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는 죽음과 재탄생 사이의 기간과 과정을 가리키는 티베트어로, 삶과 죽음을 모두 거친 다음 도달하게 되는 상태다. 위도 아래도 없고 왼쪽도 오른쪽도 없는, 사후 49일간의 중간 지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대표하는 대사(“To be, or not to be”)를 제목으로 차용한 앙투안 볼로딘의 소설 『바르도 오어 낫 바르도』는 죽음과 삶 사이의 유예된 시간과 공간을 그곳을 통과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펼쳐 나간다.
앙투안 볼로딘은 여러 작품에서 바르도라는 중간계 개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 왔다. 49개 장(章)으로 이루어지며 ‘검은 공간’이 언급되기도 하는 『미미한 천사들』, 죽은 아내의 기억에 시달리며 현실과 꿈,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한 채 이 세상과 저세상을 오가는 『메블리도의 꿈』, ‘찬란한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해 뒤틀린 영웅 솔로비예이의 끝나지 않는 꿈속 숲을 지나야 하는 피조물들의 여정이 그려진 『찬란한 종착역』, 바르도에서 방황하는 이의 목소리가 담긴 『작가들』. 이 책 『바르도 오어 낫 바르도』는 그동안 볼로딘의 인물들이 여행해 온 바르도라는 상태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며, 이 과정을 통해 소설이라는 상태를 질문한다.
사이에서 떠다니기
“저희는 현재 바르도에 있습니다. 바르도는 무엇일까요…? 터무니없는 표현을 쓰지 않고 바르도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비전문가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인 만큼, 제가 한번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바르도란, 이를테면 삶 이전과 죽음 이후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사망한 남자와 여자가 깨어나는, 떠다니는 어떤 상태입니다. 어떤 상태 혹은 어떤 세계죠. 떠다니는.”(45쪽)
『바르도 오어 낫 바르도』에서, 한 인물이 죽은 후의 과정은 이러하다. 죽음을 맞은 이후, 영혼은 열반하거나 환생하기 전까지 49일간 바르도를 방황하며 각종 환상과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이 바르도를 건너는 여정을 돕고자 누군가가 죽은 사람의 귓가에 책을 읽어 준다. 이 책이 『바르도 퇴돌』 내지 『죽은 자들의 책』이다.
처음 바르도의 문턱에 서는 자는 혁명적 공산주의자이자 급진적 평등주의자인 코민포름이다. 회개한 테러리스트의 총에 맞아 죽어 가는 그를, 늙은 수도승 드룸보그가 앞선 방식으로 도우려 한다. 그러나 코민포름이 숨을 거두기 전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려는 스트로부쉬가 급한 마음에 서고에서 요리책과 초현실주의 선집을 꺼내온다. 어쨌든 이들은 죽어 가는 이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멈춘 이후에도, 계속해서 책을 읽고 말을 한다. ‘투명한 빛’을 향해 가야만 다시 태어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음을 주입하는 목소리와, 그와 무관한 책을 무작위로 펼쳐 읽는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겹친다. 주술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말의 거듭됨은 무언가를 읽고 쓰고 말하는 행위 자체를 주목하게 한다. 뒤이은 장(章)들에서도 이어지고 늘어지는 이러한 반복의 과정 속에서 말과 글의 지속이 말과 글의 내용을 초과해 간다. 즉 말과 글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그러한 행위를 지속하는 자체가 의미 있어지고 필요해진다. 이러한 관점은 볼로딘의 “서사적 웅얼거림”(71쪽)이 지속되는 근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완전히 잘못된 세부 사항마저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사람을 항상 안심시켜”(71쪽) 주는 효용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소설의, 나아가 문학의 특정한 용도 중 하나일 수 있으며, 행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소설이라는 상태 자체로 존재할 수는 있다. 즉 바르도가 “떠다니는 어떤 상태”(45쪽)이듯이 소설 역시 그러하다.
