축

한국에서 건축이 예술의 한 영역을 차지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5년,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건축부가 신설되면서부터다. 건축 전공자를 배출한 경험이 있는 학교가 서울대학교뿐이었던 시절, 「건축사법」이 제정되지도 않았던 시절,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제4회 국전 출품 작가와 출품작을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초대 작가와 추천 작가의 나이 차가 30년이었던 동양화 부문과 달리 건축 부문에서 초대 작가 정인국과 추천 작가 강명구는 불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출품 작가가 자기 작품의 심사를 맡고, 봉은사를 실측해 그린 도면이 수상하는 일도 벌어졌다. 새로 지어지는 건물 자체가 귀했던 시절, ‘건축계’라 불릴 만한 영역이 없던 시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건축이 국전에 편입된 것은 당시 “건축계의 의지와 미술계의 권력 구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지만, 무엇보다 국가가 건축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제1장 「예술이 되기를 바란 건축」은 건축이 국전에 편입된 1955년부터, 독자적인 동력을 갖추고 대한민국건축대전을 열게 된 1982년까지, 건축을 통해 “국가 재건 사업, 더 정확히는 사업의 이미지를 홍보”하길 바랐던 국가와 스스로 예술 장르로 인식되길 바랐던 건축의 얽힘을 다룬다.

『공간』의 창간, 그리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제2장 「중앙정보부, 그리고 문예와 건축」이 다루는 문제는 좀 더 첨예하다. 지금껏 건축 전문지로서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하는 『공간』과 그 발행인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 김수근을, 그 배후에 드리워진 국가의 그림자와 함께 다루기 때문이다. 저자는 별다른 창간사도 없이 느닷없이 나타난 『공간』의 판권에 발행인으로 기재된 ‘석정선’과 김수근의 관계를 추적한다.

육군사관학교 8기생인 석정선은 김종필과 함께 ‘16인의 하극상’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국가 반란 음모죄로 구속된 바 있으며, 이후 중앙정보부 창설을 비롯해 군사 정권에서 벌어진 ‘4대 의혹 사건’ 등에 깊이 연루된 권력의 핵심 인사였다. 한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신생 공화국의 공업 시설 입지 선정, 기술 조사 등 급증한 엔지니어링 업무를 맡기기 위해 박정희가 설립을 지시한 국영기술 용업 업체로, 김수근이 2대 사장을 지낸 바 있다.

저자는 워커힐 건립을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된 석정선과 김수근 두 사람의 연결 고리를 시작으로 “정부에 제출하는 보고서의 내용이 그대로 잡지의 지면에” 실리곤 했던 『공간』과, 국민 국가 만들기의 첨병이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관계를 살피며 “국가와 건축가가 서로를 필요로 한 개발주의 시기” 이 동력을 이용해 자신의 영역을 확립해 나간 한국 현대 건축의 자취를 따라간다.

강요받은 한국성, 현실과 이상 사이

한국 현대 건축의 큰 흐름이 결정된 1960년대 중후반은, 동시에 20세기 후반 내내 건축이 마주쳐야 했던 현실의 갈등과 모순이 전면에 드러난 시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1966년 이뤄진 종합박물관(현 민속박물관) 현상 설계와, 1967년 시행된 정부종합청사 현상 설계 과정을 통해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국 각지의 유명 전통 건축의 요소를 끌어와, 콘크리트로 지붕을 올리라는 지침이 딸린 종합박물관 현상 설계가 강박적인 ‘한국성’에 대한 논의를 대표한다면, 고층 오피스 건물인 정부종합청사에는 한국 현대 건축이 마주쳐야 했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가 있다.

