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을 전후해 제작된 한국 액션 영화는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1980년 5월, 그로부터 7개월 후에 전주에서 개관한 덕진예술회관에서 보았던 이런저런 반공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던 것이다. 덕진예술회관은 사실 반공 교육을 위해 한국자유총연맹 전북지회가 주도해 설립한 건물이었고 실제로 당시에는 반공회관이라고 불렸다. [*] 2000년에 출범한 전주국제영화제는 덕진예술회관을 영화제가 표어로 내세운 디지털 영화를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전용 상영관으로 지정해 첫 회 영화제부터 한동안 활용하기도 했다. 외사촌 형을 따라 처음 갔던 이곳은 내게 타란티노의 티파니 극장과 같은 의미를 띠는 장소다. 하지만, 영화관이 아닌 반공 교육을 목적으로 한 ‘다목적’ 회관에서,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것으로 원초적 영화 체험이 시작되었다는 것, 감히 영화사를 운운할 수 없는 무자격자의 뒤틀린 마음은 이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서초동 시절 한국영상자료원 상영관의 낡은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어 심드렁한 기분으로 「황금70 홍콩작전」을 보다가, 문득 외사촌 형과 함께 보았던 「간첩잡는 똘이장군」 같은 유년기의 반공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리는 식이다.
대개 이런 반공 애니메이션은 교사의 인솔하에 단체 관람으로 보곤 했다. 내 또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타잔 캐릭터를 차용한 김청기의 「똘이장군」 시리즈나 헐크 캐릭터를 차용한 「해돌이 대모험」 등에 대한 추억을 열정적으로 토해 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애니메이션에 끌렸던 기억은 없다. 이런 애니메이션은 당시에 제법 나왔던 무궁화문고의 반공 만화, 즉 『특공 333』, 『특별수사본부 25시』, 『추적 11호』 등과 함께 감상문 숙제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것부터가 어쩐지 싫은 느낌을 주곤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감상문 숙제 가운데 하나로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 글은 사라졌지만 상장은 고향 부모님 댁의 사진 앨범에 남아 있다.) 김청기의 애니메이션이라면 「똘이장군」 시리즈보다는 「혹성로보트 썬더 A」나 「초합금 로보트 쏠라 원투쓰리」 같은 SF물 쪽이 나았다.
2024년 11월, 전주에서 활동하는 무명씨네 협동조합의 초청으로 1978년에 개봉한 「똘이장군 제3땅굴편」 상영 후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 전문가도 아닌 데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도 아니었지만 선뜻 강연을 수락했다. 내 원초적 영화 체험의 장소였던 덕진예술회관에서 본 애니메이션 가운데 한 편에 대해 전주에서 하는 강연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년을 회고하기보다는 유년에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기에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다. 과연 복수는 성공적이었는가? 강연이 끝나고 나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라는 한 여성 관객이 말을 걸어 왔다. 자신의 아버지가 내 나이 또래라면서 이런 애니메이션이 정말로 극장에서 개봉되었냐고 물었다. 아마 이 관객은 그날 상영된 영화가 「똘이장군 제3땅굴편」이 아닌 「간첩잡는 똘이장군」이나 「해돌이 대모험」이었어도 같은 질문을 했을 터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토록 조잡한 애니메이션을 입장료를 내고 보았다는 사실이 이제는 나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애니메이션이 우리 세대를 이상적인 반공 시민으로 육성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이전 세대와는 자못 다른 감수성을 지닌 이들을 육성하는 데 기여한 것만은 확실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였던 호돌이를 통해 ‘굿즈’의 세계에 입문해 성인이 되어서는 지브리 피규어를 모으고, 좀비 영화나 괴수 영화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슬램덩크』가 되었든 『20세기 소년』이 되었든 ‘인생 만화책’ 몇 종쯤은 떠올릴 수 있는 세대를 말이다. 물론 반공 애니메이션만 외따로 고려해선 안 되고 그것이 당대 한국 아동을 둘러싼 일군의 ‘서브컬처’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 세대에게 1980년은 매우 특권적인 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광주에서 민중 항쟁이 일어났던 그해 12월 1일, 한국에서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일본 대중문화 수입이 금지되던 시절이긴 했지만, 1980년 이전에도 한국의 아동은 텔레비전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다. 