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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홀리스, 화이트채플을 디자인하다

RICHARD HOLLIS DESIGNS FOR THE WHITECHAPLE

  • 크리스토퍼 윌슨 지음
  • ,
  • 최성민 옮김
180 × 240밀리미터 / 408쪽 / 사철 하드커버 / 2021년 5월 3일 / 30,000원 / ISBN 979-11-89356-53-8 03600
  • 박활성 편집
  • ,
  • 슬기와 민 디자인
  • 20세기 런던
  • 공공 미술관
  • 디자인과 미술
  • 미술과 디자인
  • 이스트엔드
  • 중간자
  • 평전
  • 현대 미술
  • 협업
  • 화이트채플

원래 가격: ₩30,000.현재 가격: ₩27,000.

20세기 런던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 편의 그래픽 디자인 드라마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 리처드 홀리스와 화이트채플 미술 갤러리의 협업을 담은 『리처드 홀리스, 화이트채플을 디자인하다』가 출간되었다. 한 디자이너의 작업을 특정 시기, 특정 의뢰처에 집중해 다룬 이 책은, 그동안 그래픽 디자인을 서술한 많은 책들이 왜 그리 지루했는지 극적으로 보여 준다. 시각적 결과물이 아닌 사회적 활동으로서 그래픽 디자인이 그에 맞는 인물, 사건, 배경을 제대로 갖추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기대 이상이다.

두 주인공, 만나기 전

책은 두 주인공인 리처드 홀리스와 화이트채플이 서로 만나기 전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1872년 세인트메리 성당에서 부제로 일하던 새뮤얼 바넷은 런던 주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당시 “교구에서 가장 끔찍한 사목구로, 주민 대부분이 범죄자”인 런던 동부 세인트주드의 허물어진 교회 하나를 맡아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갓 결혼한 바넷 부부는 이곳에 정착해 첫 사업으로 빈민을 위한 도서관을 짓는다. 1881년 “회화와 도자기, 자수 등 진귀품을 대중에게 보여 주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처음 연 전시회에 약 1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이후 전시는 연례행사가 된다. 런던 최초의 공공 미술관 중 하나인 화이트채플 미술 갤러리의 시작이었다. 교회 인근에서 일명 ‘잭 더 리퍼’가 연쇄 살인을 저지르던 1888년에는 약 5만 5천 명의 관람객이 전시회를 찾았다. 이후 1901년 정식으로 문을 연 화이트채플은 서서히 “영국을 선도하는 동시대 미술 중심지”로서 명성을 쌓아 나간다. 특히 현대 미술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이것이 미래』(1956) 전시를 열고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을 영국에 소개한 브라이언 로버트슨 관장 시절(1952~68) 무렵에는 “화이트채플에서 전시회를 열고, 도판과 함께 잘 정리된 도록을 내는 것은 야심적인 미술가의 이력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자 평단의 인정에 성큼 다가서는 길이었다.”

또 하나의 주인공 리처드 홀리스는 1934년 런던 서부 첼시 지역에서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그리 어렵지 않아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1949년까지도 책을 만들 때 “종이 두께, 여백, 활자 크기, 심지어 한 면당 단어 수까지 제한되던” 전쟁 상황은 그에게 평생 이어지는 청교도적 태도를 새긴다. 이후 첼시 미술 대학에 진학해 미술가를 꿈꾸던 그는 흠모하던 미술가 윌리엄 턴불로부터 “자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어야겠군”이라는 작품 평을 듣고 낙담한 후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서 경력을 쌓아 나갔다.

화이트채플과 리처드 홀리스, 만남과 협업

1969년 여름, 화이트채플의 신임 관장 마크 글레이즈브룩이 미술관 편지지를 디자인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센트럴 대학을 찾았을 때, 마침 학교에 남아 있던 사람은 리처드 홀리스뿐이었다. 홀리스는 마크에게 “원하면 내가 하나 만들어 보겠다. 쓰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제안한다. 리처드 홀리스와 화이트채플의 첫 만남이자, 이후 장기간 이어진 협업의 시작이었다.

협업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969~73년 마크 글레이즈브룩이 관장을 지내던 시절과, 훗날 테이트 관장으로 영국 미술계를 이끌 니컬러스 서로타가 관장을 맡았던 1978~85년이다. 이 시기 리처드 홀리스는 사실상 화이트채플 전속 디자이너로 포스터와 도록은 물론 서식, 소식지 등을 도맡아 디자인했다.

