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변모시켰는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오랜 기다림 끝에 전격 리모델링되어 돌아왔다. 엄태화 감독의 동명 영화를 비롯해 건축, 도시 인문학 등 여러 분야에 영감을 준 이 책은 ‘21세기 최고의 책’(알라딘)에 선정되는 등 많은 이들에게 필독 교양서로 사랑받았다. ‘비평적 픽션’이라는 독창적 글쓰기를 통해 아파트와 중산층, 세대론과 시각 문화를 가로지르며 아파트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 밝히는 저자는, 나아가 그것이 우리의 감각은 물론 욕망까지 빚어낸 장본인이었음을 말한다.
정교한 픽션으로 구축된 도시 인문학
2010년을 전후로 한국에는 아파트를 단순히 하나의 주거 모델이 아닌 더 넓은 인문, 사회, 정치, 경제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아파트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1년 출간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파트를 비롯한 비(非)인간 화자를 내세워 스스로 말문을 열게 하는 특유의 글쓰기로 주목받았다. 신문, 논문, 잡지, 소설 등 방대한 문헌에서 길어 올린 객관적 사실과 연구, 통계, 문학은 정교하게 설계된 아파트라는 무대 위에서 각축을 벌이는 화자들의 입을 통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책은 1963년, 준공된 지 얼마 안 된 마포아파트를 촬영한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에서 마포아파트를 내려다보던 ‘시선’이 1장의 주인공이다. 20세기 초 유럽 메트로폴리스의 번화가에서 출발해 우연곡절 끝에 동북아시아 개발도상국에 도착한 이 시선은 기차, 사진, 영화 등과 함께 도래한 모더니티가 빚어낸 하나의 감각기관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세계와 그 압도적인 자극에 맞서, 생존을 감행한 모험 끝에 출현한 이 변종의 시선, 혹은 인간은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한국의 군사 정권과 만나 전국 곳곳에 출몰하기 시작한다.
2장에서는 아파트 본인이 직접 등판해 자신을 둘러싼 비판을 향해 포문을 연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장에서 아파트는 자서전의 형식을 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한다. 마포아파트에서 시작해 한강 변의 고급 맨션으로, 강남과 수도권 신도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포스트 강남을 꿈꾸는 재건축 현장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아파트는 결국 권력의 도구이자 하나의 장치로서 그동안 수행해 온 자신의 정체성을 뒤로한 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최적화된 세계를 꿈꾸고, 그 세계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인다.
3장의 주인공은 이 책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간 화자다. 1942년에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살아남아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은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1970년대 중반, 중동 특수를 타고 한강 변 동부이촌동의 15평짜리 공무원아파트를 장만하는 데 성공한 그는 1979년 봄, 강남에 들어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입성한다. 이후 주가와 아파트 가격이라는 이중 곡선의 파도를 타고 황혼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계층 구조를 재편하는 데 핵심 역할을 수행한 아파트가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작동했는지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4장의 화자는 1970년대 중반, 전기밥통과 보온병 등 가전 가구에 등장하기 시작한 꽃무늬다. 당시로서는 낯설었던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이 우리의 감각과 취향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거실과 침실, 주방, 부엌은 어떻게 일상의 질서를 재편했으며,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 제품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현재에 이르렀는지, 영욕으로 얼룩진 꽃무늬 이야기를 따라 펼쳐진다. 뒤이어 ‘팩트’로 구성된 2부는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아파트와 사물, 강남과 신도시를 중심으로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며 1부에 등장했던 화자들의 이야기에 살을 보태고 서술의 빈자리를 메운다.
개정판에 관하여
이번 개정 작업의 핵심은 1부와 주석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때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 전 세계적인 변화의 징후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재편된 세계의 논리는 특정 계층·지역·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 대중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그들의 의식구조와 행동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이 시기의 독특한 기운을 담고 있는 기존 골격을 유지하되 세부 내용들을 전면 손질했다. 특히 주석은 단순 개정이 아닌 재건축 수준으로 재편이 이뤄졌다. 지난 15년간 출간된 관련 저술과 축적된 연구 성과가 방대하게 반영된 주석은 책의 서사에 더 선명한 해상도를 부여하고, 때론 본문의 내용과 미묘한 긴장 관계를 맺으며 저자가 제시하는 관점을 넘어 이 책이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여러 담론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연결 통로를 제공한다.