미국 작품으로 위장해 1975년에 처음 방송되었던, 이듬해 김청기가 「로보트 태권브이」로 표절했다고 알려진 「마징가 Z」가 그 예다. 그런데 이때 「마징가 Z」는 흑백으로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러니까 1980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에서는 흑백으로만 보다가 극장에 가야 컬러로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다. 이것도 김청기 유(類)의 애니메이션이 대략 1980년대 초반까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터다. 하지만, 일단 컬러텔레비전 시대가 열리고 나자, 우리 세대의 유년기를 온전히 사로잡았던 일련의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1981년부터 1983년 사이에 대거 방영되었다. 「플란다스의 개」는 1970년대 중반에 TBC에서 흑백으로 방영되었지만 1981년부터 1982년까지 KBS1을 통해 컬러로는 처음 방영되었다. 「은하철도 999」는 1981년부터 1983년까지 MBC에서 방영되었는데, 어떻게 심의에 통과했는지는 몰라도 여성의 나체가 이따금 등장하곤 해서 그때마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대단한 화제가 되곤 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 아동을 강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지만 그런 줄 모르고 보았던 「미래소년 코난」은 KBS1을 통해 1982년부터 1983년까지 방영되었다.
이런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꽤 나중에야 정식으로 수입될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표절한 해적판들과 함께 뒤섞여 1980년대의 뒤틀린 한국적 서브컬처의 가관을 이루었다. 가령, 「미래소년 코난」의 얼개 그리고 세 주인공 코난, 라나, 포비를 모조리 표절하다시피 해서 만든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쿤타 버뮤다 5000년」이 떠오른다. 도라에몽은 해적판 만화책에서 ‘동짜몽’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로 처음 알려졌다. (‘동짜몽’은 ‘동글짜리몽땅’을 줄여 만든 이름이다.) 나는 김혜란의 이름으로 나온 『동짜몽』 초판본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는데, 군 복무를 마치고 귀향하니 어머님이 고물상에 헐값에 팔아넘겼음을 알게 되었다.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도 고유철의 이름으로 해적판이 나왔다.
이런 분위기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대학에 입학해 하숙집 인근의 비디오 대여점에서 「람바 2」라는 다카하시 루미코 풍의 애니메이션을 발견해 빌려와 보았는데, 알고 보니 오시이 마모루의 최고 걸작이라고 해도 좋을 「우루세이 야츠라 2: 뷰티풀 드리머」를 한국어로 더빙해 불법 출시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더빙판 「미래소년 코난」으로 미야자키의 세계에 입문했던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는 더빙판 「우루세이 야츠라 2」로 오시이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2001년에는 오시이의 「아바론」에 대한 작품 비평과 영화에서 악의 존재론을 다룬 주제 비평으로 『씨네21』 공모에 당선되어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공각기동대」가 한국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것은 그 이듬해이고 이때 『씨네21』에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썼다.
다시 1980년대 한국적 서브컬처의 풍경으로 돌아가자. 동년배 가운데는 「똘이장군 제3땅굴편」을 보고 어린 시절엔 김일성이 돼지이고 공산당은 여우와 늑대인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떠는 이도 있지만 그리 믿을 만한 얘긴 못 된다. 반공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의인화가 구사된 것이 「똘이장군」이 처음도 아니었고 말이다. 국립영화제작소가 1964년에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다시는 속지 말자」에서 이미 공산당은 늑대로 (그리고 선량한 남한 주인은 토끼로) 묘사되었다. 아무리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이런 의인화를 실제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순진함을 가정하는 것이 더 순진한 태도다. 물론 돼지, 여우, 늑대의 의인화는 북한 주민과 공산당에 대한 남한 아동의 관상학적 편견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런 편견이 생물학적 편견으로까지 이어지는가? 도무지 믿기 힘들다.
