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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꿈에서 본 모든 것을 꿈꾼다 1: 프롤로그—끝이 없는 편지, 2023년 7월 14일
유운성

2026년 1월 7일 게재

영화를 둘러싼 장소의 안팎을 오가며 영화의 시대가 어떻게 끝나 갔는지 증언하는 책, 유운성 평론가의 『너는 내가 꿈에서 본 모든 것을 꿈꾼다』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 네 번의 연재 이후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한국 땅에 몸담고 있는 바에는 한국사(史)는 내 개인사(史)이기도 할 수밖에 없지. 역사 의식이랄 것 없이 역사적 상상력이라면 되겠군. 그것을 피해 가려던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가 됐으니까, 이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지. (…) 우상은 한 번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 끊임없이 우상을 부수는 것. 그것만이 구원이다. 이끼 앉은 모든 것을 경계하라.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편지는 이미 지난 세기에 종말을 맞은 형식이야. 게다가 지금 나는 고작 100년만 지나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무용한 언어로 글을 쓰고 있어. 네게 보내는 것만 아니라면 이런 언어로 사라진 형식의 글을 쓰지는 않았을 거야. 내 말이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요즘 걸핏하면 고대인이, 아주 오래전에 사멸한 종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건 내가 한국어로 글을 쓰고 있고,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의 단계를 지나 압축 소멸의 과정을 밟고 있다는 진단적 기사를 엊그제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야. 그보다는, 며칠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장 외스타슈의 「엄마와 창녀」를 오랜만에 복원판으로 보고 있을 때 돌연 들이치듯 날아와 마음에 박힌 대사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 몰라. 거기서 장피에르 레오는 이런 말을 해. “오래지 않아 이 모든 게 끝날 거야. 자동차, 임대주택, 영화… 아주 나이 든 사람이라면, 늙은이라면, 아직 기억을 떠올려 젊은이들에게 말해 줄 수 있겠지. 영화관들이 있었다고. 움직이고 말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고.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앞으로도 오랫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다닐 거야. 지상에서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영화 또한 사라지지 않을 거야. 다만 영화가 들려주는 말을 이해하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겠지. 누군가 더글러스 서크의 불가사의한 멜로드라마 「마음의 등불」을 보면서 폭소를 터뜨린다면 그건 그가 아직은 서크의 시대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는 증거야. 가까운 추억의 감정은 때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는 법이니까. 우리가 유년기에 자못 진지한 마음으로 저지른 터무니없는 일들을 떠올릴 때 그런 것처럼. 하지만 예술영화관과 시네마테크의 엄숙한 관객들에게 그런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아. 앤드루 새리스는 서크식 영화의 정수는 아무리 허무맹랑해 보여도 온갖 소재가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데 있다고 했어. 그런데 그 허무맹랑함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도래한다면? 그때부터 영화는 생생한 추문에서 고대적인 예술이 되어 가겠지. 한동안 영화는 거기에 저항할 수 있었어. 우리가 함께 보았던 관금붕의 「연지구」를 떠올려 봐. 거기서 현대의 연인들은 매염방이 귀신이 되어서도 장국영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거의 이해하지 못해.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매염방은 좀 우스꽝스러워 보였지. 그녀는 자신과 동반 자살한 장국영의 혼을 찾아 현대의 도시를 헤매고 다니지만, 사실 겁을 먹고 죽음을 택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는 노인이 되어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라로 일하며 근근이 생을 이어 가고 있어. 우스꽝스러운 비련은 그렇게 끝나 가고 있어.

그래도, 아직은 ‘아직’이라고 말할 수 있어. 예술에 대한 추문으로서 영화의 잠재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오래전에 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고 주장했었어. 여기서 문학이란 말을 예술이라 바꿔 읽어도 무리가 없을 거야. 분명 김현의 주장에는 문학에 대한, 예술로서의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지. 하지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영화는 바로 이런 예술에 대한 추문이야. 김현은 문학은 사회와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 있지만 민속적인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집단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도 했지. 이런 뜻에서라면 영화는 분명 민속적인 것이겠지. 차라리 풍속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영화는 예술이 근사한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마다 예술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 비웃는 명랑한 추문이야.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건 바로 그런 추문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버티는 가냘픈 저항이고. 더는 영화가 예전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대, 영화가 거의 예술이 되어 버린 시대에 글을 쓴다는 건 더더욱 그렇지.

