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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스캔런

미니멀 건축가 존 파우슨이 집에 있는 양말 서랍을 감쪽같이 숨기기 오래전에, 혹은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가 완두콩 껍질을 채워 넣은 요리를 꿈꾸기도 훨씬 전에,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쓸모없는 무언가가 얼마나 값비싼 것이 될 수 있는지 말해 주었다. 노르웨이 이주자의 후손인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주에서 태어났다. 칼턴 대학교에 가기 위해 가족의 농장을 떠난 그는 존스홉킨스, 예일, 그리고 코넬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결국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 정착해서 『정치경제학 저널』(The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을 편집하며 경제학 이론과 사회주의를 가르쳤다. 첫 번째이자 가장 유명한 저서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을 쓴 곳도 이곳이다. 이 책에서 베블런은 금력 과시 경쟁(pecuniary emulation),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명성적 낭비(honorific waste)와 같은 영구한 개념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설명한 이러한 개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들만큼은 해야지”, “가졌으면 자랑해야지” 같은 일상적인 구어 표현이나 『뉴욕타임스 선데이 매거진』 같은 곳으로 흡수되어 왔다.

『유한계급론』은 유한계급에 대한 단순한 풍자를 넘어 사물들의 경제학 자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물건의 미학적 가치가 그것의 명백한 쓸모없음과 정비례해서 어떻게 증가하는지 들춰낸다. 베블런이 설명했듯이 과시적 낭비는 단순히 장식적인 사물일수록 미학적 가치가 높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베블런이 설명하는 미에서는 기술적 숙련도와 노동에 대한 시각 또한 중요하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오스트리아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장식과 범죄」(Ornament und Verbrechen)에서 말한 것과 달리, 베블런은 건축에서 장식을 없애는 것이 반드시 낭비의 감소를 뜻하지 않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현대건축의 기계 미학은 장식의 제거뿐 아니라 제거한 증거까지 없앨 것을 필수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장식의 부재를 위해 필요한 노동이 장식하는 것 자체보다 더욱 과도할 수 있음을 베블런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최근 베블런에 주목하는 이유는 모든 무용지물에 대한 그의 타고난 회의주의가 미술로서 디자인의 현재 경향을 조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미술은 건축, 가구, 그래픽 디자인과 미술 작품을 뒤섞음으로써 장소, 기능, 미술 양식을 갖고 노는 작품으로 느슨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명확한 경우(호르헤 파르도, 토비아스 레베르거)부터 아리송한 경우(하이모 조버니히, 그레고어 슈나이더)까지 여기에 속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간추린 명단에는 안젤라 블로흐, 리암 길릭, 짐 이서만, 유프 판 리스하우트, 로이 맥머킨, 리자이너 몰러, N55, 프란츠 베스트, 패 화이트, 안드레아 지텔, 조 스캔런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 작업이 놓인 장소와 기능의 정도에 따라 변별되는 이 작가들의 차이란 미술로서 디자인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파르도에게 있어 그것은 양식의 끊임없는 재생산이며, 슈나이더에게는 기억의 말소, 화이트에게는 자기 고용의 사치, 조버니히에게는 매정한 간소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파르도의 복고풍 미학을 기억상실증과 연결해서, 조버니히의 퇴폐적인 합판 작품을 사치와 연결시켜 말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유형의 분류는 파악하기 어렵다.

모든 형태의 디자인 미술에서 중요해 보이는 것은 미술이 어디 있는지,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하는지 사이에 모종의 미끄러짐(slippage)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애셔나 루이스 롤러의 제도 비판과 대조적으로, 디자인 미술은 문화적 권위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미술의 장소와 기능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용 및 수용과 연관된 보다 실용적인 방식을 통해 오히려 미술의 접근성에 대한 확장을 시도한다. 제도 비평은 문화적 권위에 대한 환상을 떠받치는 메커니즘을 드러냄으로써 그 권위를 교란시키길 희망하지만 디자인 미술은 분위기조명이나 안락의자를 제공함으로써 그 권위를 민주화하기를 바란다. 제도 비평은 논증에 기초하며, 디자인 미술은 판매술에 기초한다.