시대착오적인 지침이라며 건축가들이 현상 설계를 대거 보이콧한 종합박물관은 잘 알려진 대로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는 물론 법주사, 화엄사 등 전통 건물의 각 요소를 결합해 지어졌다. 정부종합청사의 경우, “여섯 자 여덟 자 이상의 유리도, 200kg/cm2 이상의 철근도, 스팬 20m 이상의 프리캐스트·빔도 써” 보지 못했으며 “연면적 5만 6000제곱미터 규모의 오피스 빌딩을 건설하는 데 동원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구조는 스팬 7~8미터의 철근콘크리트 라멘 구조”뿐인 현실에서 한국 건축은 군사 정권이 배출한, 울산 특별건설국장을 지낸 공병감의 공법에 대한 문제 제기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부종합청사는 현상 설계 당선자였던 건축가 나상진의 설계가 아닌, 미국 설계 회사 PAE(Pacific Architects & Engineers)의 설계로 지어진다.

저자는 3장 「신생 독립 공화국의 표상」과 6장 「한국성이라는 성배」를 통해 전자, 즉 “부여박물관과 종합박물관을 기점으로 1970년대 국립극장, 지방의 국립박물관과 문예회관, 1980년대 독립기념관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성”을 둘러싼 논의를 살피는 한편, 4장 「계획의 대상이 된 도시」, 5장 「중대형 설계 사무소의 탄생」을 통해 개발주의 시기, 즉 기술과 생산이 건축과 표상을 압도하던 시기 건축이 마주해야 했던 현실과, 그 속에서 건축이 할 수 있었던/없었던 것을 묻는다.

건축의 자율성을 항하여

1980년대까지도 한국에서 국가는 최대의 건축주였을 뿐 아니라, 건축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인받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어진 개방 정책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 등은 이러한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건축은 처음으로 (권력이나 자본에 잠시 괄호를 치고) 다른 가능성을 묻기 시작한다.

저자는 7장 「건축의 자율성을 향하여」에서 1980년대 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건립 과정을 사례 삼아 이러한 변화를 읽어내고, 8장 「국가는 건축의 적인가」에서 이탈리아 건축 역사학자 만프레도 타푸리가 1980년대 한국에 소개된 맥락을 통해 계획과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국가와 건축의 관계를 살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 운동의 열기와 함께 등장한 청건협(청년건축협의회), 수건협(수도권지역건축학도협의회) 등은 권력과 자본에 맞서 건축의 사회적 실천을 촉구했으나, 거세게 밀려오는 자본의 물결 앞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실천의 방식을 묻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에필로그: 광장에서 규방으로」는, 2000년대 한국 현대 건축을 다룰 저자의 후속 저술을 예고하듯, 1990년대 한국 현대 건축에서 처음으로 건축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건축의 의미를 사유하길 요청한 4.3그룹의 등장으로 끝을 맺는다. 한국 현대 건축의 새로운 장이 시작된 것이다.


발췌

국가의 행위를 괄호 치고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를 서술하기란 힘들다. 국가는 최대의 건축주였을 뿐 아니라, 건축이란 개념과 영역이 미약하나마 자리 잡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국가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군사 정권의 폭력이 만연했던 1960~80년대, 국가 건축 프로젝트는 독재를 가리고 정권을 비호하는 프로파간다라는, 건축가들은 이런 정책을 실현시킨 동조자가 아닌가 하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의 생산과 재현은 그렇게 일면적이지 않다. 3~5공화국은 이 책에서 다룬 여러 프로젝트들을 상징 정치의 수단으로 삼으려 했으나, 어느 것도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실패의 연대기에 가깝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인 찍기와 면죄부 발급이 아니라, 건축이 그 시절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생산했는지를 묻는 일이다. 우리는 아직 권력과 건축의 대차대조표를 손에 쥐지 못했다.