외스타슈의 영화는 우리가 태어났던 해에 세상에 나왔어. 나는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과 엇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보았어. 이 영화에 출연했을 때 장피에르 레오와 프랑수아즈 르브룅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지. 너는 결코 거기 이르지 못했던 나이, 삶에 깃든 불길함을 문득 감지하고는 누군지 모를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기 시작하는 나이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인물은 항상 간절함이 사라진 다음에야 나타난다고 제발트는 말했어. 제발트는 레오와 르브룅과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야.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추문을 일으키고 프랑스에서 개봉해 3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있을 무렵, 제발트는 알프레트 되블린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어.

그런데 그 무렵 레오와 르브룅과 제발트와 동갑내기인 한국인 청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또래의 사람들이지. 문제는 이거야. 우리 부모 세대의 그 누구도 우리에게 성찰을 위한 유산을 물려주지 않았다는 것, 혹은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느낀다는 것.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등 영상시대 동인들이 1970년대 중반에 내놓은 영화, 김현의 문학평론이나 박상륭과 황석영의 소설은 외스타슈나 제발트의 작품처럼 동시대성을 띠고 새로운 세기의 아이들과 만나지 못했어. 오히려 김기영과 신상옥과 이만희의 영화에서, 김수영의 산문과 이병주와 최인훈의 소설에서, 어쩌면 오늘날의 아이들은 각자의 장난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네가 좋아하던 『소설・알렉산드리아』 같은 책이 과연 요즘에도 읽히는가 하는 문제는 제쳐 둔다면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김희선의 『무한의 책』에서 자신의 장난감을 찾은 아이라면 분명 최인훈의 『회색인』에서도 비슷한 걸 찾을 수 있을 거야.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주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일까? 후자 쪽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새로운 세기의 아이들에게 전수하는 데 실패한 책임을 져야 할까? 어쨌거나 우리 부모 세대 가운데 오늘날 경이까지는 아니어도 경악이나마 불러일으키는 건 이런저런 추잡한 신들뿐이지. 정명석과 박순자와 김기순과 이재록은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에 어울리는 얼어붙은 추문이야. 이런 추문은 도덕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숭배를 낳을 뿐이지.

2년 전 어느 여름날 오후였어. 나는 버스를 타고 촬영소 사거리라는 곳이 있는 동대문구 장안동으로 향했어. 이곳에 가 보기는 처음이었지. 한참 햇볕이 뜨거운 시간이어서 승객은 많지 않았어. 회차 지점인 촬영소 사거리에 도착하기 이미 몇 정류장 전부터 버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거든. 이동하는 동안 읽고 있던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에 반복적으로 묘사되는 버스 안 풍경과는 영 딴판이었지.

홍상수의 양친이 영화제작자로 활동한 적이 있고 이만희의 「휴일」과 「생명」이 그들의 제작사인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설립한 촬영소가 답십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어.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운영된 촬영소라고 하니, 대략 한국 영화의 첫 번째 황금기가 저물어 갈 무렵에 설립되어 암흑기가 시작되던 무렵에 문을 닫은 셈이지.

이곳을 찾기 몇 달 전에 요청받은 것은 1960년대 한국 영화에 나타나는 서울의 모습에 관한 생각을 담은 글인 터라, 굳이 답십리까지 가서 촬영소 사거리 인근을 답사할 필요는 없었어. 당시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들을 부지런히 보며 글감을 찾으면 되는 일이니까. 사실 영화를 일일이 찾아볼 필요도 없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영화 장면 몇 개를 골라 거기서 출발해 자유분방하게 글을 이어 나가면 될 테니까. 그런데 왜 굳이 거길 찾았던 것일까?

