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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나팔

The Hearing Trumpet

  • 이지원
110 × 175밀리미터 / 284쪽 / 사철 하드커버 / 2022년 5월 31일 / 17,000원 / ISBN 979-11-89356-72-9 04800 / 978-89-94207-33-9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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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격: ₩17,000.현재 가격: ₩15,300.

리어노라 캐링턴의 『귀나팔』(이지원 옮김)이 워크룸 문학 총서 ‘제안들’ 33권으로 출간되었다. 리어노라 캐링턴은 1917년 영국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주로 활동한 화가이자 소설가로, 초현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글을 쓴 작가다. 때마침 2022년 4월 23일부터 시작되어 11월 27일까지 열리는 제59회 베네치아비엔날레의 주제 ‘꿈의 우유(The Milk of Dreams)’는 캐링턴이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쓴 환상적인 그림책의 제목을 빌렸다. 이번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인 세실리아 알레마니는 “초현실주의 작가는 상상의 프리즘을 통해 삶이 끊임없이 재구상되고 모든 사람이 변화하고 변형되고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마법의 세계를 묘사한다. 이 전시는 우리를 신체의 변형과 인간에 대한 정의들을 통해 상상의 여행으로 안내한다.”고 밝히며, 전시의 제목이 된 캐링턴의 이야기가 “모두를 두렵게 하는 꿈 같은 스타일로 자유롭고 가능성으로 가득찬 세상을 묘사하는 한편, 개인의 삶을 압박해 추방한 시대를 비유”한다고 말한다. (https://biennialfoundation.org/2021/06/the-milk-of-dreams/)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연인이었던 막스 에른스트가 군 수용소에 억류되자 정신착란을 겪으며 정신병원을 전전하다가 다른 사람과 혼인신고를 한 뒤에 뉴욕에 이어 멕시코시티로 떠날 수 있었던 캐링턴은 낯선 곳에서 비로소 “고정되고 일관된 정체성의 제약을 벗어나 놀라운 힘과 신비를 지닌 인물”들을 창조하며 삶을 살 수 있었다.

『귀나팔』은 이렇게 20대 중후반이었던 1940년대 초에 다른 곳에 머물게 된 리어노라 캐링턴이 서른세 살이 된 1950년에 완성한 글이다. 주인공은 아흔두 살의 여자 노인 메리언 레더비이다.

꿈과 친구를 간직한 인간

영국인 여성 메리언 레더비는 아흔두 살이고, 채식인이며, 멕시코로 추정되는 한 주거지역에서 아들네 가족의 집에 얹혀산다. 이 나라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채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매주 적당히 사소한 즐거움을 만들어 가며 지낸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메리언을 위해 어느 날 이웃 친구 카르멜라가 ‘귀나팔’을 선물한다. 이 귀나팔을 통해 메리언은 자신을 양로원에 보내려는 아들 가족의 대화를 엿듣게 되고, 곧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시의 남쪽 끝 변두리 지역의 시설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 메리언은 기이한 노인 친구들을 만나고, 흥미롭고 놀라운 일들을 겪고, 예기치 않은 삶을 마주한다.

소설을 이끄는 주인공은 90대 여자 노인이지만, 일반적으로 품게 되는 예상과 달리 주인공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얻는다. 그 기회의 씨앗은 주인공이 스스로 키워 왔다. 메리언은 비록 남미에 매여 있지만 언제나 북쪽 라플란드를 꿈꾸며, 그 꿈을 친구와 나눈다. 친구는 친구의 꿈을 기억하고, 친구의 꿈이 성사되도록 돕는다. 그렇게 친구와 친구는 또 다른 친구들과 새로운 세상을, 다른 삶을 맞이할 준비를 해 둔다. 돌아보면 세상을 향한 통로가 되는 귀나팔을 예비해 준 이 역시 친구였다. “이 굉장한 나팔이 네 삶을 바꿔 놓을 거야.” (본문 17쪽) 여러 상황과 무관히 꿈을 잃지 않는 친구를 어떻게든 세상과 연결시켜 주기 위한 한 친구의 선택이 결국 친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증명하는 듯하다.

