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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연대기 1: 한국 SF의 시작, 「해저여행기담」
이지용

2024년 6월 25일 게재

‘한국 SF 연대기’는 격주마다 연재됩니다.

한국에 SF가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재일 유학생들이 발행한 『태극학보』(太極學報)에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 1870)를 번안한 「해저여행기담」(海低旅行埼譚)이 실리면서부터라는 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바다. 때문에 한국의 SF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을 꼭 언급해야 하지만 단순히 쥘 베른의 작품을 번안했다는 것 외에는 이제까지 별다른 의미 부여가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왜 하필 이 작품이, 유학생들에 의해 한국에 소개되었는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다. 작품을 중심에 두고 매체와 인물, 그리고 그를 둘러싼 시대를 살펴야 한다.

『태극학보』는 1906년 8월 24일 창간되어 1908년 12월 통권 27호를 끝으로 폐간된 간행물이다. 「해저여행기담」은 8호부터 연재를 시작해 세 번의 휴재를 거치며 21호까지 총 11회 연재되었다.(주 1) 작품을 언급하면서 작가(여기서는 역자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1회에는 프랑스인[法國人] ‘슐스펜 씨’의 원저를 ‘박용희’(朴容喜)가 번역했다고 쓰여 있지만, 6회에 와서 번역자가 ‘백락당’(白樂堂)으로 바뀌고, 9회에는 ‘모험생’(冒險生)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등장한다. 여러 문헌을 살펴보건대 처음 번역자로 소개된 박용희는 1913년 동경제국대학교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여러 간행물에 관여했으며,(주 2)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 운영에도 참여한 인물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이렇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인물은 간행물의 인지도에 도움이 되었을 터인데 굳이 다른 필명으로, 그것도 여러 번 고쳐 표기할 까닭이 있었을까? 그보다는 저작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도판 1. 『태극학보』 8호(1907)에 실린 「해저여행기담」 1회. ‘해저여행’이라는 제목 아래 ‘기담’이라고 작게 쓰여 있다.

작품 제목 역시 미묘한 변화를 보인다. 처음 연재할 당시 제목은 ‘해저여행’이었고, ‘기담’은 그 아래에 작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다가 3회부터 비로소 제목에 ‘기담’이 붙어 ‘해저여행기담’으로 명명되더니 연재 종료 직전인 10회에 가서는 다시 ‘기담’이 삭제되고 ‘해저여행’으로 바뀐다. 작품의 기획과 번역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심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한글로 된 정기간행물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발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짧은 연재 기간 중간에 저작자가 두 번이나 바뀌고 제목 또한 일관되지 않다는 점은 애초에 「해저여행기담」을 연재한 이유가 그저 재미있는 소설을 소개하는 데 있지 않았을 거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연재 분량도 「해저 2만 리」의 극히 일부분에 그칠뿐더러, 이야기 자체가 미완인 상태로 종료된다. 더욱이 「해저여행기담」이 단순 번역물이 아닌, 원작의 내용을 편집하고 수정한 번안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대입하면 이 작품이 순전히 쥘 베른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연재된 것은 아니었다는 짐작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유로 1907년부터 1908년까지 「해저여행기담」이 『태극학보』에 연재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는 잡지의 성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태극학보』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가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건너가기 시작한 인재들이 모여서 만든 태극학회의 간행물이다. 단체의 목적은 학술 보급과 애국 계몽 운동이었다. 이들이 정기간행물을 창간한 이유도 어디까지나 “우리 동포 국민의 지식을 개발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고자 하는 조그마한 정성”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다.(주 3)

