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플레이
패러슈트
EMI 레코드
2000년
대학생이 되면서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동 휠체어를 타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 나는 한 번도 혼자서 이동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 수동 휠체어를 밀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전동 휠체어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와 전동 휠체어라는 이동 수단이 합쳐지면서 내 삶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혼자 학교에 가고, 혼자 공원을 산책하고, 혼자 쇼핑을 하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 꿈만 같았다.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좋았던 것들 중 하나는 물건을 ‘직접’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게 안에서 상품을 직접 구경하고, 그중 하나를 직접 집어 들고, 카운터에 가서 직접 계산할 수 있었다. 나는 종종 친구들에게 특별한 이유 없이 선물을 주곤 했다. 선물을 사러 외출하는 것도 좋았고 선물을 받고 깜짝 놀라는 친구들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구경하고 집어 들고 계산하는 일련의 행위가 즐거웠다. 주로 책과 음반—그리고 가끔은 양말—을 선물했는데 백 퍼센트 내 취향이 반영된 것들이었다. 책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음반은 항상 콜드플레이의 1집 『패러슈트』(Parachutes)였다.
콜드플레이를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두 번째 트랙 「떨림」(Shiver)을 들었는데 조금씩 선명해지다가 일순간 터지는 기타 리프를 듣자마자 단박에 반하고 말았다. 단연 콜드플레이의 대표곡인 「옐로」(Yellow)는 말할 것도 없고, 어쿠스틱 기타가 한층 쓸쓸해지는 「불꽃」(Sparks), 피아노 사운드로 깊이감을 더하는 「트러블」(Trouble), 심플한 기타 사운드가 돋보이는 「사라지는 건 없어」(Everything’s Not Lost) 등 트랙 하나하나가 다 좋았다.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어딘가 우중충한 분위기에 취해 매일 밤 『패러슈트』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CD로 음악을 듣는 친구는 주변에 없었지만 나는 가끔 학교 근처의 레코드 가게에서 『패러슈트』를 샀다. ‘레몬뮤직샵’은 지하철역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음반 가게였다. 휠체어로 출입문을 살짝 밀면 양쪽 벽면이 음반으로 빼곡한, 조명이 조금 어두운 가게 안에서 “어서 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게도 폭이 좁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콜드플레이 1집 있어요?” 하고 물으면 잠시 후 사장님이 음반을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이따금 밀거래라도 하듯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다소 은밀하게 돈과 음반을 주고받았다.
레몬뮤직샵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고, 그때 『패러슈트』를 누구누구에게 선물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1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두 번 이사를 하고, 5년 뒤에 퇴사를 하고, 지금은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어느덧 삼십 대 중반이 되었다. 당연히 대학 생활을 함께했던 수많은 것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이제는 없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콜드플레이의 앨범이 『패러슈트』라는 사실만은 여전하다.
1991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근육병 진단을 받았다. 서울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휠체어 위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휠체어에서 듣는 음악』을 썼다. 서울에 살고 있다. 첼시FC의 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