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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 용에리위스와 나눴을 법한 대화
A Conversation with Hella Jongerius That Might Have Taken Place

루이세 스하우벤베르흐

헬라 용에리위스: 적어도 당신 동료들은 기념할 만한 일이 생기면 당신에게 꽃을 선물해 줍니다. 당신이 디자이너라면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아요. 너무 괜찮은 꽃병이 꽃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루이세 스하우벤베르흐: 그렇죠, 미술가들은 꽃을 받아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병이나 물통에 꽂아 두고요. 그런데 꽃병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꽃을 받지도 않으면서 왜 꽃병을 디자인하는 거죠?

용에리위스: 꽃병이 들려주는 ‘이야기’ 때문이죠. 물론, 원래는 사용하기 위해서 꽃병을 만들어요. 그러나 다른 쓸모 있는 사물처럼 꽃병에도 기능 이상의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사물 위로 떠오를 수 있답니다.

스하우벤베르흐: 예술을 말하는 것이로군요.

용에리위스: 아뇨. 나는 예술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쓸모 있는 사물들은 풍성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맥락 및 특별한 순간과 관련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 역사를 확실하게 참조한다면,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에 모든 관련성들을 포함시킨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쓸모 있는 사물에 관해 어느 정도 소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하우벤베르흐: 하지만 진짜로 중요한 게 쓰임새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당신이 사물의 의미만 생각한다면, 아예 꽃병 바닥에 구멍을 뚫자고 말하지 그래요? 당신이 예술가를 자처한다면 단순히 기능성을 무시하는 건 어때요?

용에리위스: 나한테 예술적인 허세가 있다고 믿지는 않아요. 디자인이 내 전공이죠. 내가 디자인한 것들은 대부분 실제로 사용 가능합니다. 가끔 실질적 사용을 완전히 무시할 뿐이죠. 내가 자수 장식으로 테이블과 컵을 붙여 버린다면, 나는 그 컵으로는 차를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신은 컵에 대한 다른 기능을 생각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스하우벤베르흐: 그래서 그런 생각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기능성을 줄이도록 하는 건가요?

용에리위스: 나는 자수를 통해 먹거나 장식하는 관습에 대해, 전통과 예의범절에 갇힌 것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얻습니다.

스하우벤베르흐: 그 균형이 가끔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하나요? 기능이 가장 우선할 수 있나요?

용에리위스: 나는 어디까지나 디자인이 잘 작동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만약 그것이 대량생산에 적합하다면 금상첨화겠죠. 그건 정말 짜릿한 일이에요. 나는 산업적인 프로세스를 좋아합니다. 예술은 산업이 작동하는 스케일과 경쟁할 수 없죠. (···)

스하우벤베르흐: 10년 전, 그러니까 당신이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즉시 드로흐 디자인에 빠져들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용에리위스: 당시 우리는 가치 있다고 말할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었죠. 우리는 어떤 확고한 아이디어로 디자인 세계를 뒤흔들었어요. 모든 것은 디자인 이면의 개념들 주변을 맴돌았어요. 그리고 그 개념은 확실한 것이 되어야만 했죠. 우리는 모든 상품을 철저하게 단순화시켰어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역사에 매달릴 수 있는지, 어떤 아이디어가 표면 아래 숨어 있는지. 시각적인 디자인은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아이디어에 완전히 종속된 부차적인 것이었어요. 우리는 상품에서 거추장스러운 면들을 완전히 벗겨내서 그 물건이 정말 무엇인지 볼 수 있게 했죠. (···) 만약 당신이 디자이너로서 주제를 장악하지 못하고 거기서 더 나아간 중요한 의미들을 탐색하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표피에서 헤어나지 못할 겁니다. 결국 그것은 막다른 길이에요. 나는 우리가 스스로를 실용적인 측면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실수라고 믿습니다.

스하우벤베르흐: 당신은 그럼 자신과 맞지 않는 직업을 가진 건 아닐까요? 어쩌면 디자이너들은 다른 측면의 이야기들을 예술에 맡겨야 할지도 몰라요.

용에리위스: 유용한 사물들 역시 그들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하우벤베르흐: 예술가들이 가진 자유를 질투하나요?

용에리위스: 가끔은요. 주로 내용에 관심을 둘 때 나는 압박을 느끼지만, 기능성의 테두리 안에 머물도록 스스로를 강제해야만 하죠. 그나저나, 그게 그렇게나 많이 문제가 될까요? 그게 예술이든 디자인이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스하우벤베르흐: 디자인과 미술 간의 엄격한 경계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동기가 중요하죠. 사람들은 때로 미술에 기생한다는 혐의로 디자이너를 비난합니다. 디자이너는 미술에서 개념을 빌려와 그것을 희석시켜서 유용한 사물들로 변형시키는데, 원칙적으로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미술이나 다른 것을 섭취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그리고 어쩌면 디자이너는 미술이나 다른 분야에서 자양분을 얻는 것에 대해 심지어 더 파렴치해야 할 거예요. 다른 분야에서 가져올 수 있는 영감이 많잖아요.

용에리위스: 맞아요. 다른 분야들! 나는 종종 문학과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요. 또한 거리를 걸을 때 단순히 시야를 열어 둬도 영감을 얻을 수 있답니다. 이 직업에는 너무 많은 요인이 관련되어 있어서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없어요. 디자인계뿐만 아니라 폭넓게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의식하고 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고급문화만큼이나 거리의 문화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러한 분야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스스로 미술가나 건축가가 될 필요는 없어요.

