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 비평
비평은 대개 실제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실물 비평’은 사족에 가까운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실물이기 어렵거나, 실물에 가까운 상태로 머무는 동시대 창작 환경은 실물 비평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인 이유로, 직설주의 ‘실물’ 비평서가 필요하다. 작업실유령은 창작과 평론이 서로 이어지고 생성되는 회로로서 ‘유령작업실’을 펴낸다. 『재료: 언어―김뉘연과 전용완의 문학과 비문학』은 그 첫 번째 책으로, 실물에 입각해 창작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제안한다.
편집자 김뉘연과 디자이너 전용완이 그간 수행해 온 작업은 언어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 문학이나 타이포그래피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결과물(편집/디자인/출판/공연)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그 언어는 종종 지면을 떠나 시공간에 실재하는 사물과 신체로 확장된다. 저자의 말처럼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창작 파트너로 협업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협업의 결과물이 공연으로 표현되는 일은 퍽 드물다. 글쓰기와 타이포그래피가 만나 이처럼 시간과 공간과 신체로 확장되는 일은, 좀처럼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재료로서 언어
책의 전반부 「재료: 언어」는 이 ‘좀처럼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두 사람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 흔적을 좇는다. 문학을 전공하고 잡지사 기자와 출판사 편집자로 일한 김뉘연은 워크룸 프레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제안들, 사드 전집, 사뮈엘 베케트 선집, 입장들 등 개성 강한 총서를 펴내는 한편 편집을 주제로 한 전시회 『비문―어긋난 말들』(2017)을 열고 『말하는 사람』(2015), 『모눈 지우개』(2020)를 썼다. 전용완은 열화당, 문학과지성사 등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2018년 프리랜서로 독립한 후 봄날의책, 아르테 등과 협업하며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한국시인선 등을 디자인했다.
저자는 그들이 작업한 결과물을 구체적인 편집/디자인 실무 차원에서부터 점검하기 시작해, 점차 확장된 영역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편집자로서 책을 기획할 때 고려하는 점을 묻는 질문은 편집과 디자인의 관계, 출판 시장에서 통용되는 디자인 관행, 문학에서 이뤄지는 형식 실험과 그 반응을 살피는 자리로 이어지고, 봄날의책 세계시인선의 타이포그래피에서 시작한 대화는 한국 출판계의 시 조판 관행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여러 쟁점을 거쳐 새로운 운문 조판법을 논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셋의 대화는 어떤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글을 쓰는지 묻는 세세한 사안부터, 편집자와 디자이너를 둘러싼 작업 환경, 근래 느껴지는 한국 출판 디자인의 변화까지 여러 지점을 오간다.
특히 「문학적으로 걷기」(2016), 「수사학—장식과 여담」(2017), 「시는 직선이다」(2017), 「마침」(2019) 등 김뉘연과 전용완이 안무가, 무용가, 음악가 등과 함께 공동 창작한 퍼포먼스 작업은 지금 한국에서 문학과 디자인이 다원예술과 만나는 접면을 살피는, 혹은 문학과 비문학이 어떻게 서로에게 다가가는지 상상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저자는 그들이 “퍼포먼스 작업에 접근하는 방법에는 편집이나 디자인과 맞닿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며 그들이 언어를 재료로 창작한 ‘지침’이 여러 협업자들에 의해 다른 매체로 변환되는 지점을 파고든다. 그들이 창작한 ‘지침’은 내용, 구성, 형식 등은 물론 글쓰기와 타이포그래피, 나아가 종이 매체의 여러 요소에 잠재한 가능성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이는 다시 다른 창작자들의 해석으로 시공에서 재현된다. 한 매체에서 엄격하게 구현된 재료로서 언어는 이렇듯 다른 매체를 통해 열린 몸을 얻는다.
책의 후반부 「문학과 비문학」에서는 작업의 핵심을 보여 주는 도판과, 그에 붙인 저자의 논평이 이어진다. 질문과 대화, 사실과 관계에 기반해 작업의 논리와 결과를 잇고 서술하는 저자의 논평은, 실물이 언어로 바뀌는 순간 잃어버리는 것들을 뒤로하고, 지면 위에 또다시 창작의 흔적으로 남는다.
