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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만주에서 퍼져가는 야구 소년들의 꿈 1
가와니시 레이코

2025년 2월 18일 게재

출처: 가와니시 레이코, 『플레이볼: 조선·타이완·만주에서 꽃핀 야구 소년들의 꿈』, 양두원 옮김(워크룸 프레스, 2017), 67–73.

조선에서도 내지,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야구를 했다. 일본인이 한반도에 이주를 시작한 해는 이미 1876년으로,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무렵이었다. 이주민은 청일전쟁 이후부터 급증하고, 1910년 한일 합방으로 더욱 증가했다. 조선에 야구를 들여온 인물은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로 알려졌다. 1904년 한성(오늘날 서울, 일본 통치 시기에는 경성)의 종로에 황성 YMCA 회관이 세워지고, 그곳에 선교사 질레트가 평양에서 부임해 왔다. 조선에 배트와 볼 같은 야구용품을 처음 갖고 온 사람도 그였다. 말은 그렇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02년에 제작된 「폭렬 야구단」이라는 영화가 있다. B급 영화 제목 같지만, 원제는 「YMCA 야구단」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인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다. 1904년은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돼 실질적으로 조선이 병합된 해다. 조선에는 비극적 시대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배경을 묘사하면서도 과거와 신분 제도가 폐지된 사회의 거대한 전환기에 오직 야구에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이를 그렸다. 일본에서처럼 전통 복장과 양복이 섞이고, 주인공은 야구를 죄악시하는 유학자 아버지에게 야구를 하는 사실을 감췄다.

당초에는 따로 야구를 한 일본인과 조선인

1905년 관립 한성 고교에 야구팀이 생겼다.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데 체조과 주임 다카하시 교관이 팀을 맡았다. 다카하시 교관이 심판을 보고 황성 YMCA 야구단과 한성고등학교가 조선 최초로 야구 시합을 치렀다. 구장은 당시 유일한 야구장인 성동 훈련원 광장이었다. 조선 땅에 야구 열기가 퍼졌다. 팀도 차례차례 생겨났다. 시합이 진행되자 역시 황성 YMCA 야구단이 압도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신생 팀이 한 번 이긴 적이 있었다. 이 시합이 『황성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그러자 비판이 높아졌다. “쓸데없는 야구 기사를 그렇게 크게 쓰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신문의 사명을 잊었다.” 서양에서 유래한, 새로운 스포츠인 야구를 향한 반발은 이곳에서도 강했다. 그런 역풍이 불어도 젊은이들의 야구 열기는 식지 않았다. 게다가 유학생 팀의 등장은 이런 야구 열기에 불을 더 지폈다.

1909년 여름, 선진 야구 기술을 익힌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돌아왔다. 한일 합방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그들은 유니폼을 갖춰 입은 당당한 모습에 스파이크까지 신었다. 그때까지의 조선 팀은 한복에 짚신을 신었기에 유학생 팀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학생 팀은 조선 최강이라는 황성 YMCA 야구단을 꺾기까지 했다. 유학생들의 야구 실력과 늠름하게 유니폼을 입은 모습에 자극받아 조선의 야구 열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한일 합방 다음 해인 1911년 무렵에는 일본인도 조선인과 적극적으로 시합을 주고받았다. 10월에는 경성 우편국과 왜성 구락부의 시합이 열렸다. 결과는 훈련 시간이 많던 왜성 구락부의 승리로 돌아갔다. 『조선야구사』(朝鮮野球史, 1932)에 따르면, “심판은 청년회의 조선인이 맡았다. 대체로 공정했다.” 일주일 뒤에는 동양협회 경성 분교 주최로 일본인 팀이 두 패로 나뉘어 홍백전을 치렀다. 그다음 달에는 왜성 구락부와 청년회의 시합이 열리기도 했다. 회사와 은행 등에서도 사원 팀이 생겨났다.