이 책을 먼저 읽은 소설가 양선형은 이러한 바르도라는 ‘사이’의 상태를 소설이라는 픽션의 핵심으로 본다. “픽션은 무(無)와 현실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에 없음도 있음도 아니고,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기이한 존재들의 대피소를 마련하는 일이다.”(양선형, 「추천의 글」) 바르도에 다다른 볼로딘의 인물들은 번번이 미끄러지고 계속해서 어긋나 온 이들이다. 혁명에 실패한 자. 자신이 죽었음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잠들어 버린 끝에 원숭이의 자궁으로 들어가게 된 병사. 주어진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는 조직원. 관객 없이 모든 배역을 홀로 연기하며 새들의 배설을 감내하는 광적인 극작가.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려다 감금된 자. 바르도에서의 존재가 마음에 든 나머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제게 주어지는 조언을 듣지 않고자 하는 죽은 자. 아무도 웃게 하지 못하는 광대. 신비주의자의 세계에 광인, 실패한 혁명가, 어리석은 자, 반(半)인간의 세계가 겹쳐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한편 역시 이 책을 앞서 읽은 소설가 구병모는 부조리와 유머를 통과하며 “혼수상태의 난장”으로 향해 가는 이 소설이 “경계를 잃거나 앓는”다고 말한다(구병모, 「추천의 글」). 바르도의, 소설의 ‘사이’라는 상태는 이렇게 소실과 통증을 통해 역으로 확장되면서 읽는 이를 감염시켜 간다.
추천의 글
장시간의 귀가 열차에서 처음 소설을 펼쳤을 때는, 사실 읽다가 한숨 잘 셈이었다. 전날 밤을 거의 새운 데다 (밤을 새운 게 맞을까? 밤을 새웠다는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잠은 어쨌든 짧은 죽음이니까,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바르도를 배회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읽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행위는 없을 것 같아서, 어쩌면 그 일시적이고도 반복적인 죽음 한가운데로 책 속의 말들이 꿈의 조각보를 기워다가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라는 계획은 책 속에서 『우아한 시체』와 『죽은 동물 조리법』이 등장하는 순간 폐기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인물들이 그 책들을 다급하게 낭독하는 혼돈과 광기의 장면에서 나는 실성한 것처럼 소리 죽여 웃었고 누가 봤다면 수상쩍게 여겼을 테지만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되었다. 물론 베케트식의 부조리와 유머만이 폭발하는 작품은 아니다. 현실과 몽상, 지상과 우주, 삶과 죽음이 경계를 잃거나 앓는 기이한 세계에 접속한 독자는 착각의 거푸집에 부어진 환각의 수렁에 빠지며,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차원을 인물들과 함께 부유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비틀거리며 나아간 끝에 투명한 빛을 만나 마침내 공성(空性)을 깨달을 것인가, 망집(妄執)에 머무를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이 소설을 펼친다면, 더욱 혼수상태의 난장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일단 한잔해, 바르도의 바에서.
— 구병모(소설가)
포스트엑조틱한 크리처들이 바르도를 방황한다. 실패한 혁명가, 미친 극작가, 임무를 모르는 조직원, 망명자들과 죄수, 기죽은 광대… 바르도는 열반과 환생이라는 두 기로 사이에 놓인 경계 구역이다. 죽음이 미뤄지며, 살아 있다고도 소멸했다고도 말할 수도 없는 이상하고 모호한 장소. 초월의 가능성과 부활의 가능성 둘 다가 유예되거나 부인되고, 어쩌면 두 가능성 모두에게서 버려진 어긋난 시공. 