발췌
출판의 분업화는 텍스트 대량 복제, 공통 지식 확산, 과정의 체계화나 표준화 같은 현대성의 토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리화는 일정한 획일화와 경직된 제도화를 뜻하기도 했으므로, 이에 대한 반성으로 출판 과정을 재통합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일어났다. 이와 유사하게—반드시 연관되지는 않아도—예술에서는 협업이나 학제적 접근을 통해 언어 예술과 시각 예술, 나아가 시간 예술의 중첩 지대를 확대하려는 시도도 적지 않았다. 21세기 초 한국에서 저술가 겸 편집자 김뉘연과 디자이너 전용완이 따로 또는 함께 하는 편집/디자인/공연 작업은 이런 흐름에서 독특한 연장선을 이룬다. (9쪽)
편집은 텍스트를 타인에게 제시하기에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빚어내는, 즉 조형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미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편집과 디자인은 별개 활동이 아니라 연속선에 있는 과정으로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편집은 어디서 끝나고 디자인은 어디서 시작할까? (49쪽)
새로운 시도는 좋지만, 그런 시도가 단순히 공회전에 머물거나 ‘할 수 있으니까 해 보지 뭐’에 그치지 않으려면, 새롭고 이상한 시도가 나올 때 이에 대한 논의와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도에도 의미가 생긴다. (55쪽)
사실, 청바지에 있는 작은 주머니나 재킷 소매에 붙은 단추도 그렇다. 그런 주머니나 단추에 실제 쓸모는 없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나, 지금은 흔적 기관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디테일 덕분에 청바지는 더 청바지다워 보이고, 재킷은 더 재킷다워 보인다. 책이 책다워 보이는 데, 특히 문학책이 문학책다워 보이는 데도 필요한 형식이 있다. 형식의 체크리스트가 제대로 클리어되면 책다운 책이 만들어지고, 의식적으로 형식을 어기면 ‘실험적’인 책이 나오겠지. (71쪽)
나는 한글에서 자간이 좁아진 것도 활판에서 사진 식자로 조판 방법이 바뀔 때 여러 상황과 잘못된 관행이 뒤섞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활판과 달리, 사식에서는 자간을 얼마든지 좁힐 수 있게 됐다.) 그리고 활판 인쇄 시절에는 거의 8포인트 정도로 작은 본문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본문 글자 크기가 10포인트 정도로 커졌다. 판형은 그대로인데 글자 크기가 커지면 같은 행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줄어드는 게 자연스러운데, 이를 억지로 유지하려다 보니 자간이 좁아졌다고 추정한다. 게다가 최근에는 책이 스마트폰과 경쟁하면서 판형마저 작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당연히 판면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때는 글자 크기를 줄여야 하는데, 그렇게는 안 한다. (75쪽)
대개 시는 판면 상단에서 3~5행 정도 띄고 시작하고, 한 편이 다음 면으로 넘어가는 경우 처음과 같은 만큼 띈 행에서 이어진다. 그런데 가령 어떤 시가 다섯 줄 띄우고 시작한다고 치자. 그러고 진행하다가 한 연이 한 면 마지막 줄에서 끝나고 다음 면에서 새 연이 시작하는 경우, 이를 표시해 주려고 다음 면에서는 다섯 줄이 아니라 여섯 줄을 띄고 행이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즉, 한 행을 비우는 것이다. 거의 모든 시집이 이런 방법을 따른다. (83쪽)
편집은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도 같다. 없으면 제대로 된 책을 만들 수 없지만, 책을 읽으며 그 존재를 인지하기는 어렵다. 편집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편집의 부재 또는 실패에서, 즉 문서에서 오류나 문제가 발견될 때 비로소 지각되기도 한다. (187쪽)
전용완은 작품 제목을 ‘마침’으로 정한 데 “이번 공연을 일종의 결산으로 삼자는 뜻”이 있었다고 말한다. 세 지침이 순서를 바꿔 가며 세 차례 반복 제시돼 순환을 마무리하고 고리를 닫아 버리는 책 구조는 일종의 완결을 암시한다. 서두에는 지침에 사용된 낱말이 가나다순으로 망라되어 있는데, 이 역시 “결산” 같은 인상을 강화한다. 그러나 책에서 지배적 비중을 차지하는 공백은 좀 더 열린 미래를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끝맺음이 번복될 때, 끝은 지연되고 완성은 유보된다.” (235쪽)
재료: 언어
문학과 비문학
참고 문헌
참여자 소개
최성민
최성민은 저술과 번역을 겸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저서로 『작품 설명』,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299개 어휘』(김형진 공저), 역서로 『현대 타이포그래피』, 『멀티플 시그니처』(최슬기 공역),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왼끝 맞춘 글』, 『레트로 마니아』, 『파울 레너』 등이 있다. 최슬기와 함께 ‘슬기와 민’으로 활동하고,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친다.
김뉘연, 전용완
김뉘연은 워크룸 프레스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제안들, 사드 전집, 베케트 선집, 입장들, 볼로딘 선집 등을 기획했다. 『말하는 사람』과 『모눈 지우개』를 써냈고, 전시회 『비문—어긋난 말들』을 열었다. 전용완은 열화당, 문학과지성사 등에서 출판 디자이너로 일했고, 현재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봄날의책, 아르테 등과 협업한다. 김뉘연과 전용완은 출판사 ‘외밀’을 공동 설립했고, 국립현대미술관, 아르코 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에서 퍼포먼스 작품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