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문석민, 음악 비평가 신예슬, 작가 오민이 함께 기획한 ‘악보들’이 출간되었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300년간 서양 음악사를 관통하며 동시대 음악에서 맞춰지지 않은 채 남겨진 조각들을 찾는 ‘악보들’은 총 10권으로 기획되었으며, 1권 『비정량 프렐류드』는 그 첫 번째 책이다.
지금-여기에서 관찰되는 음악의 동시대성
‘악보들’의 출발점은 지금-여기의 음악이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음악이 가진 동시대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예컨대 “동시대 음악 실험에서 ‘멜로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선이 사라지고, ‘음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덩어리가 그 자리를 대체한 현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보들’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양 음악사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두 경향의 운동, 즉 음악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보이려 하는) 움직임과, 반대로 먼 곳으로 향하는 (보이지 않으려 하는) 운동을 우리 신체와 맞닿은 ‘노래’라는 틀로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운동성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협력한다. 때때로 간단히 분리해 내기 어려운 상태로 뒤얽힌다. 하지만 서양 음악사의 흐름에서 특정 경향이 더 강하게 또는 독특하게 운동하는 순간들이 도래했고, ‘악보들’은 그 순간들을 포착하려 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움직이는 음악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흔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악보를 통해 긴 여행을 시작한다.
노래하지 않는 선
1권에서 다루는 비정량 프렐류드는 “정량화된 음가와 뚜렷한 박절, 그리고 마디선을 찾기 어려운 프렐류드로, 17세기 프랑스 음악가들에 의해 기록된 장르다. 약 50여 년간 유행했던 이들은 보편의 프렐류드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으로 모음곡을 연주하기 전 손을 푸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이어질 곡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연주됐다.”
그동안 서양 음악사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비정량 프렐류드를 ‘악보들’의 첫 번째 경유지로 정한 이유는, 아마도 노래에서 시작되었을 음악이 노래로부터 한발 멀어지는 움직임이 그곳에서 감지되기 때문이다. “비정량 프렐류드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선들은 어떤 상상을 시작하게 한다. 노래하는 성부에서 목소리가 사라지고, 비정량 프렐류드에 이르러 노래하지 않는 선이 수면 위로 명확히 떠올랐다면, 노래도 선도 아닌 다른 음향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작은 힌트가 그 선에 내재했던 것이라면” “고대의 노래가 동시대의 덩어리로 뭉쳐지는 그 기나긴 흐름 속에서, 비정량 프렐류드는 아마도 꽤 이른 시점에, 그 노래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마련해 준 음악일지도 모른다.”
발췌
‘악보들’은 일종의 운동을 실행한다. 시간 안에서 변화하며 움직이는 소리를 음악이라고 한다면,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운동이다. 한 음악을 관찰하는 과정 역시 음악을 따라 시간 안에서 행하는 또 다른 운동과 같다. 곡과 곡 사이, 작곡가와 작곡가 사이, 시대와 시대 사이를 들여다보는 과정은 시간의 안과 밖을 횡단하는 운동에 가깝다. ‘악보들’이 실행하는 운동은 서양 음악의 안팎에서 음악을 작곡하거나 연주하거나 연구하거나 관찰하는 서로 다른 실천을 통해 얻은 경험의 교환을 동력으로 삼는다.
‘악보들’이 다루는 사례는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300년간 서유럽 지역에서 펼쳐진 음악들이지만, ‘악보들’의 운동은 지금-여기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동시대 음악 실험에서 ‘멜로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선이 사라지고, ‘음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덩어리가 그 자리를 대체한 현상이 출발 지점이다. 오랜 시간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던 선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며, 새롭게 등장한 덩어리적 음향의 근원은 어디인가?
‘악보들’은 음악이 운동해 온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 악보를 경유한다. 악보는 한 음악을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특정 소리를 특정 기호로 명시한 목표 지향적 기록이다. 동시에 각각의 악보는 음악의 재료, 음악의 생산과 재생산 방식, 작곡가와 연주자와 관객의 관계 구조, 음악 생산자와 사용자의 권리 범주를 포함하여, 음악과 그 주변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단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각 권이 다루는 주제와 관점 역시 일련의 악보 더미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라 짐작한다.