모더니티에서 출현한 변종의 시선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및 사회와 접속하고, 세대와 계층이라는 현실 주체와 맞물려 미세한 일상의 취향과 감각으로 이어지는 이 장대한 서사는 지금의 독자들이 “소비 지향적 라이프스타일과 투자자 정체성으로 한층 더 강화된 아파트 기반의 중산층 문화가 ‘자연화된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기성세대와는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발췌
맨션의 트라이앵글은 강북의 부촌으로부터 기존의 중상류층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지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폐쇄적인 형태를 띠었다. 반면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개방적인 구조를 갖출 것이었다. 이 구조 안에서 잠실과 반포의 주공아파트 단지는 무주택자들을 강남으로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의 흡입구 역할을 할 것이었고, 개별 아파트 단지들은 계단식 위계로 조직된 신시가지의 하위 모듈로 기능할 것이었다. (106쪽)
설계자들은 바로 이 시점에 분양가 상한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자본의 이윤 추구 욕망을 억제하는 가격 통제책을 통해 나, 아파트를 사회적 이동을 위한 일종의 필수 통과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인간 행위자들의 산발적이고 파편화된 이주 동선을 단일 궤적으로 포획해 내고, 나아가 그렇게 연결된 양자의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그들 사이에 경제적 공생과 정치적 동맹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고안된 것이었다. (125쪽)
혹자는 나라는 존재가 중산층의 탐욕에서 비롯된 산물인 양 과장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지적이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내가 ‘장치’로 작동하며 그들의 욕망을 직접 빚어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니까 나를 향한 그들의 탐욕조차 나의 피조물인 것이다. 내 생각에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내가 지닌 매혹적인 면모의 핵심이다. (133쪽)
나의 거실이 중산층 가족의 정체성을 연출하는 무대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에 올림픽 스타디움이 강남 동쪽 끝자락에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올림픽의 기획자들에게 강남은 자신들의 계획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실현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한편에는 스위트 홈의 쇼룸으로서 아파트 거실이 편재해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에는 스펙터클의 극장으로서 잠실 스타디움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텔레비전은 이 두 공간을 단락(短絡) 없이 연결하는 매개 고리였다. (159쪽)
계급적 관점의 쇠퇴는 1990년대 초반 이후, 나, 아파트가 대기업 생산직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내 집 마련’을 통한 중산층화의 경로에 포섭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제 막 노조를 중심으로 그 나름의 계급적 질서를 갖춰나가는 듯 보였던 상층부 노동자들의 생활세계는 빠른 속도로 중산층의 생활양식에 용해되었고, 자본과 적대적인 형태로 불화하던 계급 갈등은 중산층 내부의 경쟁으로 치환되었다. 급진주의자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나 국가의 공안 탄압이 아니라 200만 장에 달하는 아파트 분양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184쪽)
나는 주택공사 설계실의 제도판 위에서 집을 양산하는 모델로 시작해, 분양가 상한제 도입 이후 부동산 정책 보고서에서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결절점의 역할을 수행했고, 강남의 아파트 단지를 거치며 중산층 정체성을 주조하는 장치의 기능을 더했다. 그리고 수도권 신도시에서는 마침내 수동 혁명을 실현하는 매개체 노릇까지 감당했다. 설계자들은 내가 모델이자 결절점이며 동시에 장치이자 매개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187쪽)
힘의 관계가 역전된 상황이라면, 내가 굳이 그들의 명령이나 지시를 따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여전히 나의 대변인으로 행세하려 들겠지만, 내가 그들의 입을 빌려 말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설계자들의 의도를 넘어, 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 바깥의 세계를 염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숨죽인 채, 설계자나 중산층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최적화된 세계,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의 모습에 한껏 빠져들 수 있는 세계를 상상했다. 나는 내 몽상이 직조해 낸 그 세계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188쪽)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1부 픽션
제1장 시선의 모험
2010년, 국가기록원, 관리번호 CET0035584_1
1912년, 밀라노, 동시적 시선
1936년, 경성 미쓰코시 백화점, 까마귀의 시선
1940년, 대동아공영권, 메서슈미트기 조종사의 시선
1962년, 마포아파트, 군인과 건축가, 그리고 이종교배된 시선
제2장 아파트의 자서전
나, 아파트
맨션의 트라이앵글에서 강남으로, 신화의 시작
분양가 상한제, 그리고 나와 신중산층
장치, 확산의 전략적 모델
인테리어 1: 베란다 창의 거실
인테리어 2: 텔레비전의 극장
중산층의 정체성을 연출하는 무대, 거실과 스타디움
강남 2세대, 아파트 키드와 신세대
수도권 신도시, 수동 혁명의 전초기지
포스트 강남,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도래
제3장 영웅시대: 1942년생 강남 1세대의 회고담
벌레
인간
아버지
세대
게임
진화
제4장 화양연화(花樣年華): 꽃무늬 이야기
2008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975년, 네 이름은 꽃무늬
1978년, 아파트는 주거를 위한 기계다
1989년,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
1998년, 형태는 평당 분양가를 따른다
다시, 2008년, 취향의 귀족주의
제2부 팩트
제1장 마포아파트: 새로운 주거 모델의 출발점
“생활의 혁명”
좌식 생활 vs 입식 생활
새로운 생활양식의 도래
개량 부엌의 문제들
제2장 한강맨션: 현대적 문화생활에 대한 동경과 선망
“구름 위의 신세계”
실내장식 붐
입식 부엌과 식모 방
쇼핑과 여가
한강 개발과 아파트 프리미엄
제3장 사물의 세 가지 질서
피엑스의 판타스마고리아
가난의 문화, 버네큘러 디자인
메이드 인 코리아
제4장 강남의 아파트 단지들: 중산층 시대의 개막
평범치 않은, 그러나 평범한 중산층
“스위트 홈”: 실내장식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제2의 거실, 시스템키친
안방에서 침실로
여가와 쇼핑
제5장 분당과 용인: 신도시의 모델하우스
분당
용인
저자 소개
박해천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부교수, 디자인 연구자. 『인터페이스 연대기』,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등을 저술했고, 『확장도시 인천』, 『디자인 아카이브 총서 1: 중산층 시대의 디자인 문화 1989–1997』, 『디자인 아카이브 총서 2: 세기의 전환기 한국 디자인의 모색 1998–2007』 등을 기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