이런 조선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당초에는 따로 야구를 했다. 조선 쪽에서는 유학생들이 방학 때마다 일본에서 돌아와 지도를 하곤 했다. 이 때문에 유니폼도 점점 널리 퍼져 그 모습도 드물지 않게 됐다. 1912년에는 유학생 팀과 황성 YMCA 야구단이 연합 팀을 결성해 일본인 팀과 처음으로 맞붙었다. 결과는 1승 1패였다. 이에 힘을 얻은 황성 연합 팀은 다음 해인 1912년(다이쇼 원년)에 벌써 일본 원정에 나섰다. 평론가 도쿠토미 소호가 주재한 『고쿠민신문』(國民新聞)은 이렇게 전했다. “돌 던지기의 명수, 조선 야구단이 왔도다!” 황성 연합 팀은 와세다를 필두로 에바라 중학, 아자부 중학, 세이소쿠 영어 학교, 메이지 대학, 도시샤 대학과 일전을 치렀다. 와세다에 대패하는 등 고전했지만, 건투하며 아자부 중학에는 승리를 거뒀다. 『조선야구사』에는 이렇게 소개돼 있다. “단순히 스포츠적인 면이 아니라 야구를 통해 내선인의 이해와 융화를 고취하는 계기를 만들고, 나아가 일반 대중에도 내지와 조선을 향한 관심을 높여 내선일체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효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선 일체’는 조선 통치의 슬로건으로 조선을 내지와 하나로 여긴다는 뜻이다.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충량한 황국 시민’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다. 우월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담긴 동화 정책이다. 그 상징으로 1920년에는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이은과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왕녀(결혼 후 이방자)가 결혼했다. 황성 연합 팀이 내지에 와 순회 시합을 하는 동안 조선의 일본인 팀은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이전 시합에서 졌기 때문에 설욕할 기회를 엿봤다. 이 시기에 조선, 일본 양쪽에 차례차례 새로운 팀이 생겨났고, 서로 절차탁마하며 실력을 키웠다. 조선의 이런 정세를 보고 경성일보사는 연습 시합을 기획했다. 조선의 신문사가 주최한 최초의 시합이었다. 신문사는 지면을 풍성히 채우며 야구 붐을 일으켰다. 1913년에는 역시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전 조선 야구 대회가 열렸다. ‘전 조선’이라는 명칭을 쓴 최초의 시합이었다. 참가 팀은 성남 구락부, 동아 연초 야구단, 조선은행 야구단이었다. 대회 당일이 되자 총독부 중학교도 이름을 올렸다.

1915년에는 조선공론사가 주최한 조선 야구 대회가 경성 용산 철도 그라운드에서 열렸다. 참가 팀을 보면 당시의 조선 야구를 알 수 있다. 참가 팀은 조선은행, 철도 구락부 청년단, 철도 구락부 소년단, 경성 중등학교, 오성 친목회, 통신 구락부, 경성 실업 구락부 등 일곱 팀이었다. 그 가운데 오성 친목회가 유일한 조선인 팀이었다. 여기서도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학생과 사회인이 서로 시합을 벌였다. 경성 중학은 1회전에서 경성 구락부와 맞붙어 패했다. 8 대 7로 선전했다. 철도 소년단도 선전했지만, 오성 친목회에 무릎을 꿇었다. 철도 소년단은 조선은행과 일전을 치러 1점 차로 졌다. 결승전은 오성 친목회와 철도 청년단이 맞붙었다. 보기 드물게 접전을 치르며 철도 청년단이 우승했다.

내지와 만주에서 원정 온 팀과의 대결

1917년에는 조선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일어났다. 내지에서 와세다 대학 팀이 원정을 온 것이다. 와세다는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연전연승을 거두고, 만주의 강호인 창춘 팀에는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소문에 조선의 야구인들은 두려움에 떨고, 일반 시민은 와세다 팀을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했다.

와세다는 7월 16일 저녁 무렵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유니폼을 입은 철도 팀원이 일렬로 서서 그들을 맞았다. 조선신문사 주최로 열린 용산 철도와의 대전은 10 대 0으로 와세다의 압승이었다. 다음 날, 경성 야구단과 한성 구락부가 연합 팀을 구성해 와세다에 맞섰다. 결과는 21 대 0으로 와세다가 대승을 거뒀다. 조선 야구단은 크게 낙담했다. 이 시합은 조선 최초의 유료 경기라는 기록적 의미가 있다. 조선신문사는 2색으로 석판 인쇄한 입장권을 발행하고, 시합이 끝난 뒤에는 다섯 장짜리 기념엽서까지 판매했다. 이해에는 부산 야구 대회도 열렸다. 결승은 부산 중학과 부산 세관의 경기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세관 팀 선수 구성에 부산 중학 팀이 불만을 제기하면서 시합이 중지되기도 했다.

1918년 여름에는 호세이 대학과 메이지 대학이 내한 경기를 치렀다. 두 학교는 만주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와세다 대학 때처럼 조선신문사의 초대로 조선에 들렀다. 호세이 대학은 7월에 내한해 네 번에 걸쳐 시합을 치르며 전승했다. 새로운 명문인 호세이 대학은 앞서 만주에서 치른 모든 경기에서 아까운 점수 차로 패한 터였다. 조선 야구계에서는 이것만 보더라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 경기는 용산 철도와 벌였다. 경성 중학 그라운드에는 시합 전부터 많은 관중이 모였다. 용산 철도는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14 대 3으로 대패했다. 다음 경기는 경성 구락부가 호세이 대학에 도전했지만, 선수들 부상의 여파로 22 대 0으로 패했다. 세 번째 도전자인 조선은행도 선전했지만, 0 대 3의 패배. 마지막 상대인 다이아몬드 구락부 또한 같은 점수 차로 패했다.