이러한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해저여행기담」은 단순히 문학 작품으로서 소개된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주 4) 당시 한국이 “논픽션에 순치될 것을 어려서부터 교육받아 왔고 또 그만큼 그에 익숙”했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아무리 신문물을 받아들인 유학생들이라 할지라도 이는 파격적인 것이었다.(주 5) 그럼에도 자못 과감한 행보로 보이는 이러한 모습들은 당시 유학생들이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다양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러한 사실까지 확인하고 나면 과학기술에 대한 계몽을 위해 선택한 텍스트가 왜 하필 쥘 베른의 작품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해저여행기담」 외에도 1908년에 이해조가 쥘 베른의 「인도 왕비의 유산」(Les Cinq Cents Milions de La Begum, 1879)을 번안해 「철세계」를 발표하는 등 한국의 초창기 SF는 쥘 베른의 작품에 집중되는 모습을 보인다. 「철세계」에서는 무려 ‘과학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장르를 밝힌 것을 감안하면 ‘기담’이라고 규정한 「해저여행기담」보다 이해조의 『철세계』를 본격적인 SF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이유는, 당시 과학소설이라는 단어가 장르의 특성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용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판 2. 이해조의 『철세계』 도입부. 상단에 ‘과학소설’이라고 명명해 놓았다.

통상적으로 SF(Science Fcition)는 1920년대 휴고 건즈백이 그가 발행하던 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스』(Amazing Stories)에서 언급한 ‘Scientifiction’에서 연유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장르적 특성을 규정하는 용어로서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Science-Fiction’라는 단어 자체는 1851년에 발행된 윌리엄 윌슨의 책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캠벨은 ‘시에서 허구는 진실의 반대가 아닌, 부드럽고 매혹적인 유사물’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특히 그 자체로 시적이고 ‘진실된’ 흥미로운 이야기와 어우러져 과학적 진실을 드러낼지도 모를 과학-소설(Science-Fiction)에도 적용되는 말이다.”(주 6)

그러나 여기서 윌슨이 장르로서 구분되는 용어로서 ‘과학-소설’이라는 말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반해 휴고 건즈백은 단순히 어떤 소재나 성격, 경향에 대한 표현을 넘어 일정한 에피고넨이 확립된 장르적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SF가 하나의 정형화된 장르로서 확립될 가능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세계』에 ‘과학소설’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장르적 구분을 인식하고 쓴 용어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1900년대 초반 중국과 일본에서 쥘 베른이나 허버트 조지 웰스 등이 쓴 SF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영향에서 나온 도식적 분류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즉 담론적 차원에서 「해저여행기담」에서 언급한 ‘기담’과 『철세계』에서의 ‘과학소설’이라는 명칭에는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 없다.

각설하고, 다시 ‘왜 쥘 베른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쥘 베른의 소설이 가진 메시지의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장르로서의 SF가 성립되기 이전까지 과학소설의 태동(주 7)을 이끌었던 메리 셸리와 에드워드 벨러미, 쥘 베른, 허버트 조지 웰스 등이 쓴 소설들은 각기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과학기술과 그것이 구현된 미래를 주로 다룬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지만, 그중에서도 쥘 베른의 이야기는 과학지식에 따른 논리적 추론을 강조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다. 그는 과학기술을 통해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미래를 제시했고, 현실 가능성을 타진하며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구성했다. 합리적인 상상력을 구현한다는 SF의 고유한 이야기 방식인 ‘외삽’(extrapolation)이 그를 통해 시작되었다고도 일컬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 방식이 한국에 쥘 베른의 작품들이 가장 먼저 소개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SF는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과학기술 자체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과학이라는 생소한 개념의 필요성을 계몽하기 위한 도구였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 유행했던 웰스의 작품보다 쥘 베른의 작품이 먼저 소개된 것은 과학기술로 인해 변화하게 될 사회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에 쥘 베른의 작품이 좀 더 용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웰스가 과학기술의 구현 가능성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했던 반면, 쥘 베른은 현재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소재들을 이야기에 등장시키면서 (때문에 쥘 베른의 작품에서는 잠수함이나 비행체 같은 구체적인 탈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실현 가능성을 강조한다. 이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견지가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레퍼런스로 작용했고, 그것을 인지한 유학생들이 쥘 베른의 작품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중국이나 일본을 위시한 동아시아 국가에 쥘 베른의 작품이 먼저 소개되어 SF의 저변이 형성되었던 근본적인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유학생들이 쥘 베른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의도했던 것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한 제반 학술로서 과학이 좀 더 알려지고,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부국강병에 이르는 것이었다. 때문에 1907년의 「해저여행기담」은 문학 장르인 SF로서 한국에 소개된 것이 아니라 서구화, 근대화를 완성한 국가에 대한 청사진으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차 독자가 유학생인 지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번역 대신 인물의 이름 등을 바꾸고 설정을 현지화해 번안 과정을 거친 것 또한 이러한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저여행기담」에서 나타난 SF에 대한 인식은 이후 한국 SF의 도입기를 이루는 작품들, 즉 이해조의 「철세계」부터 김교제의 「비행선」(1912), 웰스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 1895)을 번역한 김백악의 「80만 년 후의 사회」(1920), 카렐 차페크의 「R.U.R」(Rossum’s Universal Robots, 1921)을 박영희가 번역해 『개벽』에 연재한 「인조노동자」(1925)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물론 1920년대에는 단순히 과학기술로 변화될 사회에 대한 프로파간다로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인식의 확장이 이뤄지지만, 기본적으로 과학과 SF를 받아들이는 인식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짧게는 1970년대, 길게 보면 1990년대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진다. 약 100여 년 동안 과학은 외부에서 유입된 일종의 아이템이었던 셈이다.

