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룸 한국 문학 ‘입장들’, 우리가 당면하게 된 이름들.
정영문, 이상우, 배수아, 정지돈, 한유주. 워크룸 프레스는 이들을 워크룸의 한국 문학 작가로 택했다. 우리는 다섯 작가를 오래 주목해왔고,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이들은 그동안 새롭고 탁월한 글들을 써왔고 어떤 식으로든 문학의 경계를 넓혀갈 이름들이다. 적어도 우리는 이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고,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한, 이들은 문학에서 새롭고 탁월한 자리를 계속 마련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입장들’은 출간되기 시작했지만, 이 총서는 현재 한국 문학의 입장이 아닐 수 있다. 차라리 우리가 앞으로 처하게 되기를 바라는 미래를 향한 의지와 결심에 가깝다. ‘입장들’을 발판으로 한국 문학이 지금 이러한 입장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워크룸 한국 문학 ‘입장들’을 펴낸다.
워크룸 한국 문학 ‘입장들’의 첫 책은 이상우의 『warp』이다.
잘 쓴 글
이상우의 글은 잘 쓴 글, 혹은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끔 한다. 잘 쓴 글은 어떠한 글인가?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어떠한 행위인가? 당신은 어떠한 글을 읽고서 잘 썼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가?
이상우의 글은 이미지에서 시작되고 이미지로 남는다. 느슨한 3부작 『warp』에서, 이미지는 지배적이다. 3부작의 첫 단편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작가가 제목 그대로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쓰게 된 글이다. 의미 아닌 이미지가 지배하는 소설을 꿈꾸며 시작된 글은 비문으로 읽힐 법한 문장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비문들이 흘러가고, 단편들이 지나간다. 말이 되지 않는 듯한 말들이 이야기 같지 않은 이야기들을 흘리며 지나간다. 실험적인 단편영화 숏들이 뒤섞인 듯한 문장들은 랩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미지의 리듬. 혼돈 끝에 결국 소리 내어 읽어보게 되는, 의도된 비문들의 중얼거림. 비문들 사이에 파랗고 크고 인위적인 실제 이미지가 등장하고,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 구글 번역기를 통해 생소한 언어로 불완전하게 옮겨져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채 지면을 차지하고, 가로쓰기에 익숙해진 시선을 세로쓰기가 교란하고, 무작위로 조합되어 아무것도 증명해내지 못하는 위상수학 공식과 무생물을 닮은 위키피디아 문서가 흐름을 가로지르고, 문단마다 문체가 바뀐다. 세 번째 단편 「그곳으로 이곳이」의 구성 또한 익숙하지 않다. 20대로 대표되는 젊음 그리고 물리적이기라기보다 심상적으로 다가오는 공간 인지가 불러일으키는 우울함이나 공허함 같은 것들의 기운을 다루는 이 단편은 제목보다 본문이 먼저 등장하며, 소설 속에 소설이 등장하고, 본문의 목소리가 QR코드를 통해 새어 나온다. 원래의 모습에서 휘어지고 틀어지고 비뚤어진, 왜곡된 글. 『warp』는 이렇게 글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모습, 우리가 글 본연의 모습이라고 익히 알고 있는 형태를 보란 듯이 왜곡하면서 시작된다. 잘 쓴 글로 통용되는 원래 모습이 사라지고 나타난 낯선 글의 기이한 매끄러움. 한국어 문법과 일반적인 이야기 구조를 비껴난 문장들이 하나씩 만들어가는 말들이 가까스로 읽히는 순간, 우리는 거의 모든 문학적 실험이 수행되고 지나간 이후인 이 시대의 잘 쓴 글을 새롭게 정의하게 된다. 알려진 대로 잘 쓰기는 쉬울 수 있다. 알려지지 않은 대로 잘 쓰기는 확실히 어렵다.
21세기의 첫 문학
『warp』의 두 번째 단편 「한남대교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둥그런 지붕 빛깔」은 다음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언어는 이미지보다, 영상보다 느릴 수 있을까?
