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룸 한국 문학 ‘입장들’의 두 번째 책은 정영문의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이다.
타지-일상 소설
“지금은 겨울이고, 나는 텍사스에 있고,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다시 텍사스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이름하에 쓰고 있지만 어쩌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는 이 글을 쓰고 있다.” (본문 7쪽)
대한민국 서울에 거주하는 소설가 정영문은 2017년 미국 텍사스주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텍사스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텍사스 친구 부부의 집에서 시작되는 소설은 그 집 테라스의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에서 시작되어 칠리 콘 카르네와 콩과 두부, 케네디를 죽였다고 알려진 리 오즈월드와 리 오즈월드를 죽였다고 알려진 잭 루비와 잭 루비의 개들, 우주에 보내졌지만 개 라이카와 달리 유명해지지 못한 고양이 펠리세트, 한 농장에 뜬금없이 방치된 우주선 캡슐 모형과 들소, 선사시대 유적을 찾아 들어갔다가 다다랐던 얼어붙은 한국의 폭포, 칼 마르크스와 빅토르 프로스페르 콩시더랑, 보니와 클라이드, 헤밍웨이, 그리고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영문은 타지에 머물며 겪었던 일상과 망상을 소설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다. 그 능력은 그간 그의 여러 소설들을 통해 여러 차례 증명된 바 있다. 이번 소설에서 정영문은 자신의 능력을 가장 빼어나게 발휘한 듯하다. “텍사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텍사스에 대해 몰라서” 쓰기 시작한 소설은 “의식의 흐름 기법과 의식의 마비 기법과 의식의 착란 기법이 뒤섞”이며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근거 없는 가설을 세우다 마는” 듯하지만, 그 가설들과 가설들을 둘러싼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은 “지나가는 개도 웃고 갈” 만큼 흥미롭다.
여담 소설
“내가 유일하게 궁금한 것은 밑도 끝도 없는, 계속해서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말하는 것이 없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이 차이가 없는, 결국에는 하나 마나 한 이런 이야기를 언제까지 얼마나 더 할 수 있나 보는 것뿐이었고, 이 글 역시 그것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그것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 않는, 단어와 어구의 반복적인 사용을 얼마나 할 수 있나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소설들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고, 의도적으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은 너무 적었고, 나로서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옆으로 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본문 37쪽)
정영문의 소설은 여담이 거의 전부다—거의 전부로 보인다. 그의 소설은 쓸데없어 보이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고, 그래서 그중 쓸데없는 내용과 쓸데 있는 내용을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다. 쓸데없는 내용들은 나열되고, 반복되고, 변주되고, 연속된다. 이러한 쓸데없음 내지 하나 마나 한, 옆으로 새는 이야기는 정영문이 자신의 소설에서 스스로 밝히는 것처럼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도처에 널린 쓸데없는 내용들은 놀라울 정도로 우연히 연결되어 결국 쓸데 있는 내용에 가 닿게 되곤 한다.
이렇게 쓸데없어 보이는 정영문 소설의 쓸데 있음은 소설이 소설에 대해 말할 때 발현된다.
소설에 대한 소설
“나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해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게 좋거나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서로에게 가까워지거나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서로가 좋거나 좋지 않게 사람이 달라지고 뭔가가 바뀌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어쩌면 재래식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은 언젠가 이후로 쓸 수 없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소설 속에 등장시킨 소설적 인물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들 같았고, 그 인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남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소설 속 인물들 간에 문제를 생기게 하고 서로 갈등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소설가가 해야 하는 짓인지에 대해 너무나 회의적으로 된 상태였는데(나는 내가 쓰는 소설 속에서라도 누군가에게 안 좋은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랐다.), 7인의 사무라이가 내 머릿속에 출현하게 된 것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본문 59~60쪽)
정영문의 소설은 결국 항상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무장한 그의 소설은 소설에 대한 쓸 만한 말들을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여러 해 소설가로 살아오면서 도처에 널린 소설에 대해 품게 된 회의나 여느 소설들을 피해가며 쓰게 된 다른 소설에 대한 생각 등을 발견하게 될 때, 쓸데없지만 그럼에도 나름대로 흥미로웠던 그의 여담은 더욱 빛을 발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다.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생각들은 나로 하여금 가끔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에 빠지게 해주었고, 그래서 종종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하거나 가끔은 열심히 하기도 했는데 나로 하여금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에 빠지게 해주는 것에는 7인의 사무라이 말고도 소설의 플롯도 있었는데, 나는 그런 것도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내 삶에는 낮과 밤과 그날의 날씨와 사계절과 기후라는 플롯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소설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플롯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고 없을수록 더 그만이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은 플롯들이라면 있어도 그만일 거라고 생각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이유도 동기도 없이 서로 싸우거나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과 같은 플롯. 내가 등장시키지도 않은 인물이 등장해 내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 플롯. 물에 떠다니는 플롯. 벌레 먹은 사과 플롯. 배구공처럼 가지고 놀 수도 있지만 옷장 속에 넣어두거나 창가에 놓아둘 수도 있는 플롯. 한낮의 그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플롯. 플롯, 하고 부르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개처럼 못 이기는 척하며 답을 하기도 하지만 끝내 답을 하지 않기도 하는 만사가 귀찮은 플롯. (…)”
소설을 읽으며 소설에 대한 질문을 품게 되는 소설로서, 정영문의 소설은 소설의 역할을 다한다.
