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 톡, 촉』은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300년간 서양 음악사를 관통하며 동시대 음악에서 맞춰지지 않은 채 남겨진 조각들을 찾는 ‘악보들’ 여섯 번째 책이다. 서양 음악의 역사에서 노래의 선율과 다른 선이 형성되는 장면을 포착했던 『비정량 프렐류드』, 서로 다른 것이 어떻게 한 음악 안에서 양립할 수 있는지 살핀 『판타지아』, 노래하며 노래하지 않는 음악의 변주를 관찰했던 『리토르넬로』,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분화하는 여러 점들을 따라간 『멜로디 과잉』, 그리고 노래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구성의 언어로서 서양음악을 읽었던 『모티프』에 이어, 『틱, 톡, 촉』은 그 자체로서 자기 충족적인 음악을 만들어낸 음형들의 움직임을 좇는다.
지금-여기에서 관찰되는 음악의 동시대성
‘악보들’의 출발점은 지금-여기의 음악이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음악이 가진 동시대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모습인가. 예컨대 “동시대 음악 실험에서 ‘멜로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선이 사라지고, ‘음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덩어리가 그 자리를 대체한 현상”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보들’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양 음악사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는 두 경향의 운동, 즉 음악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움직임과, 반대로 먼 곳으로 향하는 운동을 우리 신체와 맞닿은 ‘노래’라는 틀로 바라본다. “흥미롭게도 이 두 가지 운동성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협력한다. 때때로 간단히 분리해 내기 어려운 상태로 뒤얽힌다. 하지만 서양 음악사의 흐름에서 특정 경향이 더 강하게 또는 독특하게 운동하는 순간들이 도래했고, ‘악보들’은 그 순간들을 포착”한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움직이는 음악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흔적이 구체적으로 담긴 악보를 통해 긴 여정을 이어 간다.
틱, 톡, 촉, 또는 망치 두드리는 소리
오래 전부터 음악의 구심점이 되었던 선율과 달리 음형은 꽤 긴 시간 독립적인 음악의 재료로 쓰이거나 홀로 자기 충족적인 음악을 만들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선율이 없는 상태에서도 몇몇 작곡가들은 충분히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틱, 톡, 촉, 또는 망치 두드리는 소리」는 프랑수아 쿠프랭이 남긴 클라브생 모음곡에 포함된 곡이다. 3도 간격의 음형이 위아래로 계속 튀어 오르는 듯한 이 곡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부서진 화음을 연주하는 듯한 특유의 리듬이다. “드뷔시의 연습곡 「여덟 손가락을 위하여」 또한 음형이 도드라진 작품으로 이 곡에서는 화성이 아닌 음계가 곡의 주요 음형으로 쓰인다. 이 곡에서 음계의 기준점은 마디마다, 때론 박자마다 달라진다.” 이와 달리 “기준음에 단단히 닻을 내려놓고, 그로부터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리 튀어 오르며 어떤 식으로든 되돌아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프로코피예프의 「토카타」는 이와 대척점에 있는 곡이다.
음악의 역사에서 선율은 많은 경우 주요한 자리를 지켰고, 그 밖의 요소들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더 많은 실험이 이뤄진 곳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 부분이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프렐류드가 수록된 『일레보르크 타블라투어』(1448)로부터 프로코피예프의 「토카타」(1912) 사이에는 “머나먼 거리가 있지만 여기엔 어떤 유사성이 있는데, 그건 바로 노래가 아닌 그 주변,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들로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보려는 힘이다.”
발췌
음형 중심의 곡에서는 어떤 항상성이 발견된다. 리듬은 큰 변화 없이 그야말로 평온하게 반복되며, 음악적인 흐름은 주로 음정 구성의 자원이 되는 화성에 의해 결정된다. 로저 스크루턴은 “음형은 건축의 몰딩과 유사하다. 양쪽 끝이 열려 있어 끝없이 반복할 수 있다. 프레이즈를 모티프가 아닌 음형으로 들을 때, 우리는 그 음형이 강렬하고 선율적이더라도 이를 배경에 배치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리드미컬하게 변화하는 모티프나 계속해서 기승전결의 흐름 안에서 무언가를 진행시키는 드라마가 없다. 이는 ‘비서사적인 음악’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14쪽)
쇼팽의 프렐류드와 에튀드에서 음형은 선율을 보조하지 않았다. 그 음악에는 음형을 부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선율 자체가 부재했다. 그 곡을 기억하는 데 가장 유용하게 쓰일 얼굴 같은 선율 없이, 무수한 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긴밀하게 엮이며 하나의 구성체를 이뤘다. 이들은 명확한 기준으로 분리되지 않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음형으로 이루어진 곡에서 음악의 질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재편됐다. (14쪽)
음형으로 이루어진 곡들의 전개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곡들에는 다양한 리듬을 관찰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음형이 지닌 기본적인 리듬이 도드라지기도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화성 리듬, 프레이즈들의 길고 짧음이 형성하는 리듬, 움직임의 폭 변화에서 비롯되는 리듬, 지속과 변화가 교대하며 만들어 내는 리듬 등. 음형 중심의 곡들에서는 훨씬 다채로운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15쪽)
지난 음악의 역사에서 주된 것과 부수적인 것의 자리는 계속해서 바뀌어 왔다. 성스러운 노래를 꾸며 주었던 선율들이 어느새 더 중요한 선율이 된 것처럼, 선율을 위해 움직이던 몰딩과도 같은 음형들이 선율 없이도 자기 충족적인 음악을 만들어 낸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크고 작은 시도들이 만든 전환일 것이다. (16쪽)
총론
노래하는 음악, 노래하지 않는 음악
서문
틱, 톡, 촉, 또는 망치 두드리는 소리
프랑수아 쿠프랭
틱, 톡, 촉, 또는 망치 두드리는 소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프렐류드와 푸가 C장조, BWV 846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연습곡, Op. 10, No. 1
프렐류드, Op. 28, No. 16
프란츠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No. 5 ‘도깨비불’
클로드 드뷔시
연습곡, L. 136, No. 6 ‘여덟 손가락을 위하여’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토카타, Op. 11
오민
예술가. 시간을 둘러싼 물질과 사유의 경계 및 상호 작용을 연구한다. 주로 미술, 음악, 무용의 교차점, 그리고 시간 기반 설치와 라이브 퍼포먼스가 만나는 접점에서 신체가 시간을 감각하고 운용하고 소비하고 또 발생시키는 방식을 주시한다. 『포스트텍스처』, 『토마』(공저), 『부재자, 참석자, 초청자』, 『스코어 스코어』 등을 출간했다.
문석민
작곡가. 일반적인 악기 소리부터 소음까지 감각 가능한 다양한 소리를 발굴하고 또 그 소리 재료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을 탐구해 왔다. 미술가, 안무가 등과의 협업을 통해 비음악적인 재료를 음악 안으로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세계 각지에서 디베르티멘토 앙상블, MDI 앙상블, 네오 콰르텟, 앙상블 미장, 앙상블 TIMF 등에 의해 연주되었다.
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음악학을 공부했고 동시대 음악을 구성하는 여러 전통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을 썼고, 종종 기획자, 드라마터그, 편집자로 일한다.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 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