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6일, 헝가리 영화감독 벨라 타르가 세상을 떠났다. 헝가리식으로는 ‘터르 벨러’가 맞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 잘못 불린 그의 이름엔 우리 세기에 가까스로 남은 지난 세기의 좋은 흔적이 있는 것 같아서다. 고쳐 부르기보단 그대로 두고 작별을 고하자. 망자에 대한 애도는 언제나 애도하는 사람 자신의 과거를 향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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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구상하면서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2004년부터 2012년 사이에 겪은 일들은 절대 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아무리 개인적인 방식이라고는 해도 한국의 영화 문화를 종단하는 책에서 이 시기를 다루지 않는다는 건 부조리한 일로 비칠 수 있다. 이 무렵에는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김기덕 등이 본격적으로 국제적 영화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2003년 12월 24일에 개봉한 강우석의 「실미도」는 한국 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한편, 1995년에 창간한 『씨네21』, 『키노』, 『프리미어』 외에도 『필름2.0』(2000년 창간), 『씨네버스』(2000년 창간), 『무비위크』(2001년 창간) 같은 영화 잡지들이 경합하다 하나둘 폐간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비평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도 하던 시절이다. 나는 이런 소문이 비평을 홍보 전략으로 대체하길 꾀하는 산업적 제도에 의해 날조된 거짓 진단에 불과하다는 ‘영화 비평 쇠퇴론 비판’을 써서 2007년 『교수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다. 덧붙이자면, 비평을 제 것으로 삼으려 드는 홍보 전략이 대담이나 강연 등 ‘말의 이벤트’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주지하다시피 이런 이벤트는 이제 평론가와 저널리스트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이때 내 삶은 온통 영화제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짤막한 리뷰나 동향 기사 말고는 글도 많이 쓰지 않았다. 명색은 영화제 프로그래머지만 일에서 느끼는 감각은 국내외 영화인들을 만나며 파티에서 흥청대는 거간꾼 쪽에 가까웠다. 게다가, 영화를 사고파는 이들과 빈번히 만나다 보니 어느새 말투도 그들과 닮아 가서 삼류 장사치가 된 기분이 종종 들고는 했다. 2011년 주일우 선생이 창간한 『인문예술잡지 F』에 ‘뤼미에르 은하의 가장자리에서’라는 제목으로 분량에 제한이 없는 장문의 글을 연재 [*] 이 연재 원고는 2018년에 미디어버스에서 출간한 나의 첫 비평집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에 묶여 수록되었다. 하기 전까지, 나는 ‘문화 매개자’라는 허울 좋은 자리에서 ‘기획’이라는 미명으로 ‘비즈니스’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대해 무언가를 쓴다면 내가 어떤 이들을 만나 교류했고, 어떤 영화들을 한국에 소개했고,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지도록 지원했는지 등을 나열하는 자기과시로 치닫기 마련이다. 그런 건 노인이 되어서나 할 일이다. 아니, 그런 수치스러운 일에 몰두하면서 사람은 노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과거는 오직 부숴 버리기 위해서만 다시 꺼내야 하는데도 말이다.
한편으로, 영화제 일을 하는 동안 나는 평생의 친구도 얻었지만 동시에 평생의 적도 만들었고 결국 한꺼번에 많은 적을 만들면서 해임되었다. 따라서 그 시기에 관해 쓰려면 결국 적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들이 그때 이후로 퍼뜨려 온 (결국 내 귀에까지 들어온) 소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짚지 않을 수 없을 터다. 이를테면, 서른 살의 내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씨네21』 기자 한 명이 조심스레 다가와 귀에 대고 낮게 물은 적이 있다.
“씨네코리아 같은 데 영화 소스 공급해 주시는 분이 유운성 씨랑 임재철 선배라면서요?”
