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의 기다림 끝에 이룬 기계비평가의 꿈
『페가서스 10000마일』은 기계비평가 이영준이 오늘날 지구상에서 만들어진 기계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하는 컨테이너선 페가서스를 타고 한 달간 대양을 횡단하며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견문록이자 기계비평서다(김수룡 감수). 그는 수소문부터 시작해서 실제로 이 배에 올라타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한다. 배 하나를 타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저자에 따르면 기계라는 스펙터클이 우리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잠수함이나 우주선 같은 거대하고 특별한 기계가 아니라 엘리베이터처럼 친숙한 기계도 사실 우리는 정체를 잘 모른다. 컨테이너선도 마찬가지다. 컨테이너선이 없으면 하다못해 이케아 가구를 주문할 수도 없지만 뱃사람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컨테이너선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거나 타지 못한다. 안전이나 보안 등의 이유가 따라붙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문화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비평가는 외로운 존재다. 미술이나 음악은 비평가의 손길을 기다리지만 기계는 비평가에게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바다라는 판타지, 기계라는 인터페이스
기계는 자연과 인간의 중간에 있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배라는 기계는 한없이 넓은 바다와 한없이 작은 인간을 매개하는 드라마틱한 인터페이스다. 나무로 깎은 배에 몸을 맡기고 거친 바다로 나아가던 시대로부터 최첨단 항법장치로 무장한 강철 배를 타고 대양을 횡단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미지의 세계라는 판타지로 인간을 유혹해왔다. 저자는 기계비평가의 눈으로 21세기의 항해를 관찰한다. 대항해시대의 항해 기술은 어떤 식으로 발전했고 배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에 따라 바다의 노동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10만 마력의 괴물 엔진부터 연료, 전기, 물, 음식은 물론이고 소리, 빛, 바다색, 항구와 바다의 미신에 이르기까지 항해라는 판타지가 오늘날 어떤 식으로 변해서 남아 있고, 거기서 인간은 바다와 기계를 상대로 어떤 투쟁을 벌이고 있는지 관찰한다.
선장과 선원, 해적, 이름하여 뱃사람들
항해 도중 모로코 탕헤르 메드 항을 떠난 페가서스는 날씨가 험악해져 지중해 안쪽에 갇혀 3일이나 드리프트(바다에 둥둥 떠다니기)해야 했다. 이때 저자는 선장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것인지 여실히 느끼게 된다. 거친 바다를 뚫고 배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하기 위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뱃사람들의 강인함을 체험한다. 21세기 첨단기술이 어떻게 선원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지 목격한다. 날씨뿐 아니라 해적도 여전히 항해를 위험하게 만드는 존재다. 간발의 차이로 저자가 타지 못했던 또 다른 컨테이너선 쇼팽은 페가서스 바로 뒤에 오다 해적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졌으며 저자 역시 해적의 모선으로 의심되는 배를 목격한다. 하지만 선원들은 해적 위험 지역을 표시한 지도에 보너스라고 써넣고 묵묵히 일할 뿐이다. 한 번의 항해로 여정이 끝나는 저자와 달리 끊임없이 바다를 떠돌아야 하는 뱃사람들에게 해적은 위험수당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철의 풍경, 그리고 16분
16분. 페가서스가 전속력으로 달리다 완전히 멈추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은 세상에 어떤 것도 페가서스를 멈추게 할 수 없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은 힘과 크기에서 인간을 완전히 압도하고 초월하는 기계를 만들어놓고 그 기계를 제어하느라 투쟁하고 있었다. 조금만 잘못 제어되면 대형 사고를 일으키는 길이 363미터, 무게 13만 톤의 배는 그런 투쟁의 현장이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쓴 기계비평서라 할 수 있다. 사진비평가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투쟁의 현장을 카메라와 비디오에 모두 담았다. 사실 363미터라고 말하는 것보다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빠르고 13만 톤쯤 되면 말은 거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담긴 아름답고 장엄한 철의 풍경들은 독자의 머릿속에서 기표와 기의를 일치시키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정작 타고 있던 페가서스는 너무 커서 한 장의 사진에 담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발췌