그 여름날 오후, 은평구 구산동에서 치과 진료를 받고 나서 720번 간선버스를 타고 강북을 서에서 동으로 한 시간 남짓 가로지르며 동대문구 장안동까지 갔던 것은, 그러니까,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어. 대체 무엇에 대한? 서울이란 도시가 순식간에 과거를 말끔히 지워 버리는 능력을 모르지도 않는데 말이야. 치과 진료라면 우리나라 최초로 음화 제작 혐의로 기소된 유현목의 1965년 작품 「춘몽」이 떠오르긴 하지. 이보다 1년 전에 일본에서 개봉한 다케치 데츠지의 「백일몽」을 무단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야. 세기상사가 제작한 이 영화는 당시 한남동에 있었던 세기촬영소에서 찍혔어. 그러니까 치과 진료를 받은 것과 답십리촬영소가 있던 장소를 찾아간 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거지.

답십리촬영소 터에 가면 무언가 흥미로운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어. 촬영소가 문을 닫은 게 이미 반세기 전이고 보면, 도무지 아무것도 남아날 여지를 주지 않는 서울이란 도시에서 흔적 따위를 기대하는 일 자체가 망상이나 다름없으니까. 720번 회차 지점인 촬영소 사거리를 한 정류장 앞두고 내렸을 때, 눈에 들어온 거리 풍경은 짐작과 그리 다르지 않았어. 특색 없이 단조로웠고, 굳이 시선을 끄는 것도 전혀 없어 편안했지.

하차한 버스 정류장 맞은편으로 힐스포파크라는 골프장이 보였어. 조만간 이곳 옹벽에는 영화의 거리 조성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몇몇 시각예술가들이 만든 설치물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들었어.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옹벽을 따라 조금 걷다가 골프장 건물에 들어가 화장실만 잠시 쓰고 나왔어. 이런 거리에 있는 이런 시설의 이런 유용성, 이라고 생각하며 말이야.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가 동답한신아파트 쪽으로 난 길로 들어갔어. 거기 있는 동대문구문화회관 1층에 영화 전시관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것이었는데, 이 건물을 영화미디어아트센터로 새로 조성하기 위해 당분간 휴관한다는 안내 현수막만 붙어 있었지. 이제는 개조를 마치고 작년에 새롭게 개관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이후로 다시 가 보지는 않았어. 웹사이트에서는 “이곳은 1960년대 한국 영화 촬영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답십리종합영화촬영소 일대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띤 곳”이라고 안내하고 있고.

그런데 실제로 촬영소가 있던 자리는 문화회관 옆에 있는 동대문구체육관과 그 뒤편의 동답초등학교를 합친 구역이야. 촬영소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었을지 대략이나마 가늠해 보려고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크게 돌아보았어. 넉넉히 어림잡아도 촬영소 부지는 4천 평 정도였던 것 같아. 이 정도면 스튜디오로는 작은 축이지. 1957년에 수도영화주식회사가 안양시 석수동에 지었던 안양촬영소는 3만 평이 넘었어. 나중에는 신상옥의 신필름이 인수해 운영하다 문을 닫았지. 그리고 1997년에 문을 연 남양주종합촬영소는 약 40만 평에 달해.

촬영소 사거리 주변을 한 시간 가까이 거닐었지만, 이제는 서울이 아닌 한국 어디를 가도 마주칠 법한 아파트 단지 주변의 그저 그런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니 기대한 대로 된 거지. 날씨가 더워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사서 나오는데 걸음이 빠른 할머니 두 분이 무심한 고양이처럼 돌차간에 내 앞으로 지나갔어.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든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야옹대듯 말했어.

“옛날 맛이라 요즘 애들은 맛있는지 몰라, 잉?”

야옹. 비닐봉지에 든 게 뭐였는지는 모르겠어. 어쩐지 내가 바로 그 ‘요즘 애들’ 가운데 하나가 된 기분이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혼나는 기분이었고. 그때였어. 골목 안쪽으로 동답초등학교가 보였어. 옛 촬영소의 크기를 가늠하느라 주변을 돌면서 한 시간 전에 이미 지나온 곳이었지.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다시 가 보기로 했어. 학교 담장을 따라 걸을 때는 몰랐는데 큰길에서 정문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니 학교 건물 외벽에 있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어.

영화를 꿈꾸는 아이들의… 서울동답초등학교.

서울을 주요 무대로 삼은 한국 영화를 보면서 화면에 비친 모습만 보고 거기가 대략 어디쯤인지 파악하는 일은 전주에서 나고 자란 지방 출신인 내겐 여전히 힘들어. 1960년대 이전에 촬영된 한국 영화라면 더욱 그렇지. 이젠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화면에 떠오른 형태만 보고 인왕산과 북악산을 구분하기가 여전히 어렵고, 그나마 남산이나 서울역을 금방 알아보는 정도야.