이상우의 소설은 문체에서 시작된다. 소설을 한 편 쓸 때마다 문체를 하나씩 만들어내는 식이다. 그는 첫 소설집 『프리즘』(2015)을 낸 후 “언어는, 문장은 어쩔 수 없이 이미지보다 빠르고 소리보다 느리다.”고 생각했었다. 온전한 문장은 그 안에 담긴 품사들의 정보 값과 그 조합이 이루는 ‘무드’ 때문에 이미지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언어가 문장이 될 때, 거의 필연적으로 역사와 문학사 등에 많은 것들을 기대게 되는데, 따라서 현재까지도 문학, 적어도 대다수의 소설은 과거에 기대고 있다는 판단. 문장을 문장으로 사용할 경우, 문학이 작가가 바라는 ‘현대’의 자리를 얻기는 힘들겠다는 우려. 이후 그는 문자가 인간에게 지각되는 속도에 대해 계속 고민해왔고, 이 소설은 그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던 속도를 이용한 작업의 결과다. 작가는 문자 단위로 이루어진 언어 이미지 덩어리들이 어디까지 느려질 수 있는지 실험한다. 문장의 형태를 버리고, 즉 단어를 문장으로 구성하려다 말고, 글자를 읽고 지각되는 감각들을 생각하면서, 하나의 서술어가 앞뒤로 영향을 미치게 하면서 때로는 서술어의 앞뒤를 바꾸고, 때로는 특정 단어들을 반복하며 리듬을 더하기. 이는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답이 되기도 하지만 글을 읽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질문이기도 하며, 나아가 작가는 이 글을 읽은 이가 이후 이 글을 떠올릴 때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그런데 왜 글이 이미지보다 느려지도록 시도하는가? 작가는 ‘무드’를 변형시키고 싶어서였다고 답한다. 걸출한 작가들의 전례로 보건대 글의 무드를 아예 없애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무드를 변형시키거나 진화시킬 수는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문장의 시간을 한계 이상으로 늦춰보면서, 문장으로 과거 문학사에 기대지 않으면서, 새로운 무드, 오래전 존재했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잊힌 태초의 소설적 무드를 만들어보기. 작가는 인류에게 문자가 생기고 나서 발생한 최초의 소설이 어쩌면 이러한 형태였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문장을 문장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한 끝에 이제 비로소 과거를 벗어난 문장, 현대의 자리를 획득한 글, 마침내 새로운 소설. 우리는 이상우의 『warp』가 21세기의 첫 문학이 되기를 바란다.
발췌
그들은 공간처럼 나무를 보며 음악을 듣기도 했지만 과장되지는 않았다. 그들 기억에서의 나무를 바라보는 그들과 다르게 과장되지 않은 채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장소에서 그들이 지워지길 원한다고 서로에게 고백했으며 편집숍 길목의 자판기 앞을 지나 보잉 항공기와 해변이 그려진 커다란 광고 패널 앞을 걸어가며 그들이 먼저 그들의 장소를 지우기 위해 공간에 속해 있는 것들로부터 구축되고 있는 장소를 걷어내려 그들을 감싸고 있는 기호를 하나하나 지워가는 방식으로 우선은 아무도 모르는 장소로 떠나가서 시작해보는 장면을 공과 같이 구의 형태로 떠올리는 그들은 바라보던 나무를 걸어가며 그들이 서로에게도 지워지기를 과장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9쪽)
