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구축해 온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의 작업 세계를 탐구하는 『집합 이론』이 출간되었다. DDP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2022년 현재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지난 10여 년간 가장 자유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디자인 군도”를 조명한다.
최슬기와 최성민이 함께하는 슬기와 민은 지난 2005년 이래 디자인은 물론 전시, 출판, 저술, 번역 활동을 통해 한국에 전에 없던 디자이너 모델을 실천해 왔다. 이들의 작업은 철저히 그래픽 디자인적이지만 종종 통상적인 그래픽 디자인의 한계를 무시한다. 맥락에서 출발한 단순한 아이디어에 기반하든, 의미에서 출발한 간단한 시각 요소에 기반하든, 이들의 작업은 늘 경계를 흐리고 관습을 뒤집는 결과로 보고 쓰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왔다. 기디언 콩이 쓴 글 「슬기와 민의 작품 설명」은 2017년 슬기와 민이 쓰고 펴낸 『작품 설명』을 중심으로 단순하면서도 미묘하고, 명료하면서도 모호한 이들의 작업 이면의 뜻을 파고들며 독자들을 열린 대화의 창으로 초대한다.
신해옥와 신동혁이 함께하는 스튜디오 신신은 매체의 구조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디자인 방법론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깊이 있게 확장해 왔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만나는 곳에서 재료들의 성질을 적재적소에 실험적 방식으로 구사하는 이들의 작업은 종종 그래픽 디자인의 전통적인 평면성을 3차원 공간으로 승화시킨다. 특히 종이, 인쇄 기법, 제본 방식, 후가공 등의 요소들을 해석해 한 권의 책으로 결합해 내는 이들의 솜씨는 독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국제 공모전에서 골든레터를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미지가 쓴 글 「그러나 오히려 하나의 장소로서」는 2016년 창간된 아시아 영화 전문지 『낭』(NANG)을 중심으로 “구현의 단계에만 고립된 디자이너로서의 역할과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이미지 생산자로서” 신신의 작업 세계를 조명한다.
홍은주와 김형재가 함께하는 홍은주 김형재는 2007년 “여러 참여자들의 글과 작업을 모아 독립된 책의 형태로 묶어 낸다는 점을 제외하면 잡지로 규정지을 수 있는 통념적인 성격은 거의 띠지” 않는 『가짜잡지』를 펴내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엄숙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는 슬기와 민과 달리 종종 능청스러운 얼굴로 진지한 뜻을 암시하는 이들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기획자, 창작자로서 현시대를 이끄는 힘과 그 작동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며, 주어진 상황과 맥락에 맞는 적절한 재료를 찾고 활용하는 데 늘 출중함을 보여 주었다. 특히 정보를 다루는 이들의 능수능란함은 이들이 만든 여러 웹사이트에서 잘 드러나는바, 민구홍이 쓴 「이 웹사이트에 관해: “(오늘부터 우리는…)”」는 “웹의 역사와 함께 홍은주 김형재가 제작한 초기 웹사이트부터 최근 웹사이트까지 모두 엮어 서술한다.”
이세영의 글 「그 어떤 이도 섬이 아니며,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다; 모든 이는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일부이다.」가 밝히듯 이들 세 팀은 지난 10여 년간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참조하며, 맞물려 왔다. “『집합 이론』은 결국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섬이 거대한 대륙의 일부이고 그 아래에서는 하나로 연결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 어떤 이도 섬이 아니며, 해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흐른다.”
발췌
『집합 이론』의 바다에서 우리는 디자이너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의 작업을 만난다. 이들 그래픽 디자인 듀오는 함께 활동하는 디자인 팀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인 디자이너로서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 전시는 여섯 명의 디자이너들이 만들어 내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 지형의 흥미로운 지점을 조명하며 그곳에서 엿볼 수 있는 그들의 작업에 대한 태도와 철학을 이야기한다.
슬기와 민의 여러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명확히 분류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이것이 ‘미술’인지 ‘디자인’인지, 사물인지 아이디어인지, 답해야 하는 질문인지 아니면 질문해야 하는 답인지 단정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성 이면에 있는 의도는 전혀 모호하지 않다. 『작품 설명』은 작품을 읽거나 작품과 ‘대화’하는 일에 독자를 끌어들여 슬기와 민이 탐구하거나 소통하는 의미 또는 아이디어를 탐색하게 한다.
슬기와 민의 작품들과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한 대화의 가능성이 작품의 저자에게 달렸는지 아니면 읽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지, 궁금한 이가 있을 법하다. 나는 양쪽 모두라고 믿는다. 대화란 쌍방향이기 때문이다. 이제 『작품 설명』에 수록된 작품 설명이 있으니, 누구든 그들의 작품과 대화할 수 있다.