한강도 마찬가지야. 봉준호의 「괴물」이나 이해준의 「김씨 표류기」 같은 영화를 보면서 한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촬영된 한국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주변 풍경의 모습이 지금과 판이해서 곧바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 어딘지 안다 해도 생경한 느낌은 가시질 않지.

어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서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실험 미술에 대한 전시를 보고 왔어. 전시 구성은 그저 그랬고 새삼스러운 것도 거의 없었지만 ‘한강변의 타살’이라는 작업이 예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 정확히 말하자면 1968년 10월 17일에 제2한강교, 그러니까 지금의 양화대교 아래에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이 벌인 해프닝 작업을 기록한 사진들이지. 강국진은 1939년생이고 정강자와 정찬승은 1942년생이니 이들 역시 우리 부모 세대에 속하는 작가야. 그들 작업의 정치적 의미와 미술사적 의미를 언급한 글들엔 도무지 공감하거나 동의할 수 없었어. 오히려 그날 내 눈길을 끈 것은 사진 속 사람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래사장이었어. 해프닝을 벌이는 젊은 작가들의 어떤 몸짓에도 반응하지 않는 그 냉혹한 무심함은 정말로 소름 끼쳐. 그들을 타살한 장본인은 바로 이 모래사장이라고 느껴질 만큼. 하지만 요즘의 양화한강공원에서 그런 감각을 느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풍경이 행사하는 권력은 우리 눈에 더는 보이지 않아. 보이는 것은 풍경의 권력이 아니라 조경의 매력이지. 해프닝은 사건이 아니라 일화가 되고. 그런데 바로 이것이야말로 풍경이 진정 권력이 되었다는 뜻이겠지.

1968년에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최하원의 데뷔작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보면 노량진 부화장이란 곳이 주요 무대 가운데 하나로 나와. 이때만 해도 강남은 노량진이 있는 동작구 지역과 영등포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해.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오리 부화장 주변으로는 사방이 온통 허허벌판이라 이곳이 노량진이라는 설정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아. 종로 풍경이 나올 때는 그나마 좀 나은데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지. 이 영화를 보고 감독 인터뷰를 찾아 읽다가 예전에 을지로6가에 계림극장이라는 영화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서울에 살던 사람들에겐 꽤 알려진 재개봉관이었던 것 같지만 내가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온 바로 그해 1월에 폐관되어서 나는 가 본 적이 없어. 지금은 그 자리에 굿모닝시티라는 쇼핑몰 건물이 들어서 있어. 2003년에 터진 사기 분양 사건으로 유명한 건물이지. 한동안 공실률이 80퍼센트가 넘는 상태로 방치되었다 올해는 재개발 논의가 진행 중인 모양이더라. 주범인 윤창열은 2020년 말 서울동부구치소 코로나 집단감염 사태 당시 처음으로 죽은 사람이었지.

인터뷰에서 최하원은 계림극장 터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줘. 그 자리가 상당히 벌판 같았는데 그래서 거기다 천막을 치고 서커스 공연을 보여 주곤 했다는 거야. 그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라니 해방 직후인 1940년대 중반 이전에 그랬다는 말이겠다. 기록에 따르면 계림극장은 1946년에 문을 열었으니까. 1948년 3월 14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이류관’으로 분류된 서울시 영화관 중에 계림극장이 끼어 있어. 이류관이라니까 좀 그런데 당시 일류관은 수도극장과 국도극장 두 곳밖에 없었어. 두 곳 모두 내가 전역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되었지. 수도극장은 대학 시절에 우리가 이따금 드나들던 스카라극장이야. 옛날에 쓴 일기를 뒤져 보니 내가 여기서 본 마지막 영화는 「신기동전기 건담 W: Endless Waltz 특별편」이었네. 반다이코리아의 프로모션 행사였고. 어이없기는 하지만 이 영화를 보게 된 사정은 이래. 한동안 다니던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공부하던 때였어.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를 지나가던 예술사 학생 하나가 친구에게 “오늘 스카라극장에서 「엔드리스 왈츠」를 상영한다는데?”라고 말하는 걸 우연히 들었던 거야. 나는 그게 와카마쓰 고지가 1995년에 만든 「엔드리스 왈츠」를 말하는 건 줄 알고 얼른 지하철을 타고 스카라극장으로 향했어. 극장 입구에 도착해 포스터를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터라 영화까지 보고 나온 거지.