디자인 미술은 종종 건축이나 인테리어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산업 디자인과 같이 자신이 신세 진 상업 영역과 직접적인 경쟁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며, 따라서 다른 소비적 물건 및 스타일과 똑같이 소비되는 감탄할 만한 위험을 무릅쓴다. 마치 베블런이 일상의 사태를 끌어와 경제학을 오염시킨 것처럼, 디자인 미술은 미술을 오염시킨다. 가장 성공적이고 급진적인 형태의 디자인 미술은 신체적 행복을 위협하는 미술 오브제에 유용성을 포함시킴으로써 인간이 지닌 (소비) 충동을 다른 (보존) 충동들과 부딪히게 한다. 좋은 디자인 미술은 시간이 흘러 자신의 역할을 다했을 때, 그러한 방식을 통해 미와 유용성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하나로 합치면서 우리의 동기에 혼란을 준다. 사용을 회피하거나 미를 파괴하는 것이 때에 따라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비뚤어져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즐겁고 유익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많은 디자인 미술은 이러한 가능성을 완수할 만큼 충분히 기능하지 못한다. 이러한 결점은 얼마나 강렬하든, 디자인 미술이 지닌 자기 파괴적 충동들을 상쇄하는 경향이 있다. 안드레아 지텔의 「A부터 Z까지 리빙 유닛」(A-Z Living Units)은 물질적으로 너무나 번잡하고 인체 공학적으로 잔혹해서 다름 아닌 미술만큼이나 터무니없다. 그것들을 보면, 누구도 그것과 관계 맺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처럼 (혹은 감히 그럴 수 없었던 것처럼) 너무 반질반질해 보인다.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아마 좋을지 모르지만, 마모된 흔적의 결핍은 근본적인 측면의 급진성에서 사용가치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예술 작품에는 심각한 결함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블런의 이론은 유용하다. 그는 유용한 사물이 되는 데 실패한 정도만큼 미술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시적 낭비의 법칙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유용성의 결핍이다. 인간으로 치면 이는 모든 생산적인 노동을 회피함을 뜻하고, 사물에게는 무용함에 대한 금전적 차별성을 제외한 모든 유용한 측면을 제거함을 뜻한다. 누군가 의미 없는 노력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을수록, 그 노력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또한 의미 없는 노력을 생산하고, 존중하며, 소유한 사람들의 금전적 평판은 더욱 높아진다. 베블런의 논리에 따르면 미술은 궁극적으로 의미 없는 노력이며, 따라서 인간이 관계 맺을 수 있는 가장 돋보이는 일이다. 미술이란 존재는 항상 분명한 사용을 목표로 하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엄청난 시간을 낭비하는 능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디자인 미술이 얼마나 흥미로울 수 있는지는 그것이 드러난 기능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가 아니라, 소비되기 위한 기능을 얼마나 잘 수행했는지에 달려 있다. 알다시피 당신이 스타트렉 장식품을 사든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사든 상관없이, 모든 물건에는 시장가격을 결정짓는 의도된 기능과 상징적 기능 사이의 비율이 있다. 시장가격이 특정 가격 이상에 도달하면 그 물건은 순환 체계에서 제외되는 메커니즘을 따른다. 시간이 흐르면 효용성이 주는 실용적인 매력은 금전적 차별성의 매력에 밀리게 된다. 이에 따라 에로 사리넨의 웜 체어나 프란츠 베스트의 ‘파스슈튀케’(Paßstücke, 영어로는 ‘adaptives’) 조각 같은 3차원 사물들은 희귀성이라는 2차원적 특징을 취득하게 된다. 모든 기능적 사물들이 기능이 아닌, 그 기능의 사회적 가치로 대변되는 의미를 축적하면서 기호의 세계로 납작해지는 곳에 바로 통화가치가 존재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 의미는 사용이 아닌 가격이다.

폭넓은 사회적 가치를 위한 욕망과 정제된 미학에 관한 주장 사이의 문제는 19세기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가 미술공예 운동을 시작한 이래 계속 의식되어 왔다. 그 후로도 빈 공방이나 바우하우스에서부터 구스타프 스티클리, 찰스와 레이 임스까지 대중에게 좋은 감각을 전하려는 도덕적 의무는 만연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미학을 배양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쓸데없거나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베블런은 미술공예 운동이 내세운 순진한 사회적 의제가 지닌 경제적 모순을 폭로함으로써 그 운동의 치유적 가치에 의문을 던졌다. 그러한 의심은 오늘날 디자인 미술의 사회 경제학과 관련하여 똑같이 유효하다.

