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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엑조티시즘의 ‘나라’로 들어가는 49개의 창문
한국화

2026년 3월 17일 게재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가는 다른 곳의 문학”, “20세기의 전쟁, 혁명, 인종 청소, 패배에 기억의 뿌리를 둔 국제주의적·세계주의적 문학”, “프랑스어로 쓰인 외국 문학”, “몽상과 정치를 밀접히 뒤섞는 문학”, “공식 문학과 단절하는 쓰레기통의 문학”, “곱씹기와 일탈과 실패의 감옥 문학”, “볼셰비키적 샤머니즘과 관련 있는 소설적 건축물”…. 문학적 평행 우주로 이루어진 앙투안 볼로딘의 ‘검은 공간’을 여러 작가가 겹쳐 읽으며, 현실과 꿈, 삶과 죽음 사이에서 들렸거나 들리지 않은 목소리들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일정한 영토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엑조티시즘 작가들이 발명한 장르인 ‘narrat’를 표음한 것이다. 『미미한 천사들』의 첫 장에서 정의된 나라는 이렇다. “어떤 상황, 감정을 포착해서 고정해 주는, 기억과 현실 사이, 상상과 추억 사이의 흔들림을 포착해서 고정해 주는 소설적 스냅사진들.” [*] 앙투안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 이충민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18, 9쪽. 같은 문단의 끝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주된 존재 이유는 음악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무(無)를 향한 행진을 재개하기 전에 잠시 쉬어 갈 수도 있는 짧은 곡(曲)들.” [*]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 9쪽.

첫 번째 나라를 살펴보자. 여기 ‘나’는 방에 홀로 남아 과거를 회상한다. 현재는 달라졌다. 사람들이 죽었고 세상은 폐허가 되었다. ‘나’는 울고 싶지만 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나라들에서 ‘나’는 거듭 몸을 바꾼다. 이 ‘나’는 레티시아 샤이드만의 이름으로 말하고, 크릴리 곰포, 야사르 돈도그, 나야드자 아가투란을 생각하고, 소르고프 모룸니디안의 신원을 떠맡고, 쥘리 로르샤흐를 염두에 둔다.

“그러다 어떤 나라에 이르면, ‘나’는 마침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나는 이제 내가 빌 샤이드만인지 마리아 클레멘티인지 알지 못했다. ‘나’라는 말에는 별 뜻이 없다. 나는 내 안에서 누가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어떤 지성체들이 나를 만들어 냈거나 관찰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죽었는지─죽은 남자인지 죽은 여자인지─아니면 곧 죽을지 알지 못했다.” [*]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 152쪽.

나라 안의 ‘나’라는 서술자가 분열적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우리─여기서 우리란 독자를 가정한다─는 나라 안의 ‘나’ 말고도 나라 밖의 ‘나’의 존재를 감지한다.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나라 밖의 ‘나’로는 이 책의 저자인 앙투안 볼로딘이 있다.

앙투안 볼로딘은 엘리 크로나우에르, 마누엘라 드래게르, 루츠 바스만 등과 함께 ‘포스트엑조티시즘’ 작가 집단을 이룬다. 이들은 이승을 떠난 혼이 다음 생으로 환생하기 전 49일 동안 머무는 중간적 세계, 즉 중음(中陰), 바르도를 구현하는 49권의 작품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25년, 마누엘라 드래게르가 포스트엑조티시즘의 48번째 작품 『유년의 순간』(Arrêt sur enfance)을 발표하면서 이 세계를 완성할 마지막 한 권만 남게 되었다. 2026년 여름 출간 예정인 이 작품의 제목은 『타르로 돌아가다』(Retour au goudron)이다. 『타르로 돌아가다』는 이미 작품을 발표한 루츠 바스만, 마누엘라 드래게르, 앙투안 볼로딘뿐만 아니라, 감옥 안에 수감된 작가를 포함한 포스트엑조티시즘 공동체 전체, 이른바 ‘인페르누스 요한네스’라 불리는 거의 100명의 작가들이 서명했다. 이 작품은 개별 작가의 서사보다 포스트엑조티시즘의 공동 시적 가치를 추구하며, 343개 파편으로 구성된다. 343은 7의 제곱수 즉 49에 7을 곱한 수로, 49일의 바르도를 일곱 번 반복하는 숫자와 공명한다.

