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학자이자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김영나의 『한국의 미술들: 개항에서 해방까지』가 출간되었다. 조선이 서구 국가들과 수교를 맺는 188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는 1945년까지, 그 격동하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한국 미술이 걸어온 길을 담아낸 이 책은 한국 현대미술의 기원을 회화, 삽화, 사진, 건축, 전시, 교육, 제도 등을 망라해 서술하는 동시에,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뤄졌음에도 부분 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비평적으로 조망하는 개설서이다.
“근대는 단순히 가까운 과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근대라는 용어에는 전(前) 시대와 분명히 구분되는 새로움이 내포되어 있다. 근대는 서구에서 시작되었고 근대성과 근대미술은 글로벌한 현상이었지만 그 전개 과정은 지역마다 달랐다. 한국 근대미술의 기점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 서막을 동아시아의 문화권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에 발을 내디디는 1880년대부터 서술했다.” 조선 문헌에 ‘미술’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1881년 이래 서화, 상, 도자 등 전통적인 구분은 점점 와해되기 시작했고, 조선 시대의 직업 화가였던 화원과 사대부 문인화가로 이루어졌던 미술계 역시 붕괴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서양 문화가 동아시아에 밀려오면서 세계 질서가 재편되던 시기였다.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큰 변화가 나타나면서 근대미술은 회화, 조각과 같은 순수미술에서보다는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축, 사진이나 인쇄 매체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화단으로 확산하게 된다. 이 책은 그동안 근대미술이 주로 회화와 조각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던 점을 보완해 건축, 공예, 사진, 전시, 수집 등의 부분을 강화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한국 근대미술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그 격동하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한국미술을 서술한 개설서가 있었으면 했던 저자의 아쉬움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성,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개인과 군중이 공존하던 이 혼성의 시기에 미술가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활동했는지, 또 당시의 문화 정체성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일은 미술사학자에게 하나의 도전이자 과제이기도 하다. 해방 후 8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로 다른 길을 간 남과 북의 미술이 점점 공통점을 찾기 어렵게 된 오늘날, 이 책은 한국의 미술들을 하나로 완결해 내는 데 중요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발췌
지난 20–30년간 근대미술 연구는 그동안 주가 되었던 회화에서부터 삽화, 전시, 제도 등으로 확장되었고, 주요 작가들의 카탈로그 레조네 구축, 구술 채록, 개인 소장품 조사 등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개개 미술가의 생애사, 제작 연대, 작품 제목 등에서 불확실한 부분이 남아 있다. 미진한 부분의 연구가 더 진전되어야 함을 인정하면서도 이제 대학에서도 근대 한국미술사 과목이 개설되고 있어, 세계미술사 속에서 한국 근대미술의 흐름을 서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7쪽)
1910년 한일병합을 기념하는 엽서에서 곤룡포와 익선관 차림의 고종은 대원수 군복을 입은 일본 천황의 사진 아래에 배열되었다. 일본 천황이 왕권을 상징하는 봉황이 위에서 보위하고 화려한 국화 장식에 둘러싸여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고종은 소박한 오얏꽃으로 장식되었다. 식민 지배국과 피지배국이 대조되고 일본의 통치를 사실화한 이 엽서는 마치 대한제국 영욕(榮辱)의 역사를 보는 듯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 (28쪽)
전통적인 시서화의 개념도 붕괴하기 시작했다. 시서화가 종합되었던 문인화에서 시는 문학으로 독립되었고, 그림과 글씨가 같이 있던 서화는 각각 회화와 서예로 분리되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사군자가 동양화로 편입되고 서예는 미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퇴출되었다. (74쪽)
서양화단이 성립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 수학한 미술가들이 다수 귀국하면서였다. 이들 1세대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면서도 관심을 가지고 추구한 방향은 조금씩 달랐는데 대체로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아카데미적 사실주의를 고수한 김인승, 이마동, 도상봉 등으로 사실적인 인물화, 누드화, 정물화를 주로 그렸다. 두 번째 그룹은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포비즘) 사조를 받아들인 오지호, 김주경, 길진섭, 이인성 등이다. 세 번째는 소수였지만 추상미술을 시도한 김환기나 유영국, 그리고 표현주의나 환상적인 그림을 그린 이중섭, 구본웅, 문학수이다. (86–90쪽)