건축계의 인적 구성이나 작품으로 다룰 만한 프로젝트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시점,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도면과 모형 등 건축가가 생산하는 매체에 대한 인식, 계획안과 완성안에 대한 이해 등이 전무했다. 국전에 건축부를 신설하고자 노력한 소수의 “건축 작가”의 노력은 건축에 대한 사회적 이해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경쟁하던 사진을 제치고 건축이 국전에 먼저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건축을 더 필요로 하는 당시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공간』의 출현은 때 이른 것이었다. 이 낯섦은 창간호에 어떠한 창간의 변도 없다는 사실에서 의구심으로 바뀐다. 새로운 잡지를 출범시키는 발행인의 의지나 포부는 물론이고, 잡지의 방향과 발간 경위, 제호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공간』의 창간호는 느닷없는 출현만큼이나 본문으로 느닷없이 들어간다. 발간사가 없는 까닭을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발행인은 왜 말을 극도로 아꼈을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짐작과 달리 『공간』 창간 당시 발행인은 훗날 100호 발간을 맞아 ‘에디토리얼’란에서 “설사 등사판을 가지고 손수 긁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발행하겠다고 의지를 다진 김수근이 아니었다. 창간호 판권에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린 이는 석정선이다.

석정선이 김수근을 비롯한 건축계 인물들과 관계를 맺게 된 계기는 워커힐 건립이었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은 적당한 위락 시설이 없어 연 3만 명의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를 간다는 멜로이 유엔군 사령관의 말을 듣고 “동양의 라스베가스”를 광장동에 조성하기로 한다. 석정선이 이 건설 사업의 총 책임자였다. 워커힐 건립 사업 당시 석정선은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겸 제2국장이었고, 김수근은 이 프로젝트에서 힐탑바와 더글라스 호텔 등을 맡았다. 김종필이 발의하면 석정선이 총책임을 맡고 김수근이 실무를 진행하는 이 연결 고리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설립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종합박물관 현상 설계는 현대 건축의 이념을 지지한 건축가들이 모두 보이콧함으로써 정작 그들이 상정한 기념비적 건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건축의 생산, 그러니까 건축을 무엇으로 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크게 불거지지 않았다. 철근콘크리트는 불변항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대 주요 건축가 대부분이 참여한 정부종합청사 현상 설계에서는 건물의 상징과 의미를 놓고는 어떤 갈등도 없었다. 오히려 ‘현대’ 건축이 1960년대 말 한국에서 무엇을 생산할 수 있었는지, 또는 없었는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건물을 고층화하는 데 철골이 원천 배제된 까닭은 H-빔과 I-빔이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축 자재는 곧 국내 생산품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수요에 따라 공급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경제 정책에 따라 공급이 정해지고, 이에 맞추어 수요가 생겨났다. 경제기획원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각 부분의 생산 품목과 하위 계획들이 수립되던 ‘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수요와 공급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조와 재료, 커튼월을 구성하는 방법 등, 한국의 건축가들은 19세기 시카고의 루이스 설리번에서 20세기 LA의 존 포트먼에 이르는 100년의 과정을 15년여 만에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이 시기는 한국의 설계 사무소가 분화하는 과정과 거의 일치하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다른 종류의 건축 지식과 설계 조직을 요구한 도심 재개발 사업과 오피스 빌딩 프로젝트를 맡았는지 여부는 아틀리에와 대형 설계 사무소를 가르는 한 기준이었다.

독립기념관은 전후 한국에서 현대 건축을 학습한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했다. 1960년대 말 정부종합청사, 국회의사당, 종합박물관 등의 현상 설계에 개입한 국가와 군부 테크노크라트를 비판하던 위치에 있던 그들이 이제 국가의 기념비를 설계해야 하는 위치였다. 종합박물관을 설계한 강봉진은 1917년생,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엄덕문은 1919년생, 정부종합청사 현상 설계 당선자인 나상진은 1923년생, 국립극장의 건축가인 이희태는 1925년생으로 식민지 시기 건축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현상 설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신사 참배를 하지 않은 ‘순수한’ 한국인에게만 참여 기회를 준 독립기념관 현상 설계는 후속 세대, 해방 후 한국에서 건축 교육을 받은 이들의 몫이었다.