1950년대 일간지 연예란에 실린 광고를 바탕으로 당시 서울 재개봉관들의 프로그램을 가까스로 추정한 이길성에 따르면, 영화관이라고는 해도 계림극장의 프로그램은 1950년대 중반까지 거의 공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 1954년에는 영화가 26편이고 공연이 79편이던 것이 1955년에는 영화가 58편이고 공연이 37편, 1956년에는 영화가 75편이고 공연이 21편으로 역전되면서 거의 영화 상영으로 채워지는 재개봉관이 돼. 서커스 공연이 펼쳐지는 벌판에서 영화관으로, 영화관을 빙자한 공연장에서 재개봉관으로, 그리고 이제는 유령 건물처럼 방치된 쇼핑몰로, 우연이라기엔 제법 의미심장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변모 과정이지.

모습이 자꾸 바뀌는 것도 서울이 내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야. 서울의 장소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촬영소 같아. 영화 한 편을 찍고 나면 사용했던 소품과 세트를 모두 다 치워 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것들로 채운 뒤에 또 다른 영화를 찍고, 또 모두 치우고 다시 채우고 찍는 식이니까. 수많은 사람이 촬영소를 오가고 그 안에서 영화를 만들지만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작 촬영소 자체가 카메라에 담기는 일은 거의 없어. 촬영소란 숱한 가상적 장소들을 스크린에 비추기 위해 정작 그 자체의 장소성은 집요하게 감춰야 하는 그런 곳이야. 서울이란 도시가 꼭 그래. 그리고 한국 영화에 담긴 서울 풍경 대부분은 이 도시를 외면하거나 변형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길 바라는 열망이 낳은 부산물처럼 보여.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내가 한국 영화를 통해 서울이란 도시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해방 이후 한국의 영화인들은 서울을 주요 배경으로 삼은 영화를 만들 때조차 이곳은 전혀 영화적인 도시가 아니라는 감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 물론 1956년에 개봉한 이용민의 「서울의 휴일」처럼 예외적인 영화도 있기는 해. 「자유부인」이나 「여사장」처럼 한국전쟁 직후 만들어진 몇몇 영화도 그렇지만, 「서울의 휴일」에는 지금의 우리에겐 짜장 요령부득인 기묘한 흥청거림이 있지. 하지만 사실 그런 영화들은 서울을 영화적인 도시로 보았다기보다 그저 이국적인 도시로 상상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국적인 것이야말로 영화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착각)했던 것인지도 몰라.

1949년에 「만춘」을 내놓으며 양식적으로 전환을 시도한 이후 일본의 도시들을 집요하게 이국적으로, 즉 영화적으로 마름질했던 후기의 오즈 야스지로를 떠올려 본다. 이 시기 오즈 영화의 도시를 보면서 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지. 하지만 그런 오해는 수긍할 만한 것이기도 해. 이국적인 것은 외국적인 것과는 달리 홉스봄적인 의미에서 ‘만들어진 전통’을 꼭 필요로 하는 법이거든. 전통 없이 이국적인 것은 현지인에게 그냥 외국적인 것이 되고 이국적이지 않은 전통은 외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려. 양식적 전환 직후에 오즈가 내놓은 영화들, 그러니까 「만춘」과 「무네카타 자매들」과 「맥추」 등에서 가마쿠라와 교토와 나라 같은 전통적 장소들은 은근슬쩍 도쿄와 겹쳐지면서 저 상상적인 오즈적 도시의 이국성을 형성해 가지. 이런 작업이 있고 나서야 오즈는 「오차즈케의 맛」에서 본격적으로 도쿄를 무대로 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어. 이 영화에 뒤이어 만든 것이 바로 「도쿄 이야기」야.