무엇보다, 1980년대 초반에 이미 반공 애니메이션은 감각적으로 당시 아동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변칙적으로 수입되어 재편집과 더빙 과정을 거쳐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일본 애니메이션과 너무 손쉽게 비교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간첩을 잡던 똘이도 1980년대가 되면 조선 시대로 가거나(「꼬마어사 똘이」) 선사시대로 갔고(「공룡 100만년 똘이」), 요즘 같으면 ‘세카이계’의 변주라고 했을 「똘이와 제타로보트」에서는 지저 세계로도 갔다. 하지만 「해돌이 대모험」 같은 반공 애니메이션이 개봉하면 꼬박꼬박 챙겨 보기는 했다. 극장에서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상황에서, 반공 애니메이션은 일본 원작의 표절작과 도작과 해적판 만화와 어우러져 우리 세대의 서브컬처 감수성을 조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로파간다 문화 정책의 입안자들이 염두에 두었을 목표와는 무관하게, 어떤 빗나간 훈육이 작동했던 셈이다.
이를 소련과의 냉전 분위기가 극에 달했던 1950년대 미국의 상황과 비교해서 살펴보면 흥미롭다. 『심야 영화』(Midnight Movies)를 공동으로 집필한 조너선 로즌바움과 짐 호버먼은, 1960년대 히피들의 팝 초현실주의가 도래하기 전에, 1950년대 미국 아동에 의한 (그리고 그들을 위한) 미국 대중문화의 다다적 ‘곤죽화’(trashing) 과정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EC 코믹스의 괴기 만화나 영화사 AIP의 저예산 공포, 액션, SF 장르 영화였다. 그럼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이때 10대 시절을 보낸 미국 감독이 누구인가? 상업 영화에서 독립 영화까지 스펙트럼을 넓게 잡아 세 명만 꼽아 보자면, 스티븐 스필버그와 데이비드 린치, 그리고 존 워터스 같은 1946년생 감독이 떠오른다. 로즌바움과 호버먼이 ‘미국적 다다’라고 보았던 문화에서 성장해 그야말로 아메리칸 서브컬처의 루이스 부뉴엘이라 해도 좋을 작가가 된 조지 A. 로메로는 1940년생이다. 이들은 이전 시기의 미국 감독과 분명 감각적으로 다르다. 19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봉준호, 류승완, 연상호, 장준환 등이 불과 열 살 내외 차이가 날 뿐이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 등과 감각적으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1984년에 한국에서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를 유년기에 본 이들과 성인이 되어 본 이들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타란티노는 흔히 ‘무비 브랫’(movie brats)이라 불리는 스필버그 또래 감독 [*] 마틴 스코세이지(1942년생), 피터 보그다노비치(1939년생),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1939년생), 폴 슈레이더(1946년생) 등. 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미국 감독 가운데 영화관에서만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도 영화를 보며 유년기를 보낸 첫 번째 세대이자, 고든 더글러스의 「방사능 X」(원제는 ‘Them!’이며 한국에서는 1958년에 개봉)를 거대 개미가 나온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보러 갔던 첫 번째 세대라고 말이다. 한국에서 이런 세대를 이루는 감독은 봉준호처럼 19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이들이다.
2003년에 개봉한 장준환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만큼 우리 세대의 곤죽화된 상상력을 제대로 보여 준 영화도 없다. (이보다 훨씬 덜 알려진 독립 영화로 2010년에 개봉한 이응일의 「불청객」도 떠오른다. 이응일은 1977년생이다.) 미국 작품으로 위장해 1983년에 MBC에서 방영한─하지만 아동에게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고 해 갑작스레 끝나 버린─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천년여왕」의 세계관 같은 것이 희미하게 어른거리기도 하고 말이다. 국가가 서브컬처의 최대 후원자였던 시대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이들만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 그들에겐 무궁화문고가 곧 EC 코믹스였고 김청기의 서울동화가 곧 AIP였다. 이런 유년을 그리움의 감정으로 추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기억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의 경우처럼.
영화 평론가.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사 및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2001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2016년 비정기 영상 전문지 『오큘로』를 창간해 현재까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유령과 파수꾼들』(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2021), 『식물성의 유혹』(2023), 『물듦』(2025)이 있고,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2023)를 번역했다. 2025년 제4회 정점식미술이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