저자는 협업이 이뤄지던 시기 화이트채플에서 열렸던 전시와 프로젝트, 홀리스의 작업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전임 관장과 큐레이터, 전시 작가, 직원들은 물론 관계했던 디자이너, 주변 인물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화이트채플과 리처드 홀리스의 이야기는 그래픽 디자인을 서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장기간 이어지는 협업을 통해 미술관의 시각적 정체성이 어떻게 (지금의 의식적인 브랜딩과 달리) 형성되었는지 살피고, 홀리스의 디자인 방법론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꼼꼼히 비교하고, 각 디자인에서 이뤄진 선택들을 개별적인 전시 맥락과 화이트채플이라는 미술관이 처한 상황에 비춰 분석한다. 이는 그저 미술관이 전시 홍보물 디자인을 의뢰하고, 디자이너가 그럴듯한 포스터를 내놓는 과정으로 귀결하지 않는다. 20세기 벽두에 문을 연 공공 미술관이 시대 변화에 따라 그 임무를 갱신하고, 런던 동부라는 지역적 요구와 세계 미술사라는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흐름 사이에서 (해당 지역에 봉사하는 동시에 동시대 미술을 선도하고자) 요동치는 동안, 점차 전문화되던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직종이 사회적, 기술적 변화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묻고 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인의 보편적 실존을 구체적으로 예증하는 생생한 사례

저자가 말하듯 화이트채플 작업은 리처드 홀리스의 디자인 작업 가운데 ‘최고’이거나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여전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홀리스의 디자인은 존 버거의 『보는 방법』 같은 유명 도서이며, 작업 기간으로는 그가 무려 40년이나 디자인한 잡지 『모던 포어트리 인 트랜슬레이션』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화이트채플 작업은 홀리스의 디자인 접근법을 압축해서 보여 줌과 동시에 이후 그의 작업에 큰 전환점이 됐다는 점에서 다른 작업을 능가한다. 기술적으로는 “활판 인쇄술이 쇠퇴하고 사진 식자가 그래픽 디자인에서 주된 제작 수단이 된 시대” 그래픽 디자인의 양상을, 문화·경제적으로는 미술관이 “물리적 전시 공간에서 ‘브랜드’로 변화하는” 중간 단계의 맥락을 살필 수 있다. 실제로 홀리스가 떠난 이후 화이트채플은 (이 책에서는 간략한 모습만 비춰지지만) “팝 음악계에서 명성을 얻은 디자이너 피터 새빌의 손을 통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한 디자이너의 평전이자, 한 기관의 기록이자, 특정 시기 그래픽 디자인사로도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나아가 보편적인 그래픽 디자인 접근법을 익히는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홀리스가 화이트채플 디자인에 적용한 접근법은 여전히 실천할 수 있고, 조건도 같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아는 의뢰인, (창의적인 것 이상으로) 순발력 좋고 학식 풍부하며 주어진 정보와 제약에 유연히 대처할 줄 아는 디자이너, 그리고 의뢰인과 디자이너와 일반인이 사회적 과정을 함께 밟아 나갈 얼마간의 시간이 그런 조건이다.” 역자가 밝히듯 “리처드 홀리스가 화이트채플과 함께 거둔 예외적 성취는 그래픽 디자인의 보편적 실존을 구체적으로 예증하는—특히나 생생하고 탁월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형적인—사례”로서 한 편의 드라마 이상의 감흥을 일으킬 것이다.

주인공 소개

주인공 리처드 홀리스(1934~)는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다. 런던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화이트채플 갤러리 작업 외에도 『모던 포어트리 인 트랜슬레이션』과 『뉴 소사이어티』 등 잡지와 존 버거의 『보는 방식』 같은 유명 도서를 디자인했다. 첼시 미술 대학, 센트럴 미술 공예 대학 등에서 가르쳤고, 서잉글랜드 미술 대학교 디자인 대학을 공동 설립했다. 저서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와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은 한국어로도 소개된 바 있다.

