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허물어지는 세상에 맞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 아마존 정글의 한 부족의 이야기다.
종말의 전문가들
브라질 서부 혼도니아주에 거주하는 카리푸나족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원주민 공동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제주도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숲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파괴적인 산림 벌채부터 끈질긴 토지 강탈, 보이지 않는 살해 위협까지 험난함으로 가득하다. 이 책은 작가이자 인류학 연구자, 기후 활동가인 김한민이 그들과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얻은 성찰이자 시행착오의 기록이다.
16세기 포르투갈 식민지 개척자들이 현재 브라질 동부 해안에 발을 딛은 이래, 아마존 원주민들의 세상은 종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특히 20세기 초 고무 산업이 붐을 이루며 외부인의 침입이 본격화했고, 1970년대에는 브라질 정부가 원주민 통합 정책을 펼친 결과 원주민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카리푸나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외부인과 함께 찾아온 전염병이었다. 1976년 브라질 정부가 대규모 탐사대를 파견하기 시작한 지 7년 후인 1983년, 살아남은 카리푸나족은 단 여덟 명뿐이었다. “세상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면, 원주민들에게 물어보라. 그게 어떤 것인지 그들은 알기 때문”이라는 인류학자인 비베이루스 지카스트루의 말처럼, 그들은 종말의 전문가다.
세상의 끝
확실히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감각을 느끼고 있다. 지구온난화, 빙하 소멸, 해양 산성화, 6차 대멸종… 새삼스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정보는 넘쳐난다.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진지하게 대하는 대신, 쉽고 빠르게 소비하는 쪽을 택한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가 손가락 한 번 튕기면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이 위기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규모와 무게에 압도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찌해 볼 생각도 못 하고 제 발등을 찍는 결과가 닥치더라도 경고를 외면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종말의 전문가들이 있다. “500년 이상 세계의 종말을 경험한 전문가들, 아마존 원주민에게 우리가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걱정은 우리가 해야 한다. 원주민 사상가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간결한 말처럼 말이다. ‘우리 인디언들은 500년 동안 저항해 왔습니다. 제 걱정은 백인들도 저항할 수 있을지입니다.’”
이파지 세계로서 숲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이파지’(ipaji)라는 단어가 있다. ‘샤먼의 힘을 가진’ 혹은 ‘(샤먼) 주인을 가진’이란 뜻의 형용사로, 때로는 동사나 명사로도 사용된다. 샤먼이 되기 위해서는 고된 훈련과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만,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는 샤먼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즉, 약간 ‘이파지’일 수 있다. 비인간 동물 역시 마찬가지다. 강력한 힘을 가진 재규어는 물론 작은 존재들도 다양한 이유로 이파지일 수 있다. “예컨대 쿠라소우는 보통은 사냥하기 쉬운 새이지만 때로는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쏴도 총알이 피해 갈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마법이 걸린 동물, 즉 이파지이기 때문에 죽이면 안 된다.” 카리푸나족에게 숲은 이파지로 가득한 곳이다.
이 책의 목적은 뚜렷하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반드시 지금 이 모습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혹은 사회학자 존 로가 제안한 ‘단일 세계’(one-world world)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일화들은 어려운 이론 대신, 원주민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모습을 잘 관찰하기만 해도, 지금의 세계를 허무는 법을 배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파지로 가득한 세계, 카리푸나족이 지키는 숲의 존재들이 내뿜는 무수한 신호에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언월딩의 시작이다.
세계를 짓기 위한 세계 허물기
세계-짓기(worlding)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라면, 언월딩(unworlding)은 이를 거스른다. 그러나 언월딩은 세계-안-짓기(not worlding)와 다르다. 특정 세계를 만드는 데 불참하고 거리를 두는 무(無)행동도 포함하지만, 동시에 적극적인 행위가 수반되기도 한다. 즉, 이미 구축된 세계를 해체하거나, 취소하거나, 되돌리거나, 뒤집거나, 무너뜨리거나, 분해하는 행동도 아우른다. 언월딩은 세계를 원점에서 재고하고, ‘현실은 지금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 언월딩을 모르는 사람은, 지어진 세계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세계를 허물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없다. 세계-짓기는 세계-허물기에 달려 있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열악한 환경으로 현지에서 악명 높은 주앙 파울루 병원에서 수술을 기다리는 아리파 할아버지를 간병하며 하룻밤을 보낸다. 그곳에서 아리파 할아버지가 들려준 놀라운 이야기는 서서히 후퇴하는 한 세계의 모습과 함께, 우리가 아직은 그 세계에 화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필요한 건, 그저 한 사람의 얽힘뿐이다.