이러한 포스트엑조티시즘 작가들의 시도는 그 독창성과 방대함, 그리고 그들이 그려 내는 세계의 완성도로 볼 때 우리가 책에 기대하는 일반적인 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 시도는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구조는 장르의 경계나 서사의 인과율 같은 익숙한 뼈대 위에 서 있지 않다. 장면들은 원인에서 결과로 흐르는 시간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대신 삶과 죽음, 꿈과 깨어남, 밤과 낮이 순서 없이 병존하는 공간 속에서 펼쳐진다. 서사가 전진하는 대신, 어떤 공간을 점유하며 이미지를 생성한다. 이러한 시도가 건축적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그려 내는 세계는 폐허다.

모두가 모두와 싸운 후의 세계, 인류의 번영을 향한 시도가 끝내 실패한 세계. 볼로딘은 20세기의 역사가 이 세계를 그려 내는 영감의 원천이었다고 밝혔는데, 그 역사란 다름 아닌 전쟁과 수용소, 홀로코스트의 역사다.

49권의 책은 이 세계로 들어가는 네모난 창문이 된다. 그렇다면 이 창문은 이 세계로 들어가는 창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혹시 이 세계로부터 나가는 창문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세계에 갇혀 있는 창문? 혹은 이 세계가 반복되는 창문?

이 창문은 어디에 나 있는 창문인가?

『미미한 천사들』의 첫 나라에서 ‘나’는 우울한 저녁이면 한 줌 남은 창문 앞에 쭈그려 앉는다. [*]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 11쪽. 그 창문으로 그는 바깥을 보기보다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유리가 뿌옇게 흐려진 탓에 그 형상마저 탁하게 보인다. 그 탁한 형상은 “공 모양 비슷한 것이, 살아남느라 판지처럼 빳빳해진 얼굴이, 왜 살아남은 건지 모르겠지만 역시 살아남은 머리 타래” [*]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 11쪽. 이다.

포스트엑조티시즘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감각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존재는 언제나 어떤 사건이 일어났음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핵폭발이기도, 학살이기도, 문명의 붕괴이기도 하다. 살아남은 자들 바깥에는 죽은 자들이 있고, 그 죽음과 삶 사이의 경계를 가로질러 남겨진 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감각하는 세계는 오히려 그들의 언어, 기억, 몸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봐서 죽음의 것에 더 가깝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도처에 즐비한 죽음과 그 죽음의 환영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그 환영을 재현한다.

“한밤의 산들바람조차 곰팡내, 가금 사육장의 악취, 온갖 종류의 짐승과 인간의 똥 냄새를 실어 왔다. 섬유질에 축축하고 검고 불결한 게토의 비루한 냄새였다. 봉기 이전의 절망과 시체 매립지의 냄새였다.” [*] 앙투안 볼로딘, 『메블리도의 꿈』, 이충민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20, 23쪽.

“버스 안에서는 이제 아무도 기침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혹은 생명에 필요한 성분이 전무한 환경에 적응해 있었다. (…) 우리는 모두 쓰레기 태운 냄새를 풍겼다.” [*] 볼로딘, 『메블리도의 꿈』, 354쪽.

볼로딘은 『메블리도의 꿈』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새 한 마리가 전차 철로를 건너던 그의 어깨에 날아 앉았던 일과 얼마 후 피리새 한 마리가 그의 발코니 창문에 날아와 부딪힌 일화를 소개한다. 새들이 포스트엑조티시즘의 창문에 날아와 부딪혔다. 창문으로 돌진하며 스스로를 죽였다. 어떤 새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들은 돌연변이가 되었거나 시체를 파먹으며 ‘삶’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남은 다른 돌연변이 인간을 공격하기도 했다. 작은 새들은 총알처럼 몸을 관통했다.

