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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꿈에서 본 모든 것을 꿈꾼다 2: 유년에 대한 의문 1
유운성

2026년 1월 14일 게재

영화를 둘러싼 장소의 안팎을 오가며 영화의 시대가 어떻게 끝나 갔는지 증언하는 책, 유운성 평론가의 『너는 내가 꿈에서 본 모든 것을 꿈꾼다』의 일부를 연재합니다. 매주 수요일, 네 번의 연재 이후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감상적인 추억에 흠뻑 젖지 않으면서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말하려면 어떡해야 할까? 종종 우리는 다른 이가 그런 식으로 말했더라면 냉큼 뒤돌아 고개를 저을 법한 방식으로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말하곤 한다. 나는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으리라고 제아무리 다짐해 봐야 헛수고다. 이건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유년에 대한 말들은 마음이 아니라 몸의 의지를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 유년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몸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대부분은 이 싸움에서 지고 만다. 그리고 과거를 무슨 영양제나 보양식처럼 줄기차게 찾는 이가, 즉 노인이 되어 간다.

그렇다면 얼마간 마음으로 부릴 수 있는 장치를 하나 동원해 보면 어떨까?

그런 장치들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아마 역사라고 불리는 장치가 아닐까 싶다. 종종 신화의 시간에 머물곤 하는 유년기를 역사의 시간과 나란히 두고 바라보면서, 두 시간의 틈에서 울리는 파열음을 주의 깊게 들어 보자. 유년기의 내가 통과해 왔지만, 결코 경험한 적은 없는 시대에 대해 추억 없이 말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1980년대가 내게는 바로 그런 시대다.

저 파열음을 처음 들었던 것은 얼마간 철이 들고 나서 1980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다. 나는 1992년에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 와서야 ‘광주 비디오’라고 알려진 지하 영상물을 처음으로 보았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통로를 지나는데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19인치 텔레비전 모니터에서 비디오카세트에 녹화된 영상이 무음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을 사진으로 기록한 이미지들은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친구가 가져온 지하 출간물로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영상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 이 비디오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충격은 내겐 경험한 적 없는 과거였다. 도서관 통로를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며칠이 지나 같은 자리에 갔을 때는 김동원의 「상계동 올림픽」이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 설치’ 작업을 무심히 지나치는 관람객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풍경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역사에 대해서뿐 아니라 이미지에 대해서도 나는 언제나 ‘지체자’였다. 역사의 지체자인 동시에 매체의 지체자. 따라서 나의 사례는 어떤 세대의 경험도 대변하지 못한다.

김지현은 1980년대 비제도권 영화 운동을 다룬 논문에서 광주 비디오가 불러일으킨 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독일의 ARD-NDR, 일본의 NHK, 미국의 CNN, 영국의 ITN 등 외국 방송에서 보도된 영상 자료를 바탕으로 1985년까지 최소 4가지 버전의 ‘광주 비디오’가 제작되었다. 이 익명의 영상물들은 1985년 고려대학교 대학 축제에서의 상영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정치 집회와 대학 행사, 그리고 교회와 성당 라인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개 상영되었고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1986년 5월 명동성당에서 상영된 「5월 그날이 다시 오면」(다큐멘터리, 70분)은 하루 5회 상영에 매회당 수용 가능 인원 최대치인 500명의 관객이 몰려들었고 자리를 구하지 못해 돌아가는 사람도 많았다.” [*] 김지현, 「1980년대 비제도권 영화운동의 이론과 실천: 영상 매체의 민주화와 (급진적) 재발명」, 『현대영화연구』 14권 3호(2018): 418–419.