씨네코리아는 2000년대에 외국에서 출시된 여러 DVD 타이틀을 무단으로 리핑해 한국에서 대거 출시한 여러 회사 가운데 하나다. 개인적으로, 씨네코리아와 몇몇 유사 리핑판 제조사들이 염가로 출시한 수많은 DVD들은 2000년대 한국 시네필 문화에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100만 원 가까운 가격에 팔렸던 오즈 야스지로 컬렉션을 동일한 화질로 10만 원 정도면 구할 수 있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는 동서추리문고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한국 장르 문학 애호가들에게 끼친 영향과 비교할 만하다. 하지만 그 기자의 말투에는 좀 음험한 구석이 있었다. 이런 소문을 해명해야 하는가? 이런 유의 소문을 해명하려다 보면 누구도 읽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고 읽을 필요도 없을 또 다른 책을 한 권 써야 할 터다. 나는 몽테뉴처럼 다짐하곤 한다. 내 삶이 먼저 공공연히 말하지 않은 것을 내 죽음이 말하게 하지는 않겠다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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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는 내 영화제 프로그래머 경력의 끝과 시작에 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그래서 어쩐지 그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일찍 예외를 허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저런 식의 소문이 하나둘 나의 등 뒤로 다가와 갸웃갸웃 스멀대기 시작할 때다. 그 또한 소문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와 이를 원작으로 만든 벨라의 영화에서 첫 번째 장의 제목은 모두 ‘그들이 온다는 소식’이다. ‘소식’을 뜻하는 헝가리어 ‘hír’는 ‘소문’을 뜻할 수도 있다. 「사탄탱고」는 소문의 앙상함이 드러나는 과정을 황량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영화다.
약간은 그런 황량한 마음으로, 2006년 2월 7일 아침, 나는 일찍 식사를 마치고 숙소를 나와 눈 덮인 부다페스트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빗자루로 길을 쓸고 있는 사내 하나가 보여 카메라를 들었더니 나를 매섭게 노려보면서 찍지 말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군데군데 얼음이 떠다니는 도나우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올라가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다리 위엔 지나다니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강바람이 뼈에 사무칠 정도라 오래 있기는 힘들었다. 무척 추웠고, 외롭다기보다 심심했고, 배가 고팠고, 며칠 동안 헝가리 영화 주간 행사에서 본 영화들은 모두 후지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에 벨라와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딱히 초조하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불안했다. 그리고 약간은 들떠 있었다. 정말이지 그는 어떤 사람일까? 진위가 의심스러운 소문과 외국 잡지에 실린 인터뷰, 그리고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떠올린 어렴풋한 상만으론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사탄탱고」의 인물 중에서라면 굉장히 독한 헝가리 전통 증류주인 팔린커(pálinka)를 연신 마셔 대며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거구의 주정뱅이 의사가 떠오르기는 했다. 실제로 벨라는 이후 내가 그를 만날 때마다 어느 정도 취해 있었다. 하지만 체구가 큰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전날 겪은 일도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원래 벨라와 만나기로 한 것은 2월 6일이었고 이날 그는 조르주 심농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작 「런던에서 온 사나이」의 제작 발표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제작 발표회가 예정되어 있던 건물에 어떤 이가 폭탄을 설치해 두었다는 연락이 와서 행사를 취소하고 일정을 하루 미룬 것이었다. (누군가의 장난질 때문에 생긴 소동이었다.) 이 행사는 프로듀서 욍베르 발상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중단되었던 「런던에서 온 사나이」의 촬영 재개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예술영화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발상은 막대한 빚에 시달리다 2005년 2월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벨라의 영화를 제작한 것이 그의 재정적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2009년에 나온 미아 한센로브의 「내 아이들의 아버지」는 발상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로, 여기에 등장하는 스웨덴 감독은 벨라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도 한다.
제작 발표회가 끝나고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줄곧 담배를 피워 대며 간단한 물음에도 엄청나게 많은 말을 쏟아내곤 했다. 내가 「사탄탱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야기하자 이 영화를 어디서 보았느냐고 물었다. 2000년에 열린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심야 상영으로 보았다고 말하니 어떤 미친 인간이 이 영화를 심야 상영으로 편성했느냐며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실제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두 번째 휴식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가 앉은 열의 관객은 대부분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의 이런 태도에 좀 무심해진 건 나중의 일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상영에 앞서 축사를 읽는 헝가리 대사관 직원들을 보며 내 귀에 “파시스트 새끼들!”이라고 속삭이는가 하면, 그의 회고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파티에 온 영화제 관계자나 평론가 중 몇몇을 가리키며 ‘빌어먹을 부르주아적 매너’를 보인다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약간 취해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장편 및 중·단편 영화 전작을 모아 회고전을 열고 싶다고 하자 그는 「런던에서 온 사나이」가 완성된 뒤에 하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면 2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전증 기미가 보이는 그의 손에 자꾸 시선이 갔다. 그때마다 무례하게 비치지 않으려고 재떨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찻잔을 손으로 들어 올릴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잠시 이어진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그에게 존경하는 헝가리 감독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입에서 곧바로 나온 이름은 얼마간 예상했던 대로 얀초 미클로시였다.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메피스토」의 서보 이슈트반에 대해 한참 폭언을 쏟아 내고 나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오른손 검지를 들어 강조하며 언급한 이름은 보디 가보르였다.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하자 벨라는 그의 영화는 자신에게 앤디 워홀의 영화만큼 중요하다고 말하며 내 수첩에 보디의 부인인 벅서수스 베로니카의 연락처를 적어 주었다. 그리고 0004943521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자신의 휴대폰 번호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젊은 헝가리 감독 가운데 그가 주목하는 인물이 있는지 물었다. 벨라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말했다.