디자인은 제약적 글쓰기와 유사하다. 디자이너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대상은 이미 갖춰진 내용과 특정한 얼굴을 지닌 채 다가온다. 다시 말해 디자인은 계속해서 되돌아가 원래의 상을 비춰 보아야 하는, 도돌이표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참조적인 행위를 동반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매거진 『낭』이 구조화되는 방식과 조건은 디자이너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동시에 도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매거진 낭의 구조에서 발생하는 가능성의 공간과 디자이너 신신이 제시한 일련의 시각적 운율을 근거 삼아 밝히고자 하는 ‘하나의 장소’란, 어쩌면 이 글의 전반에 걸쳐 채택된, 매거진 『낭』의 제작자들을 가리키는 무한 대명사의 사용으로 넌지시 소명되지 않았을런지 자문해 본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의 장소로서’ 세워지는 그곳은, 결코 구현의 단계에만 고립된 디자이너로서의 역할과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이미지 생산자로서의 수행적 실천을 통해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하는 ‘주체’의 다중화가 구현된 공간일 것이다.
연표는 역사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는 지표이며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방파제다. 홍은주와 김형재는 연표가 여러 시공간을 함축한다는 점에 매료된 듯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세대와 현대가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를 탐구해 왔다. 김형재가 정보의 시각적 스펙터클을 부여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홍은주는 공상적 영역을 끌어와 극사실적 허구의 연대기를 구축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비게이션 역할을 맡은 두 가지 버튼만으로 콘텐츠를 열람하게끔 사용자를 지배하는 『추상 캐비닛』은 규칙과 제약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보기다. 시청각과 협업한 이 웹사이트에는 각 작가의 영상 작품이 점유한 방 아홉 개가 자리하며, 이를 통해 오늘날 미술 공간과 규칙의 변화 가능성, 가변성에 질문을 건넨다. 이 웹사이트에서 버튼을 터치하거나 클릭할 때마다 산뜻하게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미끄러지는 모습은 을씨년스럽게 아름답다.
들어가는 말 / 김성구
그 어떤 이도 섬이 아니며,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다; 모든 이는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일부이다. / 이세영
슬기와 민
슬기와 민의 작품 설명 / 기디언 콩
신신
그러나 오히려 하나의 장소로서 / 이미지
홍은주 김형재
이 웹사이트에 관해: “(오늘부터 우리는...)” / 민구홍
저자 소개
김성구
계원예술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슬럿 워크 코리아 등 사회 운동 영역에서 디자이너인 동시에 활동가로 참여했으며 현재는 주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한다. 기혜경, 윤율리, 추성아, 현시원, 홍이지 등 여러 기획자와 협업했으며 2015년부터 약 5년 동안 음악가 김사월의 주요 앨범과 공연 홍보 디자인을 맡았다. 2016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에 참여했으며, 2021년 그래픽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 신신, 홍은주 김형재의 단체전 『집합 이론』을 기획했다.
이세영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에서 실내건축으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분과에서 큐레이터 세라 마이스터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예술계에 입문한 후 크고 작은 전시를 기획했다. 대학에서 서양 건축사 및 건축과 디자인 문화, 디자인 전략, 색채학 등의 강의를 하며 2015년부터 ‘nonstandard’의 디렉터로 국내외 예술기관과 함께 디자인 연구 기반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일하고 있다. 예술과 디자인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기디언 콩(Gideon Kong)
기디언 콩은 글을 쓰고 책을 만들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제이미 여와 함께 2018년 소규모 출판사 템퍼러리 프레스를 설립했고, 이 활동과 연계하여 소박한 도서 유통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 라샐 예술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친다.
이미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기획자. 낯선 관계와 뒤얽힌 맥락, 번역된 언어에 관심을 가지며 읽고 쓰고 관찰한다. 서로 다른 지층의 이동과 횡단(trans/cross)으로 인해 생성되는 대화와 예술에서의 호혜성에 주목하고 있다.
민구홍
중앙대학교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미국 시적 연산 학교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다. 안그라픽스와 워크룸에서 각각 5년 동안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으로 일한 한편,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운영하며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활동한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새로운 질서」에서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글쓰기’의 관점으로 코딩을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 『새로운 질서』(미디어버스, 2019)가, 옮긴 책으로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가 있다. 앞선 실천을 바탕으로 2022년 2월 22일부터 안그라픽스 랩(약칭 및 통칭 ‘AG 랩’) 디렉터로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