발췌
상수리나무들에는 도토리가 아주 많이 달려 있어 나무 아래에서 참을성을 갖고 기다리며 서 있으면 떨어지는 도토리에 최소한 하나는 머리에 얻어맞을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두 개 연달아 얻어맞을 수도 있었고, 때마침 바람이라도 불면 여러 개 동시에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는데, 도토리들에 머리를 얻어맞고 나면, 다른 것도 아닌 도토리들에 고의로 괜히 머리를 얻어맞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고, 그래서 나는 밤에 기분이 가라앉거나, 역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제시간에 잠들지 못하는 전 세계의 불면증 환자들에게 연대감을 느끼며, 하지만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거나,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나, 죄지은 건 없지만 따끔한 벌을 받고 싶을 때나, 그냥 좀 얻어맞고 정신을 차리고 싶을 때면 가끔 상수리나무 아래에 가 서 있곤 했다. (8쪽)
내가 소설을 새로 쓰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던 D와 N은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고, 나는 이렇다 할 내용은 없는, 텍사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텍사스에 대해 몰라서 쓰는 것으로, 이런저런 것들에 대해 근거 없는 가설을 세우다 마는 것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과 의식의 마비 기법과 의식의 착란 기법이 뒤섞인 소설로 그것을 보면 지나가는 개도 웃고 갈 소설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자 그것이 사실인 것 같았고, 그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해했고, 나는 모두의 웃음거리가 될 소설이라고, 참담한 실패작이 될 거라고 했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건배했다. 그런데 실패작을 목표로 글을 쓰는 것에는 이점이 있었는데, 실패작을 쓰는 데 실패하게 되어도 그만일 것이었고, 그래서 글을 쓰면서 실패에 대한 부담에 덜 시달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21–22쪽)
농장 관리인은 자신이 카우보이로 살아온 것에 대해 소설을 쓰고 싶어 했는데, 30년 가까이 카우보이로 살아와 그것에 대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우보이 출신이거나 카우보이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많이 있었고, 그 역시 카우보이 소설가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텍사스의 시골과 농장에 대한 일종의 그림일기 같은 것들을 오랫동안 써왔는데 그것들은 조금 손을 보면 책으로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영어로 번역되어 텍사스의 출판사에서 나온 내 소설을 선물하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텍사스에 대해, 그리고 가능하면 텍사스의 카우보이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농장에서 반쯤 카우보이로 일하면서 자신에게 소설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있고 싶은 만큼 지내도 좋다고 했다. 혼자 사는 그의 농장의 커다란 집에는 방들이 남아돌았고, 내가 그중 몇 개를 써도 여전히 남아돌 거라고 했고, 나는 남아도는 방들을 좀 덜 남아돌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그의 농장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았고, 그로 인해 나는 그의 농장에서 카우보이로 지내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하게 되었는데, 지금껏 해보지 않은 것 중 기회가 된다면 해보고 싶었던 것에 카우보이가 되는 것도 있지는 않았지만 다른 무엇도 아닌 카우보이로 평생은 아니지만 한 시기를 보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81–82쪽)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저자 소개
정영문
한국의 소설가. 『오리무중에 이르다』, 『어떤 작위의 세계』, 『바셀린 붓다』, 『목신의 어떤 오후』, 『하품』, 『달에 홀린 광대』, 『꿈』, 『중얼거리다』, 『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핏기 없는 독백』, 『나를 두둔하는 악마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 『검은 이야기 사슬』, 『겨우 존재하는 인간』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