“없어. 아무도. 헝가리 영화 주간에서 지금까지 본 영화 가운데 좋은 게 있던가? 내가 장담하지. 앞으로도 자넨 단 한 편의 좋은 영화도 찾지 못할 거야.”
그날 저녁 열린 헝가리 영화 주간 폐막식 및 시상식에서는 행사 기간 내내 화제에 올랐던 팔피 죄르지의 두 번째 장편영화 「택시더미아」가 대상을 비롯해 다섯 개 상을 휩쓸었다. 몇 개월 후 이 영화는 그해 칸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이미 전년도 칸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문드루초 코르넬의 세 번째 장편영화 「요한나」도 몇 개의 상을 받았다. 내가 아는 한, 벨라는 이 감독들을 인정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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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는 약속을 지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약속을 지키리라고 크게 기대하진 않았었다. 이름이 조금이라도 알려진 창작자가 비평가나 기획자와 잠깐 만난 자리에서 하는 말이, 특히 약속의 말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아직 신생 영화제에 지나지 않았던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이미 나는 저 ‘빌어먹을 부르주아적 매너’로 오가는 온갖 공허한 말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외국 영화인과의 첫 미팅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어떤 영화제인지를 설명하는 일로부터 시작했다. 미팅이 끝날 때쯤이면 희미한 약속의 말들이 잠시 눈앞에서 가물거리다 사라졌다. 이 점에 있어 벨라는 봉준호와 더불어 내가 매우 예외적인 존재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토리노의 말」 완성 후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한 공언을 깨지 않고 세상을 떠나지 않았는가. 사라예보에서 작은 단편영화를 만들고 빈에서 장소 특정적 작업을 하기도 했으니 죽기 전까지 15년 동안 영화를 다시 만들려 한 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공언(公言)은 영화감독이 내뱉는 흔한 공언(空言) 같은 것이 되지는 않았다.
2017년에 암스테르담 아이 필름 뮤지엄에서 ‘벨라 타르: 세상의 끝까지’라는 전시가 열렸을 때, 전시장 출구 쪽에서는 그가 새로 만든 10분짜리 단편 「무하메드」가 상영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사라예보의 거리에서 무표정하게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소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단 하나의 숏, 그리고 그의 복장과 작품 제목이 유럽 내 불법 이민자의 상황을 환기하는 작품이다. 음식 배급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하나의 수평 트래킹 숏으로 포착한 2004년 단편 「프롤로그」 이후, 벨라가 만든 가장 직접적인 사회적 팸플릿. 문득, 소년의 모습에 언뜻 벨라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 어쩐지 그는 영화를 만드는 현장으로 돌아오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위험한 인물에게 누가 돈을 댈 것인가? 명백한 구걸의 몸짓을 취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에는 내가 벨라의 얼굴에서 감지하곤 하는 위엄도 서려 있었다. 지금 저 단편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2007년에 완성된 「런던에서 온 사나이」는 그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배급사는 이 영화를 벨라의 요청에 따라 이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에 첫 공개했다. 회고전은 대성공이었다. 「사탄탱고」가 상영되는 극장은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영화 상영 전에 무대에 나선 벨라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러분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공연한 기우였다. 여덟 시간 후에 그가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돌아왔을 때 객석은 여전히 꽉 차 있었다. 낮 동안 술집에 있던 그는 관객과의 대화에 들어오기 한두 시간 전부턴 커피만 마시고 있었지만 술기운이 아직 좀 남아 있었다. 분명 그는 좀 들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관객과의 대화는 두 차례뿐이었지만, 벨라는 자신의 모든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무대 인사를 하고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갖겠다고 자청했다. 당시 『씨네21』의 남동철 편집장은 “벨라 타르는 올해 전주의 최고 스타”였다고 썼다. 이처럼 모험적인 감독에 대한 환대의 분위기는 2009년의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2010년의 페드로 코스타, 2011년의 키들랏 타히믹, 2012년의 알베르트 세라로 이어졌다.