페가서스의 항해에 대한 비평은 그런 식의 비평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숨어 있는 층위를 찾아서 밑으로 파헤쳐 들어가는 게임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사물들이 얽혀서 만들어내는 직조 혹은 매트릭스에 관심이 있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이라는 기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바다와 어떻게 만나게 하는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배와 어떻게 만나게 하는지, 강철이라는 물질은 배가 어떻게 바다와 만나게 하는지, 그리고 그런 만남은 역사적으로 어떤 단계에 와 있는지가 이번 항해 여행 겸 비평 여행에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 (6쪽)
수많은 기다림과 혼란과 초조함 속에 양산 터미널 안에 있는 출입국관리소에서 여권 검사를 마치고 배 앞에 섰을 때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처음 마주 대한 페가서스는 정말로 성이었다. 이래서 내가 접근하기 쉽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길이 363미터, 부두 바닥에서 갑판까지의 높이 20미터, 6000여 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있는 페가서스는 정말로 성 그 자체였다. (30쪽)
우리의 일상에서 철은 사회를 떠받치는 굳건한 토대이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부엌에서 일만 묵묵히 해야지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 되는 부엌데기 같은 존재다. 철의 풍경을 보면서 안복을 누린다고 좋아하는 이유는 겉으로는 가려진 메커니즘 뒤에서 펼쳐지는, 진짜 메커니즘의 속살을 보는 쾌감 때문인 것 같다. (…) 철이 작동할 때 만들어내는 동작의 리듬과 선은 마치 야구선수가 공을 던질 때 몸의 선과 공이 날아가는 선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듯이,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어낸다. (64쪽)
2월 5일 토요일, 브리지에는 해적에 대한 온갖 텔렉스 메시지로 어수선하다. 거의 매일 한 건 꼴로 해적의 공격 시도에 대한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이젠 점점 더 해적들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 저녁 무렵 선장이 직접 받은 이메일 메시지를 들고 브리지에 올라왔다. CMA CGM 쇼팽이 공격당할 뻔했다는 것이다! 쇼팽이라면 원래 내가 부산에서 타려고 했던 그 배가 아닌가!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일 그 배에 탔었더라면…. (192쪽)
머리말
꿈속의 항해
사람은 왜 바다로 나아갔을까?
출항, 상하이 양산 터미널
밝게 빛나는 큰 그릇, 페가서스
컨테이너선, 왜 커질까
비평가의 안복
기계의 소리, 조화로운 불협화음
바닷사람답다는 것
기항지, 홍콩
오늘날의 항해술, 대항해시대와 무엇이 다를까?
사물의 변증법
컨텍스트 속의 사물
기항지, 포트켈랑
21세기의 해적
비평과 관찰의 일과
선박이라는 기계, 인간과 환경의 인터페이스
바다의 힘, 넓음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
항해와 미신
항해의 어려움
바다의 노동
지브롤터 해협
기항지, 사우샘프턴
에필로그, 죽은 고양이
부록: 바다에서 만난 갖가지 배들
저자 소개
이영준
기계비평가. 인간보다 기계를 더 사랑하는 그는 정교하고 육중한 기계들을 보러 다니는 것이 인생의 낙이자 업이다. 일상생활 주변에 있는 재봉틀에서부터 첨단 제트엔진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구조와 재료로 돼 있으면서 뭔가 작동하는 물건에는 다 관심이 많다. 원래 사진비평가였던 그는 기계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스스로 설명해보고자 기계비평을 업으로 삼게 됐다. 그 결과물로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현실문화연구, 2006), 『페가서스 10000마일』(워크룸프레스, 2012) 같은 저서를 썼다. 또한 사진비평에 대한 책(『비평의 눈초리: 사진에 대한 20가지 생각』, 눈빛, 2008)과 이미지비평에 대한 책(『이미지비평의 광명세상』, 눈빛, 2012)도 썼다. 기계비평은 즐겨 하는 업이긴 하지만 돈을 벌어주진 못하므로, 생계를 위해 계원예술대학교 아트앤플레이군의 교수로 있다. 슬하에 1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