서양 음악사에서 성부(voice)라는 단어는 목소리(voice)라는 단어와 동일시되어 왔다. 이는 음악의 성부가 본래 사람 목소리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서유럽에서 목소리는 음역에 따라 소프라노와 알토, 테너와 베이스로 구분되어 왔으나 성부는 차츰 목소리로부터 분화되어 특정 음역에서 연주되는 소리를 지칭하게 됐고, 어느 순간 성부는 목소리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됐다. 어떤 성부는 목소리 없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어떤 성부는 노래하지도 않았다. 선율이라고 볼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하나의 ‘선’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노래에서 성부로, 목소리 없는 성부로, 그리고 노래하지 않는 선으로.
박자표, 마디선, 리듬 없이 음만 적어 둔 악보는 서양 음악사의 초기 악보들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비정량 프렐류드가 등장한 17세기에는 이미 마디선과 박자표가 공통 관습으로 자리 잡은 뒤였다. 서유럽 음악 문화 전반에 적용되는 공통의 기록 체계가 어느 정도 확립된 후에도 리듬과 박자에 대한 분명한 정보를 주지 않는 이러한 기보 방식은 당시로서도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다. 이런 특징 탓에 비정량 프렐류드에는 부재한 기호 대신,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이는 기호나 이 곡들에서만 찾을 수 있는 기호들이 나타났다.
‘선’은, 노래라는 개념이 반쯤 포개져 있는 듯한 ‘선율’과는 조금 다르다. 비정량 프렐류드는 호흡을 초과하는 길이로 프레이즈를 구성하고, 손의 감각이 깊게 배어 있는 음형을 곳곳에 채워 넣었으며, 성대의 음역을 넘어 악기로만 구현 가능한 넓은 음역을 최대한으로 사용했다. 그건 선율이 출발지로 삼아 왔을 노래와는 동떨어진 영역에 있었다. 수많은 음악이 노래를 떠올리며 목소리의 영역 안에서 선율을 구성해 왔다면, 비정량 프렐류드에서는 목소리 없는 성부가 제 나름의 방식으로 몸체를 갖춰 가며 노래의 선율과는 다른 종류의 선을 만든다.
총론: 노래하는 음악, 노래하지 않는 음악
서문: 노래하지 않는 선
드니 고티에
-류트 프렐류드 D단조
-류트 프렐류드 D장조
루이 쿠프랭
-하프시코드 프렐류드 C장조
-하프시코드 프렐류드 D장조
-하프시코드 프렐류드 F장조
-하프시코드 프렐류드 G단조
장앙리 당글베르
-하프시코드 작품집, D단조 모음곡 중 프렐류드
니콜라 르베그
-하프시코드 작품집 1권, A단조 모음곡 중 프렐류드
-하프시코드 작품집 1권, F장조 모음곡 중 프렐류드
니콜라 시레
-하프시코드 작품집 2권, G단조 모음곡 중 프렐류드
프랑수아 쿠프랭
-하프시코드 연주법 중 일곱 번째 프렐류드 B♭장조
-하프시코드 연주법 중 여덟 번째 프렐류드 E단조
저자 소개
문석민
작곡가. 일반적인 악기 소리부터 소음까지 감각 가능한 다양한 소리를 발굴하고 또 그 소리 재료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탐구해 왔다. 미술가, 안무가 등과의 협업을 통해 비음악적인 재료를 음악 안으로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세계 각지에서 디베르티멘토 앙상블, MDI 앙상블, 네오 콰르텟, 앙상블 미장, 앙상블 TIMF 등에 의해 연주되었다.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음악학을 공부했고 동시대 음악을 구성하는 여러 전통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을 썼고, 종종 기획자, 드라마터그, 편집자로 일한다.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 위원을 맡고 있다.
오민
예술가. 시간을 둘러싼 물질과 사유의 경계 및 상호 작용을 연구한다. 주로 미술, 음악, 무용의 교차점, 그리고 시간 기반 설치와 라이브 퍼포먼스가 만나는 접점에서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고 운용하고 소비하고 또 발생시키는 방식을 주시한다. 『포스트텍스처』, 『토마』(공저), 『부재자, 참석자, 초청자』, 『스코어 스코어』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