발췌
우리는 언월딩에 대한 감이 없다. 경험한 적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반면 언월딩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들이 있다. 세계의 허물어짐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 ‘세계는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람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이런 이들이 있다.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할지 몰라도, 아마존에만 약 200만 명 이상 존재하는 그들. 바로 원주민들이다. (17쪽)
생생히 기억하건대 그 이야기는 세계의 종말이 아닌 정반대 이야기였다. 나는 예의를 지키기 위해, 또 정말로 동일한 이야기인지 확인하기 위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똑같은 이야기가 맞았다. 당황한 나는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물었다. “잘 들었어. 그런데 이건 ‘세계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 아니야? 전에 들은 적이 있어.” “아니.” 그는 반박했다. “우린 세계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걸.” (30쪽)
‘동물 이상의 동물들’로 가득한 이파지 세계로서의 숲은, 동시에 행위성(agency)으로 충만한 공간이기도 하다. 행위성을 가리키는 원주민 언어는 없지만 가장 근접한 단어를 꼽으라면 나는 이파지를 꼽고 싶다. 이는 형용사이자 동사이며, 때로는 명사로도 사용할 수 있다. 아마존 원주민 사회의 다른 많은 개념과 마찬가지로 유연하고 유동적이다. 높은 수준의 이파지는 범접 불가능한 샤먼의 존재로 대표되지만, 다른 수준의 이파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카리푸나족의 역동적인 숲에서는 어류처럼 비교적 단순한 능력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생명체조차 행위성이 결여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 (61쪽)
카치카 할머니는 최근 수년간 백인들의 끊임없는 침범에도 카리푸나족 가운데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모두 미랑가 덕분이라고 믿는다. 카리푸나족 추장인 그녀의 아들 안드레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추장이나 리더가 살해당한 몇몇 이웃 부족들에 비하면 아직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미랑가가 여전히 약속을 이행하며 카리푸나족을 보호한 덕분이다. (75쪽)
길을 잃은 채 며칠 동안 숲을 헤매다 보면 체취가 주변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말은 여러 원주민에게 공통적으로 들었다. 다시 말해 그런 극한 상황에 처하면, 몸에서 숲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따삐르 혹은 페커리의 체취와 비슷하단다. 그러면 인간과 숲 사이의 구분은 사라지고 기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평소라면 인간에게 절대 다가오지 않을 따삐르나 페커리나 파카 같은 동물들이 마치 나무 같은 자연물에 다가오듯 태연하게 사람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다. (125쪽)
현실에서 내가 목도한 광경은 이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피라항어가 아무리 흥미롭든,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든, 그 주제를 다룬 책이 얼마나 잘 쓰이고 얼마나 팔렸든, 그래서 피라항족이 외부에 얼마나 알려졌든지 간에, 결국 그들은 거리의 부랑자로 전락한 채 지나가는 브라질인들의 멸시를 받으며, 저기 서성이고 있었다. (137쪽)
이 커다란 병원에서 그저 평범한 환자로 보이는 한 노인이 이토록 풍요로운 세계를 품고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이 많은 이들 중 그 누구도, 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에서도, 그렇게 많은 야수들과 정기적으로 춤추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아리파와 수차례 숲을 동행했지만 그가 지니고 있었던 이 또 다른 차원의 숲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를 간과한 채 나는 ‘카리푸나족은 고유의 문화를 잃고 동화되었으며, 현대적인 시스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뻔한 것이다. (157쪽)
내가 카리푸나족 그리고 아마존과 맺은 관계 역시, 집에 돌아온 나를 평온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대신, 지금도 나를 신경 쓰이게, 한숨 쉬게, 때론 잠 못 이루게 만든다. 오디세이 같은 ‘해피엔드’도 없이, 이 이야기는 완결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기만 한다. 얽힘이란 그렇게 우리의 질긴 참여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게 맞다. 적어도 사람과 숲의 저항이 계속되는 한, 누군가는 또 얽혀야 한다. (163–164쪽)
서문
1장 언월딩
2장 사람들
3장 반교훈
4장 세상의 끝?
5장 전쟁의 이름
6장 이파지 세계로서 숲
7장 숲은 어떻게 저항하는가
8장 내가 환경이다
9장 유산
10장 아마존 대 아마존
11장 길, 있음 혹은 없음
12장 리서치는 그만
13장 얽힘에는 둘이 필요하다
맺음말
참고 문헌
저자 소개
김한민
작가. 창작 집단 ‘이동시’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비수기의 전문가들』, 『착한 척은 지겨워』 등의 책을 쓰고 그렸다. 현재 리스본 고등사회과학연구원(ISCTE) 박사과정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