국가는 적어도 1980년대까지 한국 현대 건축이 생산되기 위한 조건이었다. 국가와 무관한 건물과 건축가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국가라는 대타자를 통하지 않고서 ‘건축’의 경계를 획정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이 연결 고리들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이 결실을 맺고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개방되기 시작하면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 변혁 움직임에 맞추어 권력과 자본에 맞서는 건축의 가능성을 묻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어 권력과 자본에 잠시 괄호를 치고 건축 자체의 의미를 찾으려는 모색이 시작되었다. 전자는 건축의 사회적 실천과 현실 참여를 촉구했고, 후자는 한국 건축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건축의 자율성을 물었다. 목표와 방법은 달랐지만 이 둘은 모두 건축의 모더니티를 다시 추구하는 길을 걸었고, 그 여정은 담론과 헤게모니의 교체로 귀결되었다.

1960년대 이래 건축의 의미는 국가가 보증하는 것이었다. 수차례 되풀이된 한국적인 것을 둘러싼 논의도 결국 국가가 공인하는 양식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5공화국의 주요 문화 프로젝트 설계를 수행한 김원, 김석철에게도 건축의 의미는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 구도를 계급적 이해관계에 의해 역전하려고 한 청건협의 대타자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민중(또는 민족)이었다. 4.3 그룹의 입장에서는 국가와 민중은 모두 시효가 다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건축 외부의 이야기였다. 건축의 훼방꾼으로 여긴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중 역시 건축의 고유한 가치를 드러내는 데에는 부적절한 것이었다. ‘자기 이야기’는 건축 바깥에서 주어지는 의미가 아니라 건축 내부에서 빚어내는 것이어야 했다.


차례

프롤로그: 한국 현대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1장. 예술이 되기를 바란 건축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작가라는 자의식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건축

2장. 중앙정보부, 그리고 문예와 건축
『공간』의 창간과 석정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와 환경

3장. 신생 독립 공화국의 표상
양식에 대한 불신
정부종합청사 현상 설계
미군 용역 업체와 두 정부청사

4장. 계획의 대상이 된 도시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서울도시기본계획
유토피아적 계획과 도심 재개발 계획의 원형
계획의 합리화와 도구의 부재
88서울올림픽과 강북의 재편

5장. 중대형 설계 사무소의 탄생
작가 대 조직
기술의 분화와 조직 설계의 시작
작가주의와 파트너십 사이

6장. 한국성이라는 성배
문화 헌법과 문화 건축
강요된 지침, 외부 공간과 한국성
포스트모더니즘과 전통의 만남
지붕에서 마당으로

7장. 건축의 자율성을 향하여
동물원 옆 미술관
계곡에 내려간 사찰 대 능선 위에 올라간 성

8장. 국가는 건축의 적인가
국가의 계획과 건축의 이데올로기
부정성의 변증법
호출된 타푸리
부정성의 딜레마

에필로그: 광장에서 규방으로

부록: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건축 부문 역대 수상작
참고 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박정현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 1989~1997』(이상 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Spectres of the State Avant-garde)을 비롯해 『아웃 오브 디 오디너리』(Out of the Ordinary, 2015, 런던), 『한국현대건축, 세계인의 눈 1989~2019』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 Cosmo-politan Look 1989~2019, 2019, 부다페스트)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 건축 비평가로 활동하며 잡지 발간을 준비중이다.

표지 사진: 삼일빌딩과 삼일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1982.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삼일고가도로와 김중업의 삼일빌딩은 개발주의와 현대 건축의 상징이었다. 이 책은 전자와 후자의 얽힘, 특히 개발의 파고 속에서 건축이 무엇을 할 수 있었고 무엇을 할 수 없었는지를 묻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편, 『선진 수도로의 도약: 1979~1983』, 서울시정사진총서 9,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2018, 20.

코멘터리 2: 박정현,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