야외에서 영화제 공식 파티가 열릴 때였다. 벨라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입구 쪽에 술잔을 들고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말없이 그러고 있던 그는 내게 자신이 짐작한 게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자신에게 아시아 사람들의 얼굴은 익숙지 않아서 구분하기가 좀 어려운데, 며칠 지내며 주의 깊게 살펴보니 이제 한국인과 중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좀 알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슬며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국인… 한국인…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 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추정은 다 맞았고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하자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내 직업”이라고 답했다.
어느 날 저녁, 영화제 게스트를 위한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그해 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작인 「캡틴 에이헙」의 주연으로 전주를 찾았던 배우 드니 라방이 조그만 아코디언을 들고 연주를 하며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벨라 앞으로 다가와 한참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파안대소를 하며 “정말 재밌는 친구로군!”이라고 말하던 것이 떠오른다. 적잖이 취해 있던 그는 오른손 검지로 슬며시 내 왼쪽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내년 초에 부다페스트에 와, 꼭.”
드니와 벨라는 그해 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게스트였기에 초청 팀에서는 각각 통역 수행원을 붙이려 했지만, 둘 모두 비슷한 이유로 거절하거나 물렸던 기억이 난다. 주요 일정은 자신이 알아서 확인하고 늦지 않게 참석할 거라고, 그리고 두 다리가 있으니 얼마든지 걸어 다닐 수 있고 두 팔이 있으니 얼마든지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암스테르담에서 무하메드의 아코디언을 보고 있을 때, 제멋대로 설치는 연상의 어지러운 선이 「홀리 모터스」로까지 이어졌던 것은 그때의 기억 때문이다. 카락스의 영화 속 막간 장면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무리를 이끄는 드니처럼, 벨라 또한 연주를 계속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막간이라 생각한 곳이 실은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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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초, 로테르담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 출장차 유럽에 갔을 때 다시 헝가리를 찾았다. 2월 1일에 있을 「사탄탱고」 15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벨라가 전화로 알려 준 행사 장소는 부다페스트의 한 영화관이었다. 공식적인 행사 자리에 가는 일을 언제나 불편하게 여기던 나는, 미리 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빌어먹을 부르주아적 매너’를 구사하거나 열없이 어슬렁거리는 게 싫어 행사가 시작하는 시간에 딱 맞춰 갔다.
도착하니 영화관 로비에는 벨라 혼자 있었다. 그는 내게 황급히 다가와 손에 티켓을 쥐여 주고 등을 떠밀며 “왜 지금 오는 거야! 빨리 들어가!”라고 말했다. 어리둥절한 채 여하간 상영관으로 들어갔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얼마 후, 벨라의 간단한 인사가 있고 나서 상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중간 휴식 시간을 포함해) 꼬박 여덟 시간 동안 「사탄탱고」를 보았다.
그러니까 15주년 기념 행사는 「사탄탱고」를 만들 때 참여했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모여 이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벨라는 영화관 인근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을 거다. 영화를 본 다음엔 추위가 온몸을 파고드는 부다페스트의 밤거리를 한참 걸어서 출연자 가운데 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몰려갔다. 주인은 따뜻한 구야시(gulyás)부터 내놓았고, 팔린커가 모두에게 한 잔씩 돌았다. 우리는 밤새도록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벨라의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 외에 초대를 받아 모임에 합석했던 이들은 울리히 그레고르와 에리카 그레고르 부부, 그리고 나밖에 없었다. 베를린의 예술영화관 아르제날(Arsenal)의 공동 설립자이자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의 디렉터를 역임한 울리히 그레고르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벨라의 스타일이 온전히 드러난 첫 영화인 「파멸」과 대표작 「사탄탱고」 등을 베를린영화제에 초청하며 그의 작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끔 한 인물이다. 나는 그가 벨라를 추모하며 쓴 글에서 「사탄탱고」와 같은 영화를 보는 최고의 방법에 관해 쓴 부분을 떠올려 본다.
