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평론이 서로 이어지고 생성되는 두 번째 회로가 출간되었다. ‘유령작업실’ 2호 『누가 화이트 큐브를 두려워하랴—그래픽 디자인을 전시하는 전략들』이다. 이번 호가 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실물은 화이트 큐브로 들어간 그래픽 디자인이다. 지난 18년간 10회의 단독 전시회를 열고, 112회의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기획한 전시도 4회에 이르는—한마디로 화이트 큐브 따위 두려워하지 않을 것만 같은—두 저자가 200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에서 열린 그래픽 디자인 전시회를 돌아보며 토로하는 첫마디는, 그래픽 디자인 전시의 어려움이다.
그래픽 디자인 전시의 어려움
가장 먼저 언급하는 어려움은 ‘맥락의 실종’이다. 애초에 일상에서 쓰이라고 만든 물건을 이른바 현대 미술 작품 전시의 기본 조건인 ‘화이트 큐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작품을 충분히 경험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예컨대 곁에 두고 읽으라고 만든 책을 흔히 파손의 우려 때문에 유리관 안에 전시하면, 우리는 그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두 번째 문제는 디자인이라는 사회적 행위의 왜곡이다. 아무리 사소한 작업이라도 그래픽 디자인은 사회 속에서 전문가들의 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이런 작업에서 한 디자이너나 팀을 작가로 지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면 “선택된 디자이너의 상징적 지위를 일시적으로 격상시켜 줄지 몰라도, 결국에는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왜곡하고 진정한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 방해가 된다.”
“미적인 한계도 문제다. 그래픽 디자인 작품은 광활한 백색 공간에서 감상하라고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그런 곳에서는 미적 효과가 약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작품이 대개 작고 납작한 탓도 있다. 디자인된 사물의 가치는 회화나 조각처럼 자율적이지도, 자명하지도 않다. 그 미감은 기능, 의미, 시기, 장소 등과 연관해 복잡하게 작동한다. 불합리한 작가 표기 관행과 맞물릴 때, 이는 한층 곤란한 문제가 된다.” “디자인 전시회가 너무 많은 작품으로 붐비는 경향을 보이는 데도 미적 자신감 부족이 작용하지는 않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소박한 사물이 장엄한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올 때 느껴지는 위축감을 물량으로 보충하려는 의도인지, 그래픽 디자인 전시회는 종종 여백이 부족한 고밀도 공간을 창출하곤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서사 없이 양으로 채워진 듯한 전시는 개별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더욱 축소할 뿐이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시하는 전략들의 어려움
그래픽 디자인과 화이트 큐브가 맺는 이러한 관계를 몰랐을 리 없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들은 그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시도해 왔다. 맥락 실종의 어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최종 결과물은 어디에도 전시되지 않은 전시, 혹은 아예 전시회 자체를 디자인 대상으로 삼아 이러한 맥락의 부재 문제를 드러냄과 동시에 맥락을 부여한 전시,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왜곡되는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 사회적 과정 자체를—말하자면 디자인이 진행되는 현장 즉, 작업실을—화이트 큐브로 통째로 옮긴 전시, 그래픽 디자인 전시가 지니는 자기 지시적 속성을 이용해 화이트 큐브를 전용하고 교란한 전시, 미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시에 이용되는 매체와 기법을 극단까지 실험한, 어떻게 보면 다원 예술에 어울릴 법한 전시까지, 다양한 전략이 구사된다.
그 밖에도 저자들은 처음 언급된 어려움이 모조리, 혹은 일부 노출된 전형적인 그래픽 디자인 전시회부터 데이터베이스에 기초한 전시, 똑같이 데이터베이스에 기초하더라도 의도와 목적에 따라 다른 결과와 효과를 창출한 전시, 최종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 어느 정도는 픽션의 성격을 띠는 그래픽 디자인 활동의 본질을 드러내 대체 현실을 탐구하는 비평적/공상적 디자인 전시, 팬데믹 이후 가속이 붙은 온라인 전시 조건을 실험한 전시 등을 살피고, 그 전략들의 실효를 분석한다. 전략의 실천들을 회고적 시점에서 돌아보고, 당시에는 선명히 드러나지 않았던 약점을 간파하고, 미래로 끌어 쓸 수 있는 잠재한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래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시하는 전략들의 다음 행선지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우리가 그래픽 디자인을 전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흔한 물건들의 폭넓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성찰해 볼 흔치 않은 기회를 창출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책이나 웹사이트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시회는 물리적인 거리를 굳이 극복하고 전시장을 찾아 다른 관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집단적 감상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동 경험이 바로 팬데믹으로 가장 심각하게 약화한 기능이다.”
역으로 팬데믹은 우리에게 전시‘회’(會)의 의미, 즉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모인 관객의 현존과 참여의 의미를 재고하게 하는 한편, 현장 전시와 물리적 한계가 없는 전시가 함께 맞물려 창출하는 새로운 전시 영역을 탐구할 계기를 마련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책에 실린, 그간 명민한 그래픽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들이 계발하고 실험한 전략들을 모르고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시한다는 건 제법 무모한 짓이라는 것이다.
