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scene)에서 벗어나(ob-) 삶과 예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를 제안하는 저널 『옵.신』 10호는 “주체 소거의 가능성”, 즉 주체와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의심하고 주체성의 원환에 발생하는 균열의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주체성 혹은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다양한 의미의 ‘경계’에 대해 성찰하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모은다. 이로써 『옵.신』 10호는 도록도, 비평서도, 학술서도 아닌, 예술 실천의 가능성을 발생시키는 “무대의 연장”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주체라는 범주에 대한 탐구는 20세기 후반 큰 성취를 이루었다. 이제 우리는 주체성이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라기보다 수행되는 것임을 안다. 동시에 주체성의 수행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점도 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와 맞춤형 알고리즘으로 특징지어지는 동시대 사회에서 ‘나’는 자신의 수행을 넘어선 미지의 방식으로 형성되기도 하며, ‘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는 누군가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상품화, 도구화되기도 한다.
『옵.신』 10호를 공동 기획한 마텐 스팽베르크는 이런 ‘새로운’ 상황 속 예술적 생산과 수용의 문제를 사유하기를 제안한다. 이제 예술 생산과 수용은 주체성을 ‘충족’시키는 자유와 유희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윤곽에 생긴 구멍으로 침투하거나 그 윤곽이 잠시 지워진 사이에 불확실한 변화를 생산하는 문제인 것이다.
『옵.신』 10호에서는 주체와 예술의 관계를 묻는 다양한 사상가와 예술가 들의 성찰적 에세이와 이미지를 소개 글과 함께 엮었다. 이 작업물들은 “주체가 소각되면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텅 빈 자리처럼 주체 파기의 필요성과 필연을”(서현석) 이야기한다. 예술에서 판단이란 무엇일까?(알렉산더 가르시아 뒤트만) 강렬한 경험을 권하는 사회에서 강렬함은 무엇일까?(트리스탕 가르시아) ‘공간’에는 경계가 있을까?(베르너 하마허) 하지만 이를 통해 그려지는 “중심의 윤곽은 공백에 가까울지 모른다”(서현석). 그럼에도 『옵.신』 10호에 실린 단상들과 파편적 이미지가 제공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주체가 주체임을 포기할 때, 이 포기의 몸짓이 “버리는 행위의 주체까지 아우르는 상위 인식으로서의 파괴력”(서현석)을 갖는다는 점일 것이다.
발췌
『옵.신』 10호의 출발점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주체 소거의 가능성, 말하자면 개별 존재—그것이 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 무생물이든 간에—를 그 존재로 유지시키는 무언가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다. (마텐 스팽베르크, 「기획자의 말」, 3쪽)
질문과 통찰의 용광로 속에서 그가 기회가 될 때마다 곱씹는 하나의 일관된 지향점은 ‘주체를 폐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창작자로서 그가 실천하는 기본적인 태도로 전제되기도 하고, 저항과 변화의 전략을 예리하게 보듬을 때마다 결정적인 조건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토론의 큰 주제로 부각되지는 않더라도 모든 교류의 결정적 유전자로서, 생각과 태도의 타협 없는 토대로서, 말 사이와 행동의 궤적을 은은하고도 강력한 오라(aura)처럼 맴돌곤 했다. 그리고 이는 열 번째 『옵.신』의 출발점이 되었다. (서현석, 「기획자의 말」, 4쪽)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른다. 천은 그들의 몸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그들은 어떤 상황인지, 몇 명인지, 어디에 있는 건지, 누구인지 궁금해한다. 그들은 덮여 있고 관을 통해 호흡한다. 천 밑에 있는 것이 인간인지 자동화 기계인지, 수가 여럿인지 0인지, 움직임은 내부에서 나오는지 다른 곳에서 통제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덥다. 그들은 불확실성에, 답을 내지 못하고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에 직면한다. 그들은 불가능한 자세로 움직이지 않으며, 산소 부족으로 의식 변형이 유발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포기한다. (마리아 헤레스, 「안 밖」, 19쪽)