또 다른 주인공 화이트채플 갤러리는 1901년 런던 동부 저소득층 지역에 개관한 공공 미술관이다. 홀리스와 협업한 시기에는 런던 미술계를 이끄는 대표적 현대 미술관으로 발전했고, 데이비드 호크니, 길버트와 조지, 게오르크 바젤리츠, 안젤름 키퍼, 조지프 코넬, 필립 거스턴, 프리다 칼로, 티나 모도티 등의 선구적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추천사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최고의 책”
-마이클 베이럿, 펜타그램


발췌

“여러분께 제국을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화이트채플도요?”
“화이트채플도요.”(29쪽)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미술관인데도, 화이트채플의 일상 업무는 소박했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직함은 부관장이었지만 정식 직원은 마크와 미술품 취급인 겸 건물 관리자 한 명, 그리고 나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픽윅 페이퍼스』 같은 상황이었다. 말도 안 되게 적은 봉급은 조그만 갈색 봉투에 접어 넣은 현금으로 받았다. (…) 나는 근처 바클리 은행에 계좌를 텄지만, 저금할 만한 돈은 벌지 못했다. 최저 생계비는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봉급 인상을 요구하자, 이사 한 명이 ‘하지만 당연히 다른 수입도 있을 거 아니오?’ 하고 묻더라. 중요한 동시대 미술 공간치고는 만사가 낙후한 곳이었다.”(37쪽)

회화 쪽에는 윌리엄 턴불이 있었다. “막 미국을 다녀와 색면 회화 작업을 하고 계셨다. 그분을 무척 흠모했다. 탁자에 다리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며 수업을 하곤 했다. 굉장히 화려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여태 그린 그림을 전부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갔더니, 보시고는 ‘자네,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어야겠군’ 하셨다. 얼마나 낙담했는지 모른다.” 홀리스는 이 판정에 실망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옳았다고 인정했다.(49쪽)

1969년 여름, 왜 하필 그날 저녁 마크 글레이즈브룩이 센트럴 대학 건물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는 그래픽 디자인과에 혼자 있던 홀리스와 마주쳤고, 화이트채플 신임 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홀리스는 “실기실 하나를 작은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고 한다. “학기말이었다. 편지지를 디자인해야 한다며, ‘학생들에게 디자인을 시킬 수 없을까?’ 하고 물었다. 나는 ‘경연처럼 시안을 받아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도 된다. 그렇지만 그러려면 다음 학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더라. 그래서 ‘원하면 내가 하나 만들어 보겠다. 쓰든 말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 이에 대한 사례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도 그러자고 했고.”(72쪽)

글레이즈브룩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은 그의 친구 데이비드 호크니 회고전으로 시작했다. (…) 홀리스는 이 전시회를 홍보하려고 대형 (25×18인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 인쇄된 포스터를 본 홀리스는 하단 활자가 상단에 실린 호크니의 사진을 “파괴”한다고 느껴 경악하고 말았다. 이어 일어난 일은 글레이즈브룩이 홀리스의 판단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시사하는 일화다. “마크가 전화를 걸어 말했다. ‘포스터가 도착한 것 같아요. 한 부 받았습니다.’ 그는 썩 만족한다고 했지만, 나는 ‘끔찍하다’고 했다. 그러자 이러더라. ‘정말이요? 그럼 다시 만들어야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인쇄가 끝났다니까! 그러나 그는 돈에 관해서는 호기가 좀 있었다. 결국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지.”(88~89쪽)

수수료는 늘 정액으로 계산됐다. 홀리스는 일급이나 시급 요율을 매겨 본 적이 없다. 대신 그는 “시간과 노고”를 바탕으로 수수료를 청구했다. 여기서도 배관 같은 노동 비유가 쓰인다. 이는 여느 디자이너가 쓰는 계산법과 다르다. 점점 일반화한 관행대로라면 리서치와 ‘디자인 개념’에 따라 수수료가 달라지는데, 이는 마치 개념 없이도 디자인이 가능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비슷한 추세로, 사용 수명과 적용 범위에 따라서도 디자인에 다른 값이 매겨지곤 한다. 여러 지역에 걸쳐 명함에서부터 광고판까지 폭넓은 매체에 적용되는 로고는 수만 파운드를 호가하기도 한다. 홀리스는 이런 경향을 무시했다.(173쪽)

당시는 동시대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너무 좁은 세계였다. 이런 작품을 전시하는 곳은 정말 작은 동시대 갤러리 서너 군데밖에 없었다. (…)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화이트채플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아무도 몰랐다. 어차피 보러 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 [웃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었다.” 서로타는 이를 대단치 않게 말한다. “그건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 [웃음] 당시는 언제나 사람들이 올 거라고 기대했다. 우리가 소개하는 미술가들의 작업에 가치가 있다고 믿었고, 가치 있는 작품으로 보일 거라고 믿었다. (…)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전시회 특별 관람에 50명이라도 오면 기뻐하곤 했다. 500명은커녕.”(177쪽)