스하우벤베르흐: 미술가 역시 서로 간에, 그리고 다른 분야로부터 생각을 훔치는 것으로 악명 높습니다. 이것 때문에 분개하거나 맹렬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누구 하나 꿈쩍도 하지 않을 거예요. 디자이너가 미술에서 뭔가를 훔친다면, 적어도 그것은 단순히 전문용어가 아닌 내용이어야 합니다.

용에리위스: 디자이너는 미술에 늘 추파를 던지죠.

스하우벤베르흐: 당신은 미술의 자유와 높은 위상을 부러워하고, 게다가 미술계의 클리셰와 전문용어에 추파를 보내는군요. 당신은 하얀 벽으로 된 미술관과 갤러리의 전시대 위에 꽃병을 전시해요. 마치 그들이 자율적인 예술 작품인 것처럼요. 실험, 내용, 연구, 그리고 타협 거부와 같은 말들로 공기가 가득하군요. 그런데 그런 말들이 디자인에 속하는 것일까요? 반대로 미술가들은 디자이너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왜냐하면 미술가들은 자신의 분야보다 디자인이 덜 소외되었고 덜 교양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디자인은 실용성의 잣대를 만족시켜야 하지만 미술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용에리위스: 디자이너는 거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해야 해요. 정말 가능할 거예요. 왜냐하면 지적인 디자인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죠. 미술가들은 분명 거대 담론들과 씨름할 여지가 많아요. 미술가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고 관중을 장악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고 있나요? 나는 미술가들의 난해한 진술들을 수없이 읽었지만 미술 작품 자체는 종종 상당히 책임감이 부족해요.

스하우벤베르흐: 그런데 디자이너도 미술가와 같은 일을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디자이너는 종종 인상적인 서술과 더불어 자신을 팝니다. 그런 표현은 실제로 그들이 만든 것이 보여 주는 사실에 걸맞지 않는다고요.

용에리위스: 디자이너가 지나치게 호언장담을 한다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 그들은 명백하게 정의된 문제를 다루어야만 해요. 자신이 한 약속을 꼭 지켜야 하며, 주변 세상과 관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스하우벤베르흐: 디자이너의 무기고에서 중요한 무기는 접근성이죠. 그렇지 않나요? 유용한 사물은 종종 기대하지 못했던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습니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그걸 필요로 하고요.

용에리위스: 사실이에요. 디자이너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물들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옮길 수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디자이너의 잠재적 힘이에요. 그러나 디자이너는 그 힘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스하우벤베르흐: 디자인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요, 실제로? 그 범위는 사회 안에서 중요한가요? 아니면 문화적 풍경의 끝에서만 작동하나요?

용에리위스: 그것은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해요. 책무는 중요합니다. 대량생산 산업은 불필요한 디자인 제품들과 함께 지나치게 오랫동안 시장을 이끌어 왔어요. 이런 점에서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독창적인 발상들로 산업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더 넓은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이너는 소비사회를 창출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해 왔어요. 그러니 제품에 대해 더 새롭고 보다 의식적인 사고방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면목을 세우는 일이 될 겁니다. (···)

스하우벤베르흐: 몇 년 전, 친구들 틈에서 나는 당신이 유행에 안 맞는 신발을 신는 사람들과 그리고 심지어는 식탁에서 나이프를 핥는 사람과는 같이 다닐 수 없노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깜짝 놀랐죠. 왜냐하면 나는 미술가들 가운데 그런 사소한 것을 혐오하는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없거든요. 대학교 때 동료 철학과 학생들 가운데는 전혀 없었죠. 그때 탁자 밑에 숨겨진 내 초라한 구두를 당신이 못 봐서 기뻤어요. 어쨌든,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당신 사무실에서 내 나이프를 핥아야겠다고 결심했죠. 당신은 요즘도 그렇게 까다로운가요?

용에리위스: 이거 참,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군요. 아뇨, 나는 내가 좀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코트와, 거기에 안 맞는 신발을 고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물론 여전히 말해야 할 중요한 점은 있죠. 그 반대의 경우는 물론, 훨씬 나쁘다는 것을요.

스하우벤베르흐: 꽃 더미에 파묻혀 가려지는 게 더 나은 멍청한 꽃병을 만드는 세련된 디자이너를 말하는 건가요? 그러면 지적인 내용이 강하게 담긴 꽃병만 전시대 위에 놓이게 되나요?

용에리위스: 나는 말 그대로 전시대를 선호하지 않아요. 당연하죠. 그러나 좋은 디자인은 순수 미술에 맞서 평가될 수 있고, 그래야 합니다. 가만, 나는 아직 당신이 나이프 핥는 것을 보지 못했군요. 설마 한낱 디자이너에게 겁먹고 그냥 있지는 않을 거죠? 그렇죠?

© Luoise Schouwenberg, 2003

참고

헬라 용에리위스
네덜란드 디자이너. 그녀의 작업은 제품 디자인, 공예, 미술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도나 캐런, 카펠리니, 비트라뿐 아니라 미술관과 미술 기관의 의뢰를 받아 가구와 일상 용품을 만들고 인테리어 설치 작업을 한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드로흐 디자인과 함께 작업하며 전시했다. 필라델피아 현대미술연구소(2000)와 런던 디자인박물관(2002)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루이세 스하우벤베르흐
네덜란드 미술가이자 이론가다. 심리학과 조각, 철학을 공부한 그녀는 1980년대부터 미술가로 경력을 쌓았으며 2000년 이후에는 미술과 디자인 이론에 관심을 갖고 전시 기획 및 저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을 비롯한 여러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헬라 용에리위스: 책』(Hella Jongerius: The Book, 2010) 등을 함께 쓰고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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