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형가, 디자이너의 원형
『변형가—아이소타이프 도표를 만드는 원리』는 2013년 ‘트랜스포머’라는 제목 아래 작업실유령의 첫 책으로 출간되었던 한국어판의 개정판이다. 『트랜스포머』를 옮겼던 디자이너 최슬기가 제목에 이어 번역문을 전체적으로 다듬었고, 슬기와 민이 책 전면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개정판의 표지는 책 39쪽에 실린 도표를 디자이너가 변형한 것으로, 『변형가』가 ‘아이소타이프’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릴 법한 픽토그램보다 그 조직 원리에 집중하는 책이라는 점을 반영해 도표에서 픽토그램을 생략하고 원리만을 추상화했다.
『변형가』는 디자인의 핵심인 ‘변형’의 ‘문법’이 마련된 자취를 좇으며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방법을 드러낸다.
아이소타이프, 정보 디자인의 기초 문법
정보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기초 문법인 ‘아이소타이프’(Isotype) 통계 도법에 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아이소타이프란 국제적인 그림 언어 체계로, 지식을 조직적으로 시각화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 정보, 자료, 개념, 의미 등을 문자와 숫자 대신 도형이나 기호를 조합해 시각적·직접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이다. 20세기 초 아이소타이프를 제창한 오토 노이라트는 간략화된 도형을 국제적으로 통용하고자 시각 사전과 기호 문법을 만들어 보급했다.
『변형가』는 아이소타이프 도표를 만드는 원리를 설명한다. 통념과 달리 아이소타이프는 단순히 픽토그램을 뜻하지 않는다. 아이소타이프는 통계 그래픽의 역사에 뿌리를 두기에, 하나의 기호가 일정 수량을 대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그림, 다이어그램, 지도 등 여러 시각적 수단을 통해 정보를 소통해 온 인류의 전통에 기대고 있어서, 아이소타이프 도표의 기호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읽혀야 한다.
아이소타이프의 핵심 원리는 ‘변형’, 즉 정보를 시각적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변형가’(독일어 Transformator)는 이러한 시각적 변형 작업을 수행하는 이들이다. 이 책은 아이소타이프를 통해 오늘날 디자인과 디자이너라 불리는 ‘변형’과 ‘변형가’의 기본 개념을 돌아본다.
“글과 수로 주어진 자료에서 핵심 사실을 추출하고 도형으로 변형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료를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전문가에게 모두 얻어 내고, 대중에 전파할 가치가 있는 내용을 결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시킬지, 어떻게 일반 상식이나 다른 도표와 연결할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변형가’의 책임이다. 그런 뜻에서 변형가는 공중의 대리인에 해당한다.” —마리 노이라트(82쪽)
“아이소타이프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통계도, 통일성 있는 기호 체계, 효과적인 시각 요소 배치 등 여러 가치로 인정받지만, 서로 다른 문제 해결 과정이 소통하는 체계를 제안했다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다. 주로 그런 소통을 맡는 사람에게 ‘변형가’라는 직함을 붙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설명을 종합하면, 변형가의 역할이 현대 디자이너의 업무와 (…) 퍽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주어진 자료를 파악해 필요한 정보를 편집하고, 시각 요소로 번역하고, 적절한 구성과 배치법을 찾고, 제작 공정을 살피는 업무는, 다른 말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금 디자인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역자의 글」 중에서
아이소타이프의 확장성
아이소타이프 창시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1882~1945년)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과학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도시의 다양한 삶의 양태에 민감했던 백과사전적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관심과 성향은 빈 사회 경제 박물관에서, 특히 아이소타이프를 위시한 시각 연구에서 빛났다. 이 책의 저자 마리 노이라트(Marie Neurath, 1898~1986년)는 오토 노이라트의 파트너로서 혁명과 전쟁, 망명의 시대에 세계 각지에서 핵심 변형가로 활동하며 아이소타이프 연구에 매진했으며, 오토 노이라트 사후 아이소타이프가 오늘날까지 통계 도표와 교과서 등에서 사용되도록 힘썼다.
마리 노이라트와 함께 이 책을 만든 저술가·편집자·디자이너 로빈 킨로스에 따르면, 아이소타이프는 “말할 필요가 있는 사안을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기법”(127쪽)이었다. 제시할 가치가 있는 정보를 다뤘으며, 보는 이는 거기에서 사실뿐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관계도 배울 수 있었다. 아이소타이프는 단지 숫자를 통계도로 바꾸는 기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상의 아이소타이프 도표는 일부 암묵적 원칙을 바탕으로 삼되 매번 새로 개발해야 하는 지성적 시각언어였다. 이러한 점에서, 아이소타이프는 오늘날 우리가 ‘디자인’이라 부르는 행위와 기본적으로 같다고 거듭 확인된다. 정보, 자료, 개념, 의미를 분석, 선택, 정렬하고 시각화하는 활동.
로빈 킨로스는 아이소타이프 사례와 관련 논의에 인접 분야도 끌어들였다. 런던 지하철 다이어그램, 얀 치홀트의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해설, 막스 빌의 울름 디자인 대학 건물 드로잉 등과 아이소타이프를 연결시키며 이미 한 세기 가까이 생명력을 유지해 온 아이소타이프가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변형가』는 이렇게 오토와 마리 노이라트가 벌인 시각 작업의 안팎에서 오늘날의 디자이너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만한 아이소타이프의 주요 성과를, 자료를 시각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아이소타이프의 가치를 알린다.