발췌
이 책은 ‘그래픽 디자인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가’ 하는 기본 질문에서 출발한다. 각 장은 우리가 관심을 두는 개념과 접근법을 다루지만, 그런 주제를 추상적으로 논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전시 사례들을 통해 살펴본다. 그러므로 이 책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우리가 관심 있게 보거나 의미 있게 참여한 그래픽 디자인 전시회들의 짤막한 리뷰 모음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8쪽)
그래픽 디자인 전시에 내재하는 문제는 반대급부로 새로운 기회를 암시하기도 한다. 작품을 원래 맥락에서 분리하면, 직접적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려워지는 대신 비판적 성찰에 필요한 거리를 얼마간 확보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픽 디자인은 일상생활에 너무나 밀접히 얽혀 있기에, 실제 맥락 안에서는 잠시 멈추고 디자인의 존재나 기능, 의미를 일부러 생각해 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미술관은 사물을 고립해 관조하는 데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 준다. 덕분에 우리는 일상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54쪽)
2005년에 비교하면, 2014년에 열린 메비스 판 되르선 회고전에는 훨씬 관습적인 디스플레이 방법이 쓰였는데, 이는 작가들이 성숙했다거나 보수화한 증거라기보다 오히려 미술관 전시 제도를 반어적으로 비꼬는 비평에 가까워 보였다. 퍽 상세히 작성되고 작품보다도 크게 표시돼 전시장을 시각적으로 지배하는 캡션은 이런 관찰을 뒷받침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미술 전시회에서 보조적 지위에 머무는—작품 이해에는 필요해도 감상에는 방해만 되므로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되어야 하는—캡션에 주인공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그래픽 디자인의 문화적 위계를 꼬집는 자조적 농담처럼 보이기도 했다.(62쪽)
‘작업실을 전시장으로 옮겨 일정 기간 그곳에서 공공연히 운영하며 작품 생산 과정을 실시간으로 공개한다’—언뜻 기발하고 재미있는 발상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이 ‘재미’의 정체는 뭘까? 예술과 삶이 마침내 만나는 순간에 관한 상상일까? 창작자의 신비한 내면에 들어가는 열쇠에 대한 기대일까? 아니면 좀 더 불길하게, 리얼리티 TV처럼 타인의 일상을 엿보고 싶다는 관음증일까? 그렇다면 혹시 그런 충동을 부채질하는 전략은 전시(exhibition)를 노출증(exhibitionism)으로 변질시켜 관객의 관음증과 공모를 꾀하는 악덕 아닐까?(111-112쪽)
그런데 특정 전시의 성과와 성패를 따지기 전에, 디자인과 픽션을 결부하는 전시 전략 일반의 시대적 유효성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 적어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2016년 이후, 대체 현실이나 ‘대안적 사실’은 문화 예술에서 사변적으로 논의되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 정치와 국가 간 정보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가 됐다. 팬데믹과 백신에 관한 음모론이 판치는 상황에서, 사실과 허구를 분간하는 힘은 생사를 가르는 사안이 되기까지 했다. 그러니만큼 공상에 관해 이야기하기는 훨씬 어려워졌고, 행여나 픽션을 만우절 장난처럼 부리는 건 무책임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런데도 ‘진실’은 여전히 고리타분해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디자인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업데이트할 때가 지났다는 뜻이다.(149-151쪽)
혹시 이는 우리가 이 책 전반부에서 관찰한 변화, 즉 그래픽 디자인 전시의 수행적 전환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례일까? 수행, 퍼포먼스, 공연의 사회적 가치는 반복할 수 없는 ‘순간’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데 있다. 작품에 진열된 곳이 어디건 간에, 함께하는 경험으로서 전시회의 ‘회’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도 깊이 관련된 개념이다. 그래픽 디자인을 전시하는 전략이 세계의 네 번째 차원에 좀 더 예민해진다면, 작품의 ‘존재감’이나 ‘아우라’에 대한 걱정을 덜고 실세계 안팎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사건으로서 전시회의 가치를 새삼 소중히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161쪽)
혹시 최근 들어 이런 불일치가 구조화하는 듯한 인상을 받지는 않는가? 한편에서, 그래픽 디자인 결과물은 주로 디자인 페스티벌이나 페어 같은 단기적, 상업적 행사에 위임되고, 비평적 접근을 허락하는 전시회는 디자인을 대상으로 바라보고 해체하는 데 치중하는 나머지 디자이너의 일상적 활동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엿보인다. 즉, 전시 범주가 사회적으로 분업화하는 조짐을 보인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 전시 수용 방식에서는 그런 분화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탓에, 디자인 페어를 찾은 관객은 화려한 피상성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디자인 전시회 관객은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반복된다.(164-165쪽)
서문
그래픽 디자인과 화이트 큐브 그래픽 디자인 매체로서 전시회
뒤늦게 밝히자면—타이포잔치 2013 기획 의도에 관해 | 최성민 리얼리티 전시회
데이터베이스 전시회
허구의 전시회와 허구의 전시회
실세계 전시회에서 실시간 전시회로 디자인 전시회와 디자이너
전시회 목록
참고 문헌
색인
저자 소개
최성민·최슬기
‘슬기와 민’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인 팀이다. 최성민은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타이포잔치 2013을 감독했고, 김형진과 함께 전시회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일민미술관, 2016년)을 기획했다. 저서로 『재료: 언어—김뉘연과 전용완의 문학과 비문학』, 역서로 『리처드 홀리스, 화이트채플을 디자인하다』 『현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란 무엇인가』『왼끝 맞춘 글』 『레트로 마니아』 『파울 레너』 등이 있다.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친다. 최슬기는 김영나, 이재원과 함께 전시회『W쇼—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서울시립미술관 SeMA창고, 2017~8년)를 기획했다. 역서로 『다이어그램처럼 글쓰기』와 『트랜스포머—아이소타이프 도표를 만드는 원리』가 있다. 계원예술대학교에서 타이포그래피와 시각 디자인을 가르친다. 최성민과 최슬기가 함께 써낸 책으로는 『작품 설명』 『오프화이트 페이퍼—브르노 비엔날레와 교육』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 함께 옮긴 책으로는 『멀티플 시그니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