따라서 지텔의 리빙 유닛이나 레베르거의 퍼포먼스 프레임, 혹은 파르도의 침실용 가구 세트는 그들이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조숙하게 하나의 가치 시스템에 전념하는 한, 유용한 것이 되는 데 실패할 리 없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작품이 열망하는 그 어떤 도전과는 모순되는 대중의 조바심과 제도적 신념을 드러내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미술이 된다. 보통 이 말은 찬사가 되겠지만 이 경우에는 아니다. 예를 들어 리처드 아트슈와거나 솔 르윗의 작품에 내재하는 무용성은 그들의 조각이 구축되고 전시되는 방식에 의해 인정받기 때문이다. 특히 아트슈와거의 경우가 그렇다. 정육면체에 식탁보와 탁자 다리를 그려 넣은 그의 1964년 작 「분홍색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Table With Pink Tablecloth)은, 아주 괜찮은 가구가 될 수 있다 해도, 분명 테이블의 기능이 아니라 가구의 존재적 외관에 관한 작품이다. 아트슈와거는 탁자 밑의 공간을 봉인함으로써 ‘탁자’의 개념을 뭉툭하게 하기 때문에, 그의 조각 위에 여전히 칵테일이나 단어 놀이 보드게임을 올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인체 공학적 제약이 아니라 실용적인 보너스로 여겨진다. 누가 그 작품에 돈을 지불하든 말이다(시카고의 어떤 수집가들은 로버트 고버가 제작한 개 침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지난 10년간 그들이 기르던 독일 사냥개에게 그 침대를 사용하게 했다는 일화는 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이와 비교해, 대부분의 디자인 미술에 내재한 무용성은 구성이나 전시 방식에서 가시적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최종적인 인체 공학적 실패는 다소 짜증 나는 (그리고 값비싼) 유인 상술이 되는 것이다.

미술로서 디자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실망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우리가 아무리 왜곡된 형태의 유용한 물건 만들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치는 무용성의 금전적 차별성에서 기인한다)를 존중한다 해도, 미술 제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디자인과 기능을 들먹이는 것은 담대하지 못하다. 우리는 디자인 작가들이 스스로 적용하는 전문적인 이중 잣대에 철학적으로 실망한다. 유용해지는 데 따르는 위험은 떠안지 않은 채, 유용해 보이려는 미술의 욕구는 우리를 슬프고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유한계급론』에서 최고이자 가장 재미있는 장인 「취미 생활을 규정하는 금력」에서 베블런은 깔끔하게 손질된 잔디의 역사를 추적하며 인류가 가축을 치던 시대로, 풀이 고르게 뜯어 먹힌 목초지를 지키는 양치기가 받았던 존경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경 생활을 버리고 이주한 마을은 곧 도시가 되었고, 현대화되었으며, 산업화되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시골을 갈망하게 만들었다. 잘 정돈된 잔디밭은 우리 양치기 선조들의 금전적 평판을 되돌아보게 하는, 호화롭고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간명한 사회사 속에서 베블런은 평판 좋은 교외 마을에서 잔디를 잘 정돈해 온 계급을 위해, 버려지는 잔디를 참지 못하는 계층을 위해 일말의 경멸을 남겨 둔다. 그렇게 그들은 잔디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기 위해 사슴이나 영양 조각상을 잔디밭에 세워 놓는다. 오늘날, 디자인 미술가가 이런 사람들이 되었다.

© Joe Scanlan, 2001

참고

조 스캔런
미술가, 저술가. 시카고 현대미술관, 뒤셀도르프 K21, 오스탕드 안제이 미술관 등에서 31회가 넘는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카셀 도큐멘타 9, 베니스 아페르토, 취리히 쿤스트할레 및 아인트호벤 판 아베 미술관에서 열린 『껍데기에 불과한』(No Ghost Just a Shell) 등을 비롯한 많은 전시에 참여했다. 시카고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를 거쳐 프린스턴 대학교 시각예술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