「해저여행기담」에서 해수와 전기에 대해, 그리고 공기의 구성 성분 등 과학기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은 원작의 내용을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넌지시 그 취지와 맞지 않게 종교적인 기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컨대 2회에서 원작에 없는 성경 「빌립보서」 4장을 인용하면서 “‘구주는 가장 약한 자에 더욱 동정을 표하신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장래에 극락의 천당과 최강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은 이 작품이 왜 소개되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주 8)

도판 3. 『태극학보』 9호(1907)에 실린 「해저여행기담」 2회. 원문에 없던 성경을 인용하며 부국강병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첫 SF로서 쥘 베른의 작품이 소개된 것은 당시의 사회 분위기나 일본의 영향력 등을 차치하더라도 그의 작품이 유학생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에게 두루 신문물로서의 과학기술을 계몽하기에 적합한 텍스트였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의 계몽은 과학기술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인해서 부강해질 나라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그를 위해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프로파간다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쥘 베른의 작품은 국가의 부강을 위한 청사진이었다. 구한말 근대화를 위한 열망, 조국의 부국강병을 통해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지식인층의 요구들이 한국에 SF라는 장르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이 SF를 과학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고, 계몽을 위한 방법으로만 여기는 것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히려 이후에 한국 SF의 침체기를 불러오게 되는 건 시간이 더 지난 다음의 일이지만 말이다.



1. 한국학문헌연구소, 『한국개화기학술지』(韓國開化期學術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8) 참조.

2. 『공수학보』(共修學報), 『대한학회월보』(大韓學會月報), 『선구』(先驅) 등 다수의 간행물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3. 「태극학보 발간의 서」, 『태극학보』, 1호, 1906년 8월 24일.

4. 구한말 서구 문물이 들어오며 시작된 과학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져, 1920년대가 되면 ‘과학’이 곧 ‘문명’과 동의어로 여겨질 정도였다. 백지혜, 「1910년대 이광수 소설에 나타난 ‘과학’의 의미」, 『한국현대문학연구』, 14호(2005) 참조.

5. 조남현, 『소설원론』(서울: 고려원, 1982), 30.

6. William Wilson, A Little Earnest Book Upon A Great Old Subject (London: Daton and Co., Holborn Hill, 1851), 138-139, 강조는 원문.

7. 고장원은 이 시기를 ‘선구적 시기’로 부르기도 한다. 고장원, 『세계과학소설사』(서울: 채륜, 2008) 참조.

8. 『태극학보』, 9호, 1907년 5월 3일, 47; 한국학문헌연구소, 『한국개화기학술지』, 2권(서울: 아세아문화사, 1978), 118.

이지용
문화 평론가, SF 연구자. 『한국 SF의 스토리텔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 사업단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로 『한국 SF 장르의 형성』이, 공저로는 『비주류 선언』, 『SF 프리즘』, 『인공지능이 사회를 만나면』, 『인류세 윤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