픽션은 무(無)와 현실 사이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에 없음도 있음도 아니고, 사라짐과 나타남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기이한 존재들의 대피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볼로딘의 소설은 잔존하는 헛것들을 위해 온갖 실험적인 형식과 신비한 장르적 환상, 기상천외하고 경이로운 수법을 차용하고 동원하는 교잡된 우주이며, 파편과 노이즈로 존속하는 역사의 폐기물들이 모여들어 속닥거리는 비틀린 중간계를 창조한다. 붓다도 인간도 되지 못할 가망 없는 유령들이 한담을 주고받는 저세상. 해괴한 고독과 뻔뻔한 희망, 목마른 기다림. 나는 꿈꾸는 송전탑처럼 저세상을 향해 귀를 기울인다. 내가 있(을 수도 있)었던 낯설고 오래된 장소가 거기 있었으니, 나는 죽었는지도, 단지 내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양선형(소설가)
발췌
“그건 안내서요. 환생할 때까지 바르도에서 미련하게 계속해서 걸으면, 죽은 사람이 죽음의 세계를 건널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혹은 죽은 사람이 충분히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해탈해서 붓다가 될 수 있게, 죽은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죽은 사람의 곁에서 그걸 우리가 읽어 주는 거라오.” (19쪽)
“주의해서 내 말을 들어 봐, 코민포름. 자네에게 들리는 것에만 집중해. 잠들면 안 돼…. 우아한 시체는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리라. 늙은이가 아무리 말해 봤자, 나는 확신할 수가 없어, 이런 문장이…. 어쨌든, 자네는 내가 자네 귀에 대고 지금 읽어 주는 것만 곰곰이 생각해, 코민포름…. 눈물을 참으면서 한가운데 있던 포동포동한 곰이 금붕어 무리를 눈부시게 했다…. 하나만 남았어도, 출장 나온 외판 직원은 정신 나간 계란을 밤을 새워 감시하리라…. 이봐, 코민포름, 용기를 내라고, 정신 잃지 마…! 머나먼 흉물이 세계의 북극에서 우리의 진짜 송곳니를 오랫동안 갈색으로 물들였다. 우리를 떠나지 마, 코민포름…! 내 말 들려…?” (30~31쪽)
구리 나팔. 산 사이로 골짜기 하나가 패어 있을 때, 바위와 가파른 단층, 마른 풀의 풍경이 펼쳐질 때, 구리 나팔은 골짜기를 가로질러, 엄청나게 먼 곳까지 아주 중후한 음을 보낼 수 있다. 처음 우리가 듣게 되는 게 바로 이것이다. 라마교도, 티베트인의 나팔. 여기서 책이 시작된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지만, 우리는 즉각,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이 소리를 받아들인다. 그 즉시 우리는 이 소리의 진동이 평범한 삶과 죽음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그 즉시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게 된다. 이 진동은 세상의 사물과 몸의 뼈, 살과 이미지, 심지어 몸의 주름 속에 남아 있는 단어까지 잠식하고, 진정시켜 준다. 이것이 바로 처음의 음향 효과, 최초의 음향 효과와 비슷한 무엇이다. 그 후에 집단적인 웅얼거림이 태어난다. 이 웅얼거림은, 마치 우리가 쓸모없는 일화나 이야기보다 긴 기도에 더 관심이 있는 어느 모임에 자리를 잡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까운 곳으로 퍼져 나간다. 이 목소리는 해독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언어가 아닐지도 모르는 어떤 언어로 진행되는 의식이다. 어쨌든, 우리는 여전히 이 언어를 우리의 언어보다 더 잘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런 다음 침묵이 찾아온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된다. 가령 나팔이 요란하게 울리고, 목소리가 우리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어떤 연설과 뒤섞이고, 그런 다음 침묵이 찾아온다.
아름답다. (39쪽)
“그는 자신이 죽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6쪽)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항상 말하는 게 유익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종종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나는 그걸 말한다.
“머저리 같은 삶,” 나는 말한다.
잠시 멈춤. 먼 곳의 나팔 소리.
징 소리. 침묵.
징 소리.