“ “그게 내 심장에 구멍을 낼 뻔했어.” 내가 말했다.
“뭐가?” 고르가가 물었다.
“새가.” 내가 말했다. “녀석이 내 허파에 구멍을 뚫었어. 지금은 우심실 옆에서 꿈틀거리고 있어.”
“쳇, 네 심장은 뛰지 않은 지 오래되었어.” 고르가가 현자처럼 말했다. “처음부터 뛰지 않았다고.” ” [*] 볼로딘, 『메블리도의 꿈』, 361쪽.

이 세계에서 ‘삶’은 처음부터 뛰지 않은 심장이다. 혹은 죽음을 유예하는 동시에 그 죽음을 선행하는 행위다.

『미미한 천사들』의 주요 인물인 빌 샤이드만은 처형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처형 임무를 맡은 노파들은 집행을 번번이 미룬다. 그는 자신에게 선고된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에 하나의 나라를 읊조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32번째 나라가 시작될 무렵, 빌 샤이드만을 묶어 놓은 포승줄이 썩어 끊어지고 만다.

빌 샤이드만은 포승줄이 끊어졌음에도 도망가지 않는다. 심지어 노파들조차 그가 도망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처형하지 않는다. 그는 도망가지도(완전히 살아남지도), 총살당하지도 않는다. “그는 생사의 경계에서 나라들을 중얼거리는 아코디언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다.” [*] 볼로딘, 『미미한 천사들』, 113쪽.

포스트엑조티시즘의 세계에서,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을 사는 이들은 형벌을 받듯 이 상태를 되새김질한다. 죽음이 없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고, 끝이 없다는 것은 반복만이 있다는 것이다.

되새김질. 혹은 반추. 이 모티프는 각각의 책에서, 그리고 끝내는 49권의 책 전체를 아우르며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이 처음도 끝도 없는 세계에 떨어진, 혹은 부딪힌 인물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곳에서 죽음과 삶 조각을 되씹고 있다.

가끔 이들은 이 형벌과도 같은 반복의 고리를 끊으려는 시도를 한다. 『메블리도의 꿈』에서 메블리도는 창문을 통해 ‘궤도 이탈’, 혹은 ‘이동’, 혹은 ‘여행’, 혹은 ‘환생’을 명령받지만, 그에게는 들어가야 할 창문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겨우 통과한 창문에서 메블리도가 맞닥뜨린 것은 끊임없는 무(無)다. 그는 자신을 잊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 지난한 구간을 통과해야 한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그는 그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메블리도가 문이 아닌 창문으로 나가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누가 창문으로 나가는가 ? 메블리도는 창문에 부딪혀 죽은 새다.

“ “창문이 저기 있어요.” 무당이 속삭인다. “저곳으로 통과할 거예요.” ” [*] 볼로딘, 『메블리도의 꿈』, 367쪽.

메블리도의 목적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소년병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사랑하는 여인, 베레나 베커를 다시 한번 만나는 것이다. 그는 다시 창문으로, 그녀의 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꿈 안에서 그는 무력하다. 그녀에게 말을 걸 수도, 자신이 여기 있다는 신호를 보낼 수도 없다. 그는 그저 그녀의 곁에, 그녀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두 사람은 바깥에서 쏟아지는 시위대의 외침을 함께 듣는다. 함께이지만 함께가 아닌 채로.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닿으려고 반복하면서. 두 세계가, 안과 밖이 맞붙어 있는 창문이, 빛과 어둠을 동시에 통과시키는 창문이, 그들이 부딪혀 죽은 창문이 떨린다고 상상하면서.

한국화
베를린과 파리를 오가며 글을 쓰고 옮긴다. 올리비아 로젠탈의 『적대적 상황에서의 생존 메커니즘』,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모니크 비티그의 『오포포낙스』 등을 한국어로,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공역)를 프랑스어로 옮겼다. 프랑스에서 단편집 『도시에 사막이 들어온 날』(Le jour où le désert est entré dans la ville)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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