부다페스트에서 우리는 후반 작업이 진행 중인 「사탄탱고」의 편집본을 볼 수 있었다. 사운드는 아직 분리된 채였고, 필름 릴 하나가 끝날 때마다 휴식을 취하며 기운을 차리고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온종일 이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이미 나는 이거야말로 「사탄탱고」와 같은 영화를 보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내가 「사탄탱고」를 처음 본 것은 2000년에 열린 전주국제영화제 심야 상영을 통해서였다. 나는 당시 다니던 광고 회사에 휴가를 내고 전주로 와서 하루 종일 부모님 댁에서 늘어지게 잔 다음에 혼자서 이 영화를 보러 갔다. 자정부터 시작된 심야 상영이 끝나고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 밖으로 나오니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영화 자체가 선사하는 웅장한 경험과는 별개로, 이것은 「사탄탱고」를 보는 최악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낮에 영화관에 들어가 밤에 나와야 하고, 반드시 친구들과 함께여야 하고, 그들과 밤거리를 유령처럼 걷다가 카페나 술집으로 들어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야기를 한없이 나누어야 한다. 벨라는 「사탄탱고」를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그날 나를 불렀던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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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의 마지막 장편영화 「토리노의 말」은 2011년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2년 전, 「사탄탱고」 15주년 기념 파티 자리에서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 벨라는 촬영을 시작한 지 갓 2주가 되었다고 했다. 영화에 사용할 음악도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술자리에 와 있던 음악 감독 비그 미하이(그는 「사탄탱고」에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 선각자 이리미아시 역을 맡기도 했다)는 술을 마시다 말고 이따금 음악을 재생해 벨라에게 들려주곤 했다. 벨라는 현장에서 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촬영할 것이라 했다.
술자리에서 장마르크 라무르라는 프랑스 청년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는 벨라의 영화에 매혹되어 그의 연출부로 일하며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했다.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벨라 타르, 나는 영화감독이었다」를 실제로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다. 거기서 벨라는 “필름에는 현실만 담을 수 있지만 그건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원하는 걸 현실에서 뽑아낸 것, 그것이 바로 픽션”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비나 바람은 전혀 포토제닉하지 않다”고 말하곤 했던 벨라는 「토리노의 말」에서도 강풍기와 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놀랄 만큼 물질성을 극대화한 이미지를 얻어 낸다. 한편으로 그의 프레임은 그 바깥을 거의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특성을 띤다. 이 점에서 그의 영화는 분명 로셀리니적인 것의 (심지어 얀초적인 것의) 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벨라의 영화적 픽션은 결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다. 현실은 카메라 앞에 놓이기 전에 우선 만들어지겠지만, 픽션은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점에서 현시(presentation)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은 바람 외에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토리노의 말」은 완성까지 2년이 걸렸고 상영용 프린트는 베를린영화제 직전에야 도착했다. 나는 공식 상영이 있기 전 마련된 비밀 시사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 영화를 보았다. 당시 전주국제영화제는 일반적인 영화 수입사라면 구매를 망설이겠지만 영화적 가치가 큰 작품을 골라 직접 수입해서 한국의 관객에게 소개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나는 필름 마켓의 해외 세일즈사를 찾아가 「토리노의 말」을 수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 영화는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처음 공개되었고 이듬해 2월 23일에 정식으로 개봉되었다. 나는 아트하우스모모에서 영화 상영 후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2년 영화제가 끝난 직후 8년 동안 일했던 프로그래머직에서 해임되었다.
그해 10월, 부산에서 벨라를 다시 만났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초청되어 처음으로 부산을 찾았다. 나는 그에게 따로 연락은 하지 않고 부산에 갔다. 어느 날 정오가 약간 지난 시각, 혼자 조용히 점심 먹을 만한 곳을 찾아 해운대 시장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이 집 저 집을 기웃대다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골목길 저 앞에서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벨라였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와락 얼싸안으며 말했다. “지금 시간 있나? 당장 커피라도 마시러 가지. 그동안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려줘.” 해임 직후 그는 곧바로 내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그 이후 나는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당장 이야기를 나누자는 그의 말에 나는 좀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그가 묵고 있는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이튿날 만나기로 약속하고 짧게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이튿날 오후, 우리는 파라다이스 호텔의 카페에서 만났다. 그때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는 찰나, 문득 벨라와 사진을 한 장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직접 사진을 찍거나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었다. 휴대폰을 들고 그에게 말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기왕이면 사람들이 기념 삼아 흔히 찍는 아주 ‘못생긴’ 셀카 같은 것을 찍고 싶다고. 그러니까 당신의 영화에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 법한 컬러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 보자고.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고마워요, 벨라, 벨라 타르.
참고
영화 평론가.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사 및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2001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2016년 비정기 영상 전문지 『오큘로』를 창간해 현재까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유령과 파수꾼들』(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2021), 『식물성의 유혹』(2023), 『물듦』(2025)이 있고,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2023)를 번역했다. 2025년 제4회 정점식미술이론상을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