녹색 천막 둘린 공사장에서 숨소리. 녹색 천막 둘린 공사장에서 지린내. 녹색 천막 둘린 공사장에서 시멘트 벽. 창이 설 자리로 흐르는 녹색 천막 공사장 복도 계단에 버려진 양말 신문지 3층의 회색 담요. 녹색 천막 둘린 공사장에서 하얀 비닐 봉투 으깨진 쥐 언 수건. 녹색 천막 소리 내며 이어지는 주름. 벽돌 더미 가려진 통로들 투명한 비닐 막. 일회용 도시락 용기 갈색 개미 타원형. 갈라진 물 자국 좁은 어둠 흰 거미줄 천장 비린내 녹색 천막 둘린 공사장에서 철골은 직선으로 쏟아지는 바깥 기다랗고 넓은 다면체 숨소리. 석면 가루 납빛 수도관 헬멧. 나무 재 불씨. 구멍 난 목장갑 깃털 복도 걸어가는 녹색 천막 찢어진 곳으로부터 비둘기 떨어져 누운 직사각형 문 흐르는 대각선 천막 녹색 소리. 전기 배선 슬레이트 쌓인 구석 유리에 비친 물결. 비둘기 걸음 유리 조각 고갯짓 녹색 천막 둘러진 공사장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와 매트리스 솜뭉치 기둥 사이마다 넓이 많은 평면의 날카로움 몰려 휘어지는 공기. 흔적 뜯긴 전기 배선 무늬 길게 벽 따라 두께 얇은 선의 길이로 바퀴벌레 틈 속으로 사라져 지하 휴지 조각. 페인트 통 구르다 멈춘 곳에서 회색 크기의 접촉면 넓은 타일 천장 공사장에서 문 없이 위치로 섞이듯 녹색 천막 토막 난 계단 흩어진 반복. 수직 종말점 없이 부드러운 복도 작은 돌 조각 속삭임 쥐 냄새 복도로 통과되는 벽 너머 빈 천막 복도 주변 녹색 흐름 사각형들 복도 움직임 음영 엉킴 없는 공사장에서 쓸림 팽창하고 수축되는 영역으로서 복도의 형태 소리 직각 복도로 벗겨낸 육면체들 비어 있는 방향. 세 층 천장 뜯은 높은 방 한 면 가득 물결 매끄러운 냉기 못 구멍 금 간 면만 남아 물체 없이 녹색 천막 흐르게 공기 육면체를 닮아가며 복도 기다란 방위 쏟아지는 벽면 사선의 세로로 와이어 높은 곳으로부터 물방울 따라 녹슨 소리 바람의 원근감 깊이 육면체 엘리베이터 조명 깨진 채 문 닫힌 빛 (53~4쪽)
음악은 없는데 창문 비. 침대 사이드에 걸터앉은 스킨헤드, 날개 뼈 움직임대로 얇고 빳빳한 살결 구겨진 레몬빛 홑겹 이불 밖으로 얼굴 내민 스킨헤드가 묻는다. 그랬단 말이지. 어. 그래도 울 뻔했다는 것이고. 그러게 무슨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모르겠어. 선풍기 방향 바꿔주며 누운 채 기지개 펴는 스킨헤드에게 창문은 젖고 있는 자전거, 쇠 손잡이, 차임벨, 휠, 알몸으로 스킨헤드의 두 사람 살내 섞인 침대에서, 그늘진 책장 마샬 스피커 물병에 담긴 식물의 그림자 방벽에 구부렸다 펼쳐본 손가락 사이로 바라보다 눈 감은 스킨헤드의 겨드랑이 속으로, 속삭이듯 흘러내리는 창문 조그만 전구 여럿 달린 넝쿨 스킨헤드는 스위치 껐다 켜며 울 뻔했던 생각에 관하여 저녁에 약속은 없지만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지는 낮에 희미한 전구 불빛 스위치 내리고 화장실로 멀어지는 스킨헤드의 작은 엉덩이를 따라 얕은 코골이 줄줄 녹아내리다시피 자전거 가만한 자세로, 앙상한 뒤태를 지닌 너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다가 네 턱 아래에 송곳을 찔러 넣어 턱뼈를 따라 그어낸 뒤 반원형으로 구멍 난 자리에 갈고리를 집어넣고선 아랫니 위로 빼내 끌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고 스킨헤드가 하나의 샤워기 아래서 턱을 들어 꿈속에서 송곳을 찔러 넣은 지점을 가리켜주면 잠든 널 볼 때마다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져. (79쪽)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들
한남대교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의 둥그런 지붕 빛깔
그곳으로 이곳이
저자 소개
이상우
한국의 소설가. 소설집 『프리즘』(문학동네, 2015)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