인간과 비인간

“『귀나팔』은 주술과 기생명체가 등장하는 동화이자 음모와 암살과 반전이 줄을 잇는 스릴러물이고, 기성 관습에 대항하는 소수자 투쟁의 서사, 새롭게 태어나는 입문 의식의 서사, 성배의 신화와 연금술을 응용하는 신비주의 서사가 그에 접목되어 있다. 나아가 연령주의와 엄숙주의를 비판하고, 생태여성주의와 젠더 유동성을 체화하는 동시에 더 급진적으로 몰고 가는 작품이다. 눈길을 뺏는 요소가 이렇게나 많기 때문에 묻혀 버리곤 하지만, 이 소설에는 늙은 여자들의 회상과 꿈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서사가 암류처럼 흐른다.” (옮긴이의 글 중에서)

이 노인 친구들은 주변을, 인간과 동물을 돌보는 데 익숙하다. 이들의 돌봄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세상이 부드럽게 돌아가도록 미리 기름칠하듯 이루어진다. 그러다 부당한 문제가 발생하면 거리낌 없이 함께 행동한다. 생명을 건 연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의 용기 있는 선택 앞에서, 마치 그 선택을 존중하듯 세상은 변한다. 다시 시작하는 세상을 목도하는 존재들은 여성, 노인, 사회적 약자, 동물, 그리고 변종 생명체이다.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과정을 거쳐 종말에 다다른 세상에 인간과 비인간이 보란 듯이 함께 서 있다. 우리의 현실을 꿰뚫고서 미래를 미리 해방시켜 둔 편린들이 곳곳에서 빛나는, 우리에게 새로운 열린 시간을 미리 얻을 기회를 마련해 둔 책이다.


추천사

“재밌고도 무서운, 특별한, 모두가 읽어야 할 초현실주의 이야기. 나는 예술의 초현실주의와 아나키즘을, 도발을 사랑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빛과 진지함으로 가득한 독특한 목소리이며,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신이다. 거의 50년 전에 출판된 얇은 소설이지만 우리 시대에 딱 맞는 씁쓸하고 어두운 유머 감각을 갖춘 작품.”
— 올가 토카르추크

“풍자적인 표면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가정 미스터리처럼 읽히지만, 이는 극도의 열에 의해 녹아 상상할 수 없는 다른 것으로 용해되고, 연금술사의 사례집으로 재구성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어둠을 허용하고, 야생을 허용하고,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재고할 것을 요청한다. 엄청난 낙관주의의 작품.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즐겁고, 만족스럽고, 잠잠히 공상적인 소설 중 하나.”
— 앨리 스미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책! 자유분방하고 날카로운 상상력. 이 책의 자유와 유머, 그리고 이 책이 스스로 법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사랑한다.”
— 비외르크

“『귀나팔』은 우리 시대의 비참한 현실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 루이스 부뉴엘


발췌

내게 귀나팔을 선물했을 때, 카르멜라는 결말을 어느 정도 예견했던 것 같다. 카르멜라는 악의적이라 할 수는 없고 다만 유머 감각이 묘할 뿐이다. 이 귀나팔은 귀나팔 중에서도 상당히 훌륭한 표본으로, 아주 현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과 자개로 상감하고, 물소의 뿔처럼 웅장한 곡선을 그리는 특출하게 예쁜 것이었다. 귀나팔의 장점은 미적인 면모에서 그치지 않고 소리를 증폭하는 성능도 대단해서 내 귀에도 일상 대화가 웬만큼 들릴 정도였다. (11쪽)

이 모든 것은 여담일 뿐, 내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 정신은 오락가락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그러지는 않는다. (14쪽)

매주 사소한 즐거움이 적당히 찾아온다. 월요일에는 날씨가 온화하면 길을 따라 두 블록을 걸어서 친구 카르멜라를 보러 간다. 카르멜라는 아주 작은 집에서 조카랑 같이 사는데, 조카는 스페인 사람이긴 하지만 스웨덴식 찻집에서 케이크를 굽는 일을 한다. 카르멜라는 아주 쾌적한 삶을 살고 있고 정말이지 매우 지적이다. 손잡이가 달린 안경을 사용해 책을 읽고 나와 달리 혼자 중얼거리지 않는다. 기발한 스웨터를 짜기도 하지만 그녀의 진짜 즐거움은 편지 쓰는 것에 있다. 카르멜라는 전 세계에 있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다음 본명이 아닌 각종 낭만적인 이름으로 편지 끝에 서명을 한다. 카르멜라가 익명의 편지를 경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효율성을 감안한 것이다. 끝에 이름을 서명하지 않은 편지에 누가 답장을 쓰겠나? 카르멜라의 섬세한 필체로 쓰인 이 놀라운 편지들은 천상의 방식으로, 항공우편으로 날아간다. 누구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이게 바로 인류의 불가사의한 면모다. 사람들은 뭔가를 할 시간이 항상 없다. (15~16쪽)