내가 보기에, 20세기로부터 물려받은 두 종류의 열정이 있는 것 같다. 소속(belonging)에 대한 열정과 강렬함 (intensity)에 대한 열정이다. 소속에 대한 열정은 전체의 부분이 되고 싶거나 혹은 되고 싶지 않은 것에 관한 것으로, 자기동일성/정체성 (identity)을 확보하고, 가족, 정당, 계급, 국가 등 공동체에 관여하고, 전체를 위해 극복이나 승화의 형태로 개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크고 정도가 더 강한 무언가에 속함으로써 그 무언가가 되고 싶은 거다. 소속을 통한 자기동일성/정체성을 갖고자 하는 이런 간절한 욕망은 대부분 또 다른 형태의 열정, 그러니까 강렬한 어떤 것이 되거나 강렬한 어떤 것을 느끼고 싶은 열망과 결합된다. (트리스탕 가르시아, 「마텐을 위한 첫 단상」, 35쪽)
공간에 경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 경계는 공간 안에, 혹은 공간에 접하여 그려질 것이며, 이에 따라 공간은 경계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 경계는 다시 공간을 가로질러야 하는 등등, 이런 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공간은 경계를 갖지 않으며—만약 갖는다면 그 경계는 비공간에 접하여 공간을 결정짓고 그것을 비공간으로서 결정짓는 즉각적인(a limine) 것이 될 것이다—경계가 그려지도록 허용한다. (베르너 하마허, 「항아리(발췌)」, 72쪽)
예술 작품에 관한 미적 판단과 “창조 행위”에 달린 미적 판단은 둘 다 스스로를 반복되어야만 하는 행위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의 차원을 갖는다. 예술 작품에 관한 미적 판단에 있어서는, 예술에서 머뭇거림이 예술을 예술로 인식하면서 방해를 받을지라도, 아름다운 것에 대한 묵상이 그 현현 앞에서 머뭇거리려고 하지 않거나 머뭇거림이 이런 묵상에 새겨져 있는 경우이다. (알렉산더 가르시아 뒤트만, 「예술에서의 판단하기」, 129–130쪽)
공모는 질료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의 전환을 나타낸다. 질료를 실험할 때의 대담함과 모험심은 작품의 폐쇄성에 대한 엄밀한 접근으로 대체되며, 이는 곧 우발성의 생각과의 공모자가 되고 한계 너머로 작품을 개방하는 우발적인 질료들의 음모를 폭로하는 방법이다. 이는 작품을 이해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환을 나타내는 예술적 전환이다. (레자 네가레스타니, 「우발성과 공모」, 191쪽)
기획자의 말 — 마텐 스팽베르크
기획자의 말 — 서현석
안나 페르손: 신체 드로잉
마리아 헤레스: 사물들의 생태학
안 밖 — 마리아 헤레스
트리스탕 가르시아: 끝이 없는 강도들
마텐을 위한 첫 단상 — 트리스탕 가르시아
토르 린드스트란드: 악의를 고집하기
루테 메르크: 연막과 테네브리즘
베르너 하마허: 뒤집히고 또 뒤집힌 항아리
항아리(발췌) — 베르너 하마허
알레한드라 폼보 수: 전략적인 우회
메테 에드바르센: 의미의 모호성
페넬로페는 잠잔다 — 메테 에드바르센
이경후: 번역가의 과제 2
알렉산더 가르시아 뒤트만: 경험의 경험
예술에서의 판단하기 — 알렉산더 가르시아 뒤트만
안 쥐랭: 환상의 해부학
환상의 해부학 수업 #1. 혀에 관한 강의 —안 쥐랭
루카 츠베트코비치: 우연 속에 길을 잃은 키스
어느 것이든 — 루카 츠베트코비치
클라라 아마랄: 책다움 연기하기
거꾸로 적힌 춤으로서의 텍스트 — 클라라 아마랄
제니퍼 이벳 테럴: 전적으로 다른 이미지 체제
마텐 스팽베르크: 확장된 생태학
단상들 — 마텐 스팽베르크
레자 네가레스타니: 무한성과 친구 되기
우발성과 공모 — 레자 네가레스타니
참여자 소개
김성희
다원예술 축제 페스티벌 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옵/신 페스티벌 등의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미래 예술』(2016년)을 공동으로 썼으며 『불가능한 춤』(2020년),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2023년)을 기획, 편집했다.
김신우
페스티벌 봄, 부산국제 영화제, 국립아시아 문화전당 예술극장,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젝트에서 일했으며 옵/신 페스티벌 총괄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현재 독일 기센대학교 응용연극학연구소의 ‘안무와 퍼포먼스’ 박사과정 중이다.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이란의 철학자.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고, 주로 지능의 철학과 현대 지식 체계의 진화에 관심을 둔다. 비영리 교육기관인 신(新) 연구실천센터(New Centre for Research & Practice)에서 비판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루카 츠베트코비치(Luka Cvetkovic)
세르비아 벨그라드에서 활동 중인 창작자. 제네바의 예술디자인학교 (HEAD)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비디오, 텍스트, 퍼포먼스, 설치 등의 작업을 통해 권력, 경계, 잠재성 등의 주제를 탐색하고 있다.