“나는 아이소타이프가 완결되고 정해진 체계나 방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디자인 접근법이라고, 즉 통계도를 만들거나 정보를 제시하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디자인 분야에서 여전히 이어 갈 만한 방법이라고 본다. 궁극적으로, 아이소타이프는 생각하는 방법이다.” —로빈 킨로스(7~8쪽)
추천사
“정보를 시각적으로 변형하는 작업이나 디자인 사유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이 책이 필요하다. 책상에 늘 두고, 학생들에게 보여 주고, 클라이언트와 나눠 읽을 책이다.” —에리크 슈피커만
“아이소타이프가 표준 픽토그램을 활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소타이프에서 중요한 점은 그런 기호의 디자인이 아니라 도형 문법을 개발하는 데 있다.” —제시 오닐
발췌
“기초 영어 책 두 권을 만들면서 우리의 통계 도법에도 새 이름이 필요해졌는데, 그때 도움이 된 것이 바로 ‘기초’(BASIC: British American Scientific International Commercial)라는 조어법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이리저리 궁리를 거듭하던 나는 ‘국제 도형 교육법’(International System Of Teaching in Pictures), 즉 ‘아이소팁’(Isotip)을 고안했지만, 첫음절 말고는 별로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러고는 금방 ‘아이소타이프’(Isotype)가 떠올랐다. 그러나 쓸 만한 말 풀이는 끝내 찾지 못했고, 그래서 우리는 썩 흡족하지 않은 ‘국제 활자 도형 교육법’(International System Of TYpographic Picture Education)이라는 풀이를 계속 쓰게 되었다. 그날 저녁 암스테르담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노이라트는 새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고, 다음 날 아른츠에게 그것을 표시할 기호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새 이름과 기호는 모두 『국제 도형 언어』에 처음 선보였다.”(49쪽)
“우리는 기초 영어를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 그것을 읽기가 얼마나 쉬운지 배웠다. 그러나 그 점은 우리의 도형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모두 국제적 소통을 위해 애쓴다는 점에서 한가족이라고 느꼈다.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이 길 찾는 일을 돕는 것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기초를 다지는 일이나 그 목표는 같았다. 여기에서 노이라트는 도형 언어의 특징을 구술 언어와 연관해 설명했다. 그는 아이소타이프가 언어를 돕는 언어라고 묘사했다. 어떠한 도표에든 몇 마디 말은 필요하다. 한자처럼 기호로만 이루어진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려던 일이 아니었다.”(51쪽)
아이소타이프 용어로, 마리는 ‘변형가’였다. 시각 표현을 만드는 사람이자 전문 지식인이자 최종 산물 제작자이자— 어떤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일반인과 매개하는 핵심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오토와 마리는 (영어로건 해당 독일어로건) ‘디자이너’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내용에 물질적 형태를 부여하고 이를 계획하는 전문가를 뜻하게 된 것은 겨우 최근 일이다. 레딩에서 우리가 변형가를 디자이너라는 뜻으로 쓰면, 마리는 미심쩍은 기색을 보이곤 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디자이너란 철마다 유행에 따라 물건의 형태를 바꾸는 장식가를 뜻했다. (불행히도 이 믿음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반대로, 이름이 암시하듯 아이소타이프는 표준을 지향했다. 숱한 발명과 실험을 거쳐 만족스러운 기호나 배열을 마침내 얻었다면,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128쪽)
이 글에서 제시한 다른 작업 사례들에 아이소타이프와 유관한 사고방식이 있다면, 아이소타이프가 ‘의미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드넓고 비옥한 터전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점도 명확해질 것이다. 이 작업 방식을 따르는 (최대한 넓은 의미에서) 디자이너는, 자료 자체를 위해서나 자료를 읽고 사용할 사람을 위해서나, 자료가 품은 뜻을 이해하고 자료 스스로 좋은 질서를 찾게 한다. 두 차원은—자료와 사용자는—불가분해진다. 오토 노이라트와 동료가 한 일을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123쪽)
머리말
감사의 말
빈 통계 도법과 아이소타이프 — 오토 노이라트와 함께한 배움과 협력
변형가가 하는 일
아이소타이프가 남긴 교훈
마리 노이라트, 1898~1986년
참고 자료
참고 자료 서지
역자의 글
색인
저자 및 역자 소개
마리 노이라트(Marie Neurath, 1898–1986)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났다. 괴팅겐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5년부터 오토 노이라트의 빈 사회 경제 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을 피해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주한 오토 노이라트와 마리 노이라트는 1940년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다시 영국으로 활동지를 옮겼다. 이듬해 결혼한 그들은 옥스퍼드에 아이소타이프 연구소를 설립했다. 1945년 오토 노이라트가 사망한 후에도 마리 노이라트는 아이소타이프 작업을 이어 갔다. 1971년 실무에서 은퇴한 그는 오토 노이라트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그의 글을 편찬, 번역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로빈 킨로스(Robin Kinross)
레딩 대학교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저술가, 편집자, 디자이너로 활동해 왔다. 1980년 노먼 포터의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재출간 작업을 계기로 하이픈 프레스를 설립했다. 『블루프린트』(Blueprint) 『아이』(Eye) 『인포메이션 디자인 저널』(Information Design Journal) 등에 기고했으며, 1992년 『현대 타이포그래피』(Modern Typography)를 써냈다. 2002년에는 그간 쓴 글을 엮어 『왼끝 맞춘 글』(Unjustified Texts)로 펴냈다.
최슬기
중앙대학교와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 최성민과 함께 그래픽 디자인 팀 ‘슬기와 민’으로 활동하는 한편 계원예술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친다. 역서로 『다이어그램처럼 글쓰기』 『트랜스포머』가 있다. 최성민과 함께 옮긴 책으로는 『멀티플 시그니처』가, 함께 써낸 책으로는 『누가 화이트 큐브를 두려워하랴』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