김환기의 작품에서는 서구의 실험적 형태를 사용하면서 이와는 다른 토속적인 서정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이것은 섬이라는 배경 설정과 머리에 바구니를 이고 가는 소녀에서 느껴지는 전근대적인 주제, 그리고 제목이 시사하는 종달새가 지저귀는 평화로운 섬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근대적인 양식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적 시도에서도 자연에 대한 서정적 반응이 김환기 작품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잉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138쪽)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공부한 화가들이 동시대에 절정을 이룬 모더니즘 미술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어쩌면 서양미술의 기본에 더 충실하고자 했을 수도 있고, 배운성이나 임용련의 경우 둘 다 1930년대의 사실주의 화풍을 구사한 화가들에게 배웠던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고 보인다. 이것은 한편 이들이 당시 추상미술과 재료 실험이 한창이던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의 현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158쪽)
향토색이 과연 독자적인 정체성이나 한국의 정서를 보여 주는 민족주의의 발현인지, 아니면 일본이 기대하는 식민지의 이국성을 보여 주고자 했는지, 또는 이국성을 단지 제국주의적 욕망으로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당시뿐 아니라 해방 이후의 미술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평론가 이경성은 잃어버린 고향 의식을 되살려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심성의 표시로 보았고, 오광수는 “생활 감정이나 양식의 일본화를 막아 준 하나의 구실로 평가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진취적인 창작 활동을 통한 자유주의의 고취, 정신적인 해방감을 통한 민족주의의 고양을 억제하는, 일종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라고 지적했다. (178쪽)
해방 후 8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은 아직 분단국가로 남아 있고, 그동안 남쪽과 북쪽의 미술 활동은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남쪽에 있는 미술가들은 해방 후 신설된 미술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새로운 세대를 양성하거나, 더 큰 세계에서 공부하기 위해 유럽이나 미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주장이 견고해지면서 채색화는 일본색에 오염되었다고 배척당했고 전통 수묵화가 부각되었다. 무엇이 한국적인 것인가에 대한 집착은 식민지를 겪은 후에 나타나는 증후로도 보이는데 이후 현대미술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214쪽)
관련 자료
코멘터리는 책의 한 면에서 출발하는 저작자와의 대화입니다. 저술의 배경과 맥락, 담지 못한 내용, 출간 후기 등 책을 둘러싼 이야기를 나눕니다.
대화: 김영나, 박활성
2024년 1월 29일
🔗저자와의 대화로 살펴본 김영나 저, 『한국의 미술들: 개항에서 해방까지』↗︎
대담
김영나(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권행가(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작성: 권행가
2024년 7월 2일
1부 근대미술의 서막
새로운 시각 미술
전통 회화에서 근대 회화로
서양미술의 간접적인 수용
전시의 시작: 공진회, 박람회, 박물관
2부 서화에서 미술로
서화에서 미술로
전시와 관람객
새로운 화단의 성립
조선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
3부 근대성과 모더니즘 미술의 탐구
도시와 근대성
모더니즘 미술의 시도
유럽과 미국으로 간 화가들
사진과 건축
미술 시장과 미술품 수집
4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회색 지대
한국미술의 정체성 모색
전시 체제하에서의 미술
해방 전후의 미술
저자 소개
김영나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뮬렌버그 대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덕성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도쿄대학과 하버드 대학교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서양미술사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교육연구회,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서울대학교박물관 관장을 역임하는 한편,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을 이끌며 연구, 전시, 교육 분야에서 박물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저서로 『조형과 시대정신』, 『서양현대미술의 기원』, 『20세기의 한국미술』,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 『Twentieth Century Korean Art』, 『Modern and Contemporary Art in Korea: Tradition, Modernity and Identity』, 『韓國近代美術の100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