“일흔 살과 일곱 살 사이의 인간은 고양이가 아닌 이상 믿어서는 안 돼. 지나치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어. 그리고 사람들이 네가 귀가 먹었다고 여기고서 말하는 걸 엿들을 때 그 짜릿한 권력을 상상해 봐.” (18쪽)

언제나처럼 나는 부엌에서 점심을 먹은 뒤 고양이 마르민과 차차의 털을 빗겨 주러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매일 고양이 털을 빗기는데, 털을 깔끔하고 반짝반짝하게 유지해 주고 또 빗에 걸린 털을 모아서 카르멜라에게 주기 위해서다. 충분히 모이면 카르멜라가 그걸로 스웨터를 짜주겠다고 약속했다. 벌써 작은 잼 병 두 개에 보드라운 털을 가득 모았다. 겨울에 입을 따뜻한 옷을 즐겁고 경제적으로 마련할 수 있는 방법 같다. (21쪽)

집은 정말 몸이다. 우리가 간, 뼈, 살, 혈액순환을 내려놓지 못하듯 우리는 벽과 지붕과 집기와 스스로를 연결한다. 나는 미인이 아니다. 이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단언할 수 있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수척한 골격이 마치 비너스의 맑은 몸인 양 죽자고 붙들고있는 것이다. (29쪽)

기적에, 마녀에, 동화에, 자기, 철 좀 들어요!
당신은 마법을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당신 머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고 당신 배 너머로 진달래나무가 보여요. 당신이 죽었다거나 하는 대단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니고, 그저 당신이 점점 바래고 있고 난 당신의 이름마저 기억나지 않아요. 당신이 입은 하얀 플란넬 바지가 당신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요. 그 하얀 플란넬 바지에 대한 내 느낌은 모두 기억나지만, 그 플란넬 바지를 걷게 한 누군가는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분홍 리넨의 민소매 드레스로 기억하고 내 얼굴은 수많은 다른 얼굴들과 뒤섞여 있겠죠, 나는 이름도 없고요. 그러니 개성에 대해 이렇게 유난 떨 필요가 있을까요? (37쪽)

차례
작가에 대하여
이 책에 대하여

귀나팔

옮긴이의 글
리어노라 캐링턴 연보
저자 및 역자 소개

리어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1917–2011)
영국 태생의 멕시코 초현실주의 화가, 소설가. 런던에서 그림을 배우던 캐링턴은 독일 출신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를 만나고, 함께 프랑스로 거처를 옮겨 파리의 초현실주의자 모임에 참여한다. 몇몇 초현실주의 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단편소설집 『공포의 집』을 프랑스어로 출간했던 캐링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에른스트가 군 수용소에 억류되자 정신착란을 겪기 시작한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을 전전하다가 멕시코 대사이자 시인이었던 레나토 르두크의 도움으로 혼인신고를 한 뒤 뉴욕으로 떠나 에른스트, 브르통, 부뉴엘, 뒤샹 등 초현실주의자들과 다시 교류하게 된다. 이어 멕시코시티에서 뱅자맹 페레, 레메디오스 바로, 옥타비오 파스, 디에고 리베라 등과 조우하고, 특히 바로와 신비주의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가깝게 지낸다. 르두크와 이혼한 캐링턴은 헝가리 출신의 사진기자와 재혼하고, 아들 가브리엘과 파블로를 낳는다. 1948년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갤러리에서 여성 중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고, 1950년에는 멕시코시티에서 개인전을 여는 한편 『귀나팔』을 완성한다. 이후 멕시코시티 국립현대미술관과 몬테레이 현대미술관,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고, 미국 여성예술코커스의 평생공로상과 멕시코 국가과학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5월 25일, 멕시코시티에서 94세로 사망했다.

이지원
서울대학교에서 미학과 불어불문학을 공부하고, 데카당문학으로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큐레이터와 미술 프로듀서로 일한다. 알프레드 자리의 『파타피지크학자 포스트롤 박사의 행적과 사상: 신과학소설』을 한국어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