홀리스가 크라운 배판으로 화이트채플 포스터를 만든 건 1970년 이후 처음이었는데, 그는 이 작품을 여전히 부끄럽게 여긴다. “너무 슬픈 일이다. [지금] 리히터는 내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의 작업을 잘 몰랐다.” 홀리스는 제공된 도판이 작품 전체 사진인 줄 알았고, “회화를 침범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여백에 활자를 넣는 것밖에 없었다. 그 부분만 보면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효과는 끔찍하다.”(184~85쪽)

홀리스는 편지 내용이 느닷없다고 느꼈다. “갤러리에서 변화를 꾀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호지킨을 위한 비엔날레 디자인을 막 마친 상태였고, 갤러리를 유지하고 후원금을 끌어내려는 여러 행사가 있었으니 소식지도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닉이 편지로 ‘그동안 고마웠다’라는 거다. 그게 다였다. 깜짝 놀랐다. 전화 한 통도 없었고, 찾아와서 ‘갤러리도 재건하는 만큼, 우리 생각에는…’ 하고 언질도 주지 않았다. 난데없이 달랑 편지 한 통이라고? 답신으로 ‘수입의 절반이 갑자기 증발하게 됐다’라고 썼다. 굉장히 어색했다.” 해고 상황을 떠올린 로맥스는 움찔한다. “그만하자. 끔찍했거든. 닉이 그 편지를 쓰고 리처드가 격분했던 게 기억난다. 어려운 시기였다.”(362쪽)

피터 새빌 어소시에이츠(PSA)의 작업 방식은 홀리스와 더는 다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의뢰인을 참여시키는 사회적 과정 대신, PSA는 스타일을 바탕으로 문화적 포지셔닝을 추구했다. 새빌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영원히 좇는 스타일리스트였다. 서로타는 단지 디자이너를 바꾼 게 아니라,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건너뛴 셈이다. 왜 그랬을까? “시대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반영했을 것이다. 미술관 규모도 커졌고, 마크와 함께 리처드와 일할 때처럼 디자인 세부에 밀접히 관여할 수도 없었다. 피터가 제시한 접근법은 우리를 젊은 관객층에 더 다가가게 해 줄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솔직히 말해, 환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가 추구하던 바에 어울릴 듯한 산뜻함이 있었다.”(362쪽)

서로타는 1985년에 홀리스의 작업이 낡아 보인다고 느꼈을까?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지만,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새 개관과 새 출발에 맞춰 아마 새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이사회 등에서 ‘화이트채플의 새로운 얼굴이 무엇인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압박을 많이 가했다. 아마 그래서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동시대 미술 전시회가 늘어나는 등 변화하는 런던, 변화하는 미술계에서 미술관이 자기주장을 강하게 할 수 있어야 했고, ‘이스트엔드에 있는 갤러리’만으로는 부족했다. 서펀타인은 전보다 두드러지게 공격적으로 나왔다. ICA도 마찬가지였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 같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있는 것 같다. 갤러리 자체는 계속 지역 사회에 봉사하려 했지만, 어쩌면 디자인은 우리를 지역 사회에서 조금 멀어지게 한 것 같다.”(372~73쪽)

20세기 후반 이후 그래픽 디자인을 둘러싼 조건은 끊임없이, 늘, 과격하게 변화했고, 이런 조건에서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든 자신이 ‘과도기’에 속한다고, 상충하는 가치와 세력 사이에 놓인 처지라고 느낄 법하다. 아무튼 어느 둘 사이를 (발신자와 수신자, 의뢰인과 대중 사이를) 중재하는 자리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존재 이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리처드 홀리스가 화이트채플과 함께 거둔 예외적 성취는 그래픽 디자인의 보편적 실존을 구체적으로 예증하는—특히나 생생하고 탁월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형적인—사례로도 볼 수 있다.(393쪽)

차례

머리말
감사의 말

화이트채플, 홀리스를 만나기 전
홀리스, 화이트채플과 일하기 전
이날 할 일, 1969~73년 / 작품, 1969~73년
공백기, 1973~78년
“더 전문적으로, 더 야심적으로”, 1978~85년 / 작품, 1978~85년
여파

재료와 공정
도판 출전
참고 문헌
역자 후기
색인

저역자 소개

크리스토퍼 윌슨(Christopher Wilson)
런던에서 ‘오버폰스’(Oberphone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스 그래픽 디자이너 겸 저술가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리처드 홀리스와 여러 작업을 함께했다.

최성민
최성민은 최슬기와 함께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다. 저서로 『재료: 언어—김뉘연과 전용완의 문학과 비문학』, 역서로 『멀티플 시그니처』(최슬기 공역), 『왼끝 맞춘 글』, 『레트로 마니아』, 『파울 레너』, 『현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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