(48쪽)
나는 어떤 기차에 오른 채였고, 이건 거기서 일어난 일이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여행을 하고 있던 건 아니다. 여행 중에 완수해야 할 임무가 내게 맡겨진 거였다. 유쾌하지는 않은 임무였는데, 어떤 남자를, 나처럼, 다시 말해, 십중팔구 실수로, 48년 전에 그가 빠져나왔던 무(無) 안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나이가 같고, 암튼 그 운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비교될 만한 누군가를 제거해야 한다는 일이 내게는 항상 조금 역겹다. (71쪽)
1342년 여름이 지속되는 동안, 작가이자 배우인 보그단 슐룸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움을 받지도 않고, 세 차례나 죽음 이후의 바르도를 지나쳐 갔다. 그가 『바르도 퇴돌』을 낭독하는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런 다음에 그는 그것을 중얼거렸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입술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척,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 척했다. 이렇게 세 번이나 그는 임종의 고통과 현실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바르도의 좁은 통로 앞, 검은 공간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 그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몇 차례의 트랜스 상태에서, 그는 산 자처럼 말하기도 하고, 죽은 자처럼 듣고 자신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미 노랗게 시든, 주로 자작나무 잎이었던, 나뭇잎이 땅에 떨어져 있던 몇 제곱미터로 자신이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을 제한하면서, 그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대기 상태는 조악한 면이 있어, 그가 순조롭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다. 땅은 젖어 있었고 비가 내렸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찌르레기가 슐룸 위의 나뭇가지에 몰려들어 슐룸에게 배설물을 쏟아 내면서도 시끄럽게 재잘거리거나, 아니면 까치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울어 댔다. 자연은 결코 슐룸에게 순순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운에 굴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역경과 배설물을 대수롭지 않은 척 무시했고, 이런 종류의 상황에 대해 전문가들이 권고하는 대로, 연민과 유머를 가지고 행동했다. 그는 먼저 자신의 텍스트에, 그리고 자신의 등장인물에 더 잘 몰입할 수 있도록 완성해야 했던 동작과 표정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때때로, 그는 눈을 떴다, 작가의 눈을, 그런 다음 다시 눈을 감곤 했다. 그의 고독은 엄청나서 그를 지치게 했다. 그의 주변, 나무 아래에는, 그에게 박수를 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화요일이 되었고, 그다음에는 수요일, 그다음에는 목요일이 되었다. (91쪽)
“광대가 아무도 웃게 하지 못하면, 그 고통으로 미쳐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대에 오릅니다, 화려한 조명이 당신의 눈이 멀게 하고, 기온은 얼음처럼 차가우며, 서커스장은 늙은 야수의 악취로 가득하고, 모래에서는 오줌 냄새가 올라오며, 우리는, 마치 극단적으로 혼자라도 된 듯, 그래도 기어코, 램프 때문에 겨우 보일까 말까 한 그 어둠 속에서, 객석에서 누군가가 이제 곧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리라는 희망을 갖고서, 목청을 높이고, 분투하면서, 무대에 섭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움찔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웃음을 터뜨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그런 건 참기 어렵습니다. 이게 미치게 만듭니다. 그렇게 몇 년을, 매일 저녁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오지 않는 웃음을 기다리면서요.” (189~190쪽)
야사르가 가서 다시 라디오를 켠다. 다시 한국음악 프로그램을 찾아낸다. 아는 사람에게, 그것은 지금, 대중적인 오보에, 향피리, 모래시계 모양의 드럼, 장구, 실린더 모양의 드럼, 북, 그리고 피리로 반주를 하는 전통 무용이며, 모르는 사람에게는, 리듬감이 있어서, 아름다워서, 그리고 우리가 극도로 외롭기에, 몇 시간이고 계속 듣고 싶을, 어떤 음악일 뿐이다. (191쪽)
I. 바르도 직전 최후의 명예로운 저항
II. 글루첸코
III. 슐룸
IV. 메두사의 바르도
V. 퍼프키
VI. 다도키안
VII. 바르도의 바에서
작품 목록
저역자 소개
지은이
앙투안 볼로딘(Antoine Volodine)
1950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번역했으며,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40여 편에 이르는 소설을 통해 문학적 평행 우주 ‘포스트엑조티시즘’을 구현했다. 『미미한 천사들』(1999)로 베플레르상과 리브르 앵테르상을, 『찬란한 종착역』(2014)으로 메디시스상을 받았다.
옮긴이
조재룡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시학과 번역학, 프랑스 문학과 한국문학에 관한 논문과 평론을 집필한다. 시와사상문학상과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앙리 메쇼닉과 현대비평: 시학, 번역, 주체』 『번역의 유령들』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번역하는 문장들』 『시집』 등이, 역서로 앙리 메쇼닉의 『시학을 위하여 1』, 제라르 데송의 『시학 입문』, 장 주네의 『사형을 언도받은 자 / 외줄타기 곡예사』, 레몽 크노의 『떡갈나무와 개』 『문체 연습』,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 『어렴풋한 부티크』, 알로이시위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렘브란트와 칼로 풍의 환상곡』, 앙투안 볼로딘의 『작가들』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