호세이 대학은 만주 팀에 고전을 치르며 전패한 터여서 조선 야구계는 만주와의 실력 차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실의에 빠져 있던 차에 8월에는 메이지 대학이 만주 원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다 조선에 들러 원정 경기를 치렀다. 내지의 대학 리그 시즌이 돌아오기 직전이어서 빡빡한 일정 탓에 두 경기만을 치르게 됐다. 첫 상대인 용산 철도에 16 대 0으로 대승을 거두고, 다음 상대인 경성 구락부와의 시합도 17 대 2로 메이지 대학이 크게 이겼다. 와세다에 이어 호세이, 메이지 두 대학에 압도당한 조선 야구계는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통상적으로 조선신문사가 주최한 야구 대회마저도 참가 팀이 모이지 않아 중단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되자 다음 해인 1919년에는 주최 측인 신문사가 나서 자체적으로 기자 팀을 조직했다. 경성신문 팀은 결성하자마자 부산에 원정을 떠날 정도로 사기가 높았다. 이해의 7월에는 게이오 대학이 조선에서 원정 경기를 치렀다. 게이오 대학은 그해의 대학 리그 우승 팀이었다. 게이오는 우선 부산에 상륙해 경성일보사 주최로 전부산군과 맞붙었다. 결과는 10 대 0으로 게이오 대학의 쾌승이었다. 게이오와의 경기에서 조선 야구계는 분기탱천했다. 하지만 강호인 전부산군의 영패 소식만 전해졌다. 그러자 다음 날 전용산군과의 시합에 관심이 모였다. 하지만 이 시합 또한 15 대 2로 대패하고, 드디어 전경성군과의 경기가 다가왔다.

전경성군도 분전했지만, 5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양측 주장의 협의 끝에 경기는 22 대 0로 콜드게임이 선언됐다. 원래 경성에서 치러지는 경기는 듣기 괴로울 정도로 야유가 쏟아지는 경우가 많았다. 게이오 대학과의 경기에서도 아무런 문제 없는 공평한 판정에 야유가 날아들어 뜻있는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10월에는 만주 구락부 일행이 조선에 도착했다. 대학 팀과의 내지 원정을 치르기 위해 도쿄로 가다가 조선에 먼저 들른 것이었다. 첫 상대는 용산 철도군과의 대전이었다. 야구 붐이 이는 다롄에서 만철이 결성한 강호 만주 구락부의 명성은 조선에도 알려져 있었다. 만주 구락부는 “만주 구석에 칩거하던 정예 멤버를 모았다. 해를 거듭해 만주에 온 도쿄의 명문 대학을 연파함으로써 동양 야구계의 패왕으로 칭송받는 이 사회의 중진이다.” (『조선야구사』)

그에 대항하는 용산 철도군도 필사적으로 싸워 7 대 2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뒀다. 1차전에서 불의의 패배를 당한 만주 구락부는 태세를 정비해 2차전에 임한 결과 이번에는 12 대 1로 대승했다. 만주 구락부와의 대전에서 1승 1패를 거둔 건 조선 야구계에 크나큰 기쁨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가와니시 레이코(川西玲子)
1954년생. 주오 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석사 과정(정치학)을 수료했다. 1985년 재단법인 일본 시스템 개발 연구소(당시 재무성 관영)의 연구 1부 사회 시스템 연구실에서 근무하다 양육 문제로 퇴직했다. 그 뒤 제4기 도쿄도 여성 문제 협의회 위원에 취임하고, 도쿄 학예 대학 비상근 강사로 근무하며 일반 시민의 눈으로 보는 일본 근대사를 중심으로 저술 활동을 해왔고, 일본 근대사를 주제로 시부야에서 토크쇼와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 출생으로 1938–1939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 대표 톈진 상업 투수로 출전했다. 지은 책으로는 『역사를 알면 더 재미있는 한국 영화』(歴史を知ればもっと面白い韓国映画, 2006), 『영화가 말해주는 쇼와사』(映画が語る昭和史, 2008) 등이 있다.

옮긴이. 양두원
KAIST에서 화학공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이래 LG 트윈스의 오랜 팬이다. 2000년대에 들어 응원하는 팀이 암흑기에 빠지자 우울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스페인 축구와 고시엔(甲子園, 갑자원)을 파기 시작했다. 2010년 우연히 놀러간 고시엔에서 오키나와 대표 코난 고교의 기념비적 우승을 접한 뒤 본격적으로 팬이 되어 지금은 매년 여름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 모 방송국에서 카메라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