루테 메르크(Rūtė Merk)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리투아니아의 화가. 아카데미 회화 전통을 적용하여 매개화된 세계의 물적 재현에 발생하는 결함들이나 인지 자본주의 조건 아래의 정체성 통합을 모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마리아 헤레스(María Jerez)
마드리드에서 활동 중인 창작자. 퍼포먼스, 영화, 시각 매체에 걸쳐 현존의 역학,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이미지 제작을 연결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다.
마텐 스팽베르크(Mårten Spångberg)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창작자, 작가, 큐레이터. 안무에 기반을 두는 그의 작업은 미학적, 비평적 연구를 횡단하며, 생태학과 기후 변화의 문제 등을 다루기도 한다.
메테 에드바르센(Mette Edvardsen)
브뤼셀에서 활동 중인 노르웨이의 안무가, 무용수, 미술가. 2002년부터 자신의 안무 작업을 선보여 왔고, 「오후의 햇살 아래 시간이 잠들었네」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현재 오슬로 국립예술 아카데미에서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베르너 하마허(Werner Hamacher)
독일의 문학평론가. 1998년부터 2013년까지 프랑크푸르트대학교의 일반 문학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칸트와 헤겔의 철학에 대한 문학의 응대를 연구했다.
서현석
‘작품’의 경계를 질문하는 창작 형식을 실험하며, 『미래 예술』(2016년)을 공동으로 썼다.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화를 가르친다.
아르민 호크미(Armin Hokmi)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란 안무가. 형식적 전형의 호환성과 서구 미학 고전의 군림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이슬람 이전의 신화에 매료되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시라즈’는 형식과 내용, 그리고 정치적 맥락 사이의 관계를 교란한다.
안 쥐랭(Anne Juren)
빈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의 안무가, 연구자이자 펠든크라이스 요법 수행자. 안무의 개념을 확장하고 사적 행위와 공적 행위의 경계를 교란하는 작업을 통해, 신체 및 감각 체계, 근감각과 에로티시즘을 탐구하고 있다.
안나 페르손(Anna Perhsson)
스웨덴의 무용수. 무용, 안무, 시각예술의 접점에서 작업한다. 신체 창작에서 출발해 드로잉을 넘나들면서 이미지의 존재론과 움직임의 순간성을 탐색하고 있다.
알레한드라 폼보 수(Alejandra Pombo Su)
스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서 활동 중인 창작자. 동시대 미술에서 퍼포먼스를 수용함에 있어서의 역설에 관한 논문으로 미술 박사 학위를 받았고, 조형예술, 시청각예술, 퍼포먼스를 오가며 창작하고 있다.
알렉산더 가르시아 뒤트만(Alexander García Düttmann)
독일의 철학자. 프랑스에서 자크 데리다에게 수학했고, 예술 체험에 관한 해체주의적 연구를 진행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의 미학 및 예술 이론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경후(Kathy Lee)
서울에서 활동 중인 번역가이자 창작자. 뮤지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글쓰기, 무용, 사진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제니퍼 이벳 테럴(Jennifer Yvette Terrell)
학자, 창작자. 엘파소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아프리카의 정치, 페미니즘, 퀴어, 탈식민주의 등의 주제에 관해 연구했다.
클라라 아마랄(Clara Amaral)
암스테르담에서 활동 중인 포르투갈의 창작자. 주로 텍스트와 퍼포먼스로 작업하며, 글쓰기가 지닌 퍼포먼스적 성격과 새로운 출판의 형식 등을 탐구한다. 오브제, 퍼포먼스, 아카이브, 기억의 공간 등으로서 책을 만들고 있다.
토르 린드스트란드(Tor Lindstrand)
스톡홀름에서 활동 중인 스웨덴의 건축가이자 창작자. 라르손 린드스트란드 팜 건축사무소를 공동 운영 중이며, 콘스트파크 미술공예 디자인대학교에서 공간 디자인 석사과정의 학장을 맡고 있다.
트리스탕 가르시아(Tristan Garcia)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장물랭 리옹3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 『형식과 대상: 사물에 관한 논고』(Forme et objet. Un traité des choses, 2011년) 등이 있다.
호영(Hoyoung)
한국어와 영어를 오가며 번역하고 글을 쓴다. 책 『남은 인생은요?』(성 지음), 『You Have Reached the End of the Future』(황인찬 지음)와 앨범 『신의 놀이』(이랑)의 가사 등을 번역했고, 산문집 『전부 취소』를 썼다. 웹사이트 hoyoung.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