어쩌면 이국적 상상이란 언젠가 현재가 될 수도 있을 미래를 그려 보는 일이 아닐까? 이러한 상상은 전통을 만들어 내는 일을 반작용 삼아 작용하는 것이고. 문득, 일본인들은 오즈가 죽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가 그려 낸 미래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 하마노 야스키의 말이 생각난다. 그가 쓴 오즈에 관한 저서는 다카하시 오사무나 사토 다다오의 책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아 단기간에 절판되었다지. 20년 전에 임재철 선생님께서 내게 읽어 보라며 직접 번역해 건네주신 파일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여기 옮겨 본다.

“전후의 혼란과 빈곤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던 시대에 오즈의 작품에는 학력은 도쿄대 출신에, 말에는 곧잘 영어를 섞고, 마시는 것은 고급 양주인 사람들이 나왔다. (…) 앞으로 도래할 세계를 오즈는 배경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즈의 작품은 SF다. 가장 과학적 고증이 철저히 이루어진 SF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일본인들은 참으로 멋지게 오즈의 세계를 실현한 것이 아닐까. 오즈의 작품은 지금 보아도 낡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보아야 본래의 가치를 알 수 있다. 현시점에서 오즈의 영화는 SF에서 현대극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미래의 관객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서울 사람들은 누가 상상한 미래에서 사는 것일까?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전통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동경과 회고는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지. 우리는 「오발탄」의 영화 작가가 이 도시에 모종의 애착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어. 그뿐이 아냐. 1950년대를 마감하고 1960년대에 이르면, 한국 영화에서 도시는 등장인물만이 아니라 아예 영화 자체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처럼 느껴져. 이런 장애를 피하려면 「하녀」의 김기영처럼 세트 안으로 들어가거나, 「살인마」의 이용민처럼 도시 외곽으로 나가거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성춘향」의 신상옥처럼 아예 전원극이나 사극의 세계로 향해야 했던 거지. 하지만 소용없어. 장애의 결과는 어떤 식으로건 영화에 각인되고 마는 법이니까. 우리가 영화에서 한국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그 흔적이야. 도피하지 않고 어떻게든 서울을 하나의 영화적 풍경으로 포착하려 했던 시도들도 있기는 해. 이만희의 「휴일」처럼 말이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나무들 비탈에 서다」도 그렇지. 하지만 「휴일」은 결국 당대에는 관객을 만나지 못했어. 제작된 지 37년이 지나 2005년에야 빛을 볼 수 있었으니까. 아예 필름이 사라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2015년에 다시 발굴되었고.

답십리촬영소에서 촬영된 마지막 영화는 이만희의 「생명」이야. 여기서 「휴일」의 작가는 이제 서울이 아닌 시골로, 그리고 세트로 향하지. 무너진 탄광 내부에서 전개되는 장면 상당수는 촬영소에서 찍혔겠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촬영소의 풍경을 가늠해 볼 수는 없어. 촬영소란 스크린에 떠오를 가상적 장소를 위해 그 자체의 장소성은 철저히 감춰야만 하는 곳이라고 했던 걸 기억하지? 그러니까 답십리촬영소의 마지막 모습은 이 영화의 화면 속 어딘가에 분명히 있어.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야.

너도 알다시피 이 촬영소를 운영했던 부부의 아들은 훗날 서울을 드물게 영화적인 도시로 포착해 내는 세계적인 감독이 돼. 그는 대학 시절 우리에게 중요한 장소 가운데 하나였던 신림극장이 꽤 특권적인 장소로 등장하는 영화로 데뷔했지. 너와 함께 장선우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보러 처음 찾아간 이후 한 달에 두세 번씩 가곤 했던 곳이지. 내가 은밀히 알아볼 수 있는 서울의 어떤 장소가 스크린에 떠오를 때 움트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이 영화로 처음 알았어. 영화 보는 동안 우리를 기분 좋게 달뜨게 했던 그곳의 습한 불온함도 이 영화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퇴계로에서 종로 사이를 배회하다가 을지로3가의 명보극장에 걸려 있는 포스터를 보고 표를 사서 입장했던 기억이 나. 하지만 너는 이 영화를 볼 수 없었지.

대체 이 책을 왜 쓰는 것이냐고? 나는 이 책이 결국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이 책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어. 영화의 시대가 어떻게 끝나 갔는지를 증언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세대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야. 나도 알아, 이런 느낌은 터무니없다는 것을. 어떤 세대에 부과된 임무 같은 게 있다는 믿음은 그야말로 근대적 망상의 전형이라는 것도. 하지만 느낌을 이기는 앎은 없고, 충동을 제압하는 지식은 없고, 예감을 말살하는 증거는 없어. 느낌과 충동과 예감으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처음으로 내가 평론가라기보다 작가로서 쓰는 책이야. 물론 경계해야 할 것들도 있지. 영화의 시대가 어떻게 끝나 갔는지를 증언하는 건 영화의 끝을 증언하는 것과 달라. 분명 영화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다만, 이런저런 예술 가운데서, 이런저런 매체 가운데서, 이런저런 오락 가운데서, 이런저런 상품 가운데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쉼 없이 분투해야 하겠지. 영화가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시대는 두 번 다시 도래하지 않을 테니까. 영화의 시대가 끝났다는 건 바로 이런 뜻이야.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지나간 일을 떠올리되 무용담이나 추억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겠지. 과거는 보존되는 소장품이 아니라 소멸하는 연료가 되어야 해. 기념비를 세우려고 안달이 난 자들을 까맣게 불태워 버리기 위한.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 그리고 영화를 둘러싼 상황들이 변할 때 그 징후는 우선 장소에서 나타나. 영화의 장소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영화관을 떠올리지. 영화관이 애초부터 영화의 장소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오랫동안 영화의 장소를 대표하는 곳으로 여겨졌던 건 사실이야. 1895년의 어느 겨울날,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만든 영화 열 편을 처음 공개한 곳은 파리 그랑카페 지하의 살롱이었지. 지금 그 자리엔 호텔이 들어서 있고 살롱은 투숙객에게 조식을 제공하는 식당이 되었다고 해. 여하간 새삼 곱씹어 볼 만한 거라면 카페 지하에 마련된 살롱이라는 장소의 성격이지. 영화는 완전히 깜깜하지는 않은, 어렴풋이 자신을 내비치는 장소에서 사람들과 처음 만났어. 그야말로 소셜 미디어, 사교의 매개체였던 셈이지. 이처럼 사교를 주선하던 영화는 관객을 동원한다는 상투구 따위는 아직 알지 못했어. 영화가 지극히 바그너적인 어둠의 장소를 환영의 거처로 삼아 살롱에서 극장으로 옮겨 가면서 비로소 관객은 동원의 대상이 되지. 영화의 시대는 그렇게 열렸어.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전혀 소셜하지 않은 소셜 미디어의 시대, 동종적 개체들 간의 폐쇄적 결속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호모소셜하기 짝이 없는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영화는 도처에 퍼진 무빙 이미지 일반의 한 특수한 사례가 되었어.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무빙 이미지는 가장 값싸게 구할 수 있는 ‘드러그’야.

어쩌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나는 이것을 우리의 무용한 언어로, 우리의 대화를 이루었던 고대의 언어로 숙고해 보려 해. 그런데 세계적이지도 지역적이지도 않은 너와 나의 경험으로 영화의 시대가 어떻게 저물어 갔는지를 보편적으로 서술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토록 덧없는 경험으로? 세계 영화사의 흐름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20세기 한국 영화사의 끝자락을 통과해 온 우리가 어떻게 시대의 황혼을 보편적으로 증언할 수 있을까? 내가 믿는 구석이 있다면 이런 것이겠다. 영화란 매우 독특한 인류학적 고찰의 대상이라는 것, 때로 인류학적 고찰은 문명의 중심보다는 주변에서 훨씬 강력한 통찰을 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 그런데 하필이면 왜 황혼이냐고? 새벽은 하루의 시작에 지나지 않지만 황혼은 하루의 반복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했어. 그의 말대로라면 어떤 시대의 황혼을 증언한다는 것은 그 시대 전체를 증언한다는 뜻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이런 편지를 띄우는 거야. 바로 지금.

유운성
영화 평론가.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사 및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2001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2016년 비정기 영상 전문지 『오큘로』를 창간해 현재까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유령과 파수꾼들』(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2021), 『식물성의 유혹』(2023), 『물듦』(2025)이 있고,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2023)를 번역했다. 2025년 제4회 정점식미술이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