분명 그 무렵 전주의 대학가에서도 광주 비디오가 상영되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학교가 파하고 민중서관과 풍년제과가 있는 관통로 사거리(이제는 충경로 사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에 갔다가 최루탄 냄새를 맡기도 했던 희미한 기억은 있다. 어디선가 주운 ‘사과탄’ 하나면 종일 으스댈 수 있었던 중학교 시절에 그런 비디오를 접했더라면 분명 여기저기 자랑하기 바빴을 텐데도 그런 녀석을 보았던 기억은 없다. 그렇다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이나 누나들은? 그들이라고 해도 내 친구들과 별다를 바 없었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 서울의 명동성당에서 상영되어 화제를 모았다던 1986년, 전주에서 내가 알던 형들과 누나들이 화제에 올리는 영화는 「겨울나그네」였다. 그런가 하면 내 친구들이 주로 화제에 올렸던 영화는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었다. 다만, 이장호의 야구 영화를 여러 번 보고 온 또래 가운데도 곽지균의 멜로드라마를 본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연소자 관람 불가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은 불행한 일이지만 내 친구 중엔 대담하고 모험적인 불량소년이 거의 없었다. 그럼 나는? 1982년에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곧바로 해태타이거즈(현재는 KIA타이거즈)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한 데다 야구 만화의 열렬한 팬이었음에도, 어쩌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이장호의 야구 영화는 내겐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뒤늦게 「바보선언」이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보기 전까지, 내게 이장호는 이 한심한 야구 영화와 「미스 코뿔소 미스터 코란도」라는 요령부득의 영화로만 기억되는 감독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장호의 걸작은 모두 연소자 관람 불가였다.

원작 만화를 놓고 생각해도 아무래도 나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보다는 허영만의 『10번 타자』를 더 좋아했던 것 같기는 하다. 오혜성보다는 이강토 쪽이 내게 더 잘 맞았다. 종종 전주의 극장가를 서성이곤 하던 품행 지도 교사의 눈을 피해 「겨울나그네」를 보러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교사가 인솔하는 단체 관람 외에 학생이 보호자 없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행동을 학교에서 제한하기도 했지만 딱히 그 때문은 아니었다. 이듬해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보고 하염없이 감개무량한 기분이 되어 극장 문을 나서기 전까지 멜로드라마엔 전혀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창호의 영화는 연소자 관람가였다. 나보다 위 세대에 속하는 이들에게 특권적인 역사적 순간으로 기억되는 1987년 6월 항쟁은 당시 전주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의 어디에도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본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와 조 단테의 「그렘린」,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보았던 로버트 저메키스의 「백 투 더 퓨처」(개봉 당시 제목은 ‘빽 투 더 퓨처’)라는 특권적인 환상적 순간들 사이에 공백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어 당대의 신진 영화 평론가들이 이 영화들에 쏟아낸 독설에 가까운 평문을 읽을 때면 문득 자기부정을 강요당하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들은 박정희 말기나 전두환 초기에 대학 시절을 보낸 이들로, 6월 항쟁 직후에 개봉한 「플래툰」의 올리버 스톤을 진보적 미국 영화의 영웅으로 추어올리곤 했던 부류였다. 나는 「플래툰」에서 윌럼 더포가 연기한 고든 병장을 멋있다고 말하는 남자들을 언제나 싫어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럿이 모여 활동하는 조직에는 고든 병장 유형의 사람이 한둘은 꼭 있고 대체로 동료들의 호감을 얻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하튼, 탈춤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창녀와 동거한다든지, 지고지순한 여성에겐 끝내 다가가지 못하고 기지촌 여성에게 순결을 잃는 남자 대학생들을 한국적 낭만의 형상이라 우기는 「겨울나그네」를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 보았다. 개봉 후 6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지만 이 영화는 이미 다른 시대의 물건처럼 보였다. 지금 대학생들이 보면 아예 다른 행성의 물건처럼 보일 것도 같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최인호가 제발트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동년배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잠깐 주변이 아득해진다. 어쩐지 내가 다른 행성에서 온 유랑민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저 사라진 행성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나 마찬가지다. 그 행성의 역사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최인호와 이장호와 배창호가 서울고등학교 출신의 동창이거나 선후배라는 것쯤은 곧바로 알고 또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터인데, 아무리 배우려야 배울 수 없는 그런 기억법은 너무 경이로워 그저 기가 찰 따름이다. 2023년에 열림원에서 새로 출간한 최인호의 원작 소설 표지를 보고 있으면 생각이 더 복잡해진다. 요즘 감성에 애매하게 맞추려 한 듯한 표지가 외려 시차를 더 부각하기 때문이다. 대전고등학교를 나와 「겨울나그네」로 데뷔했던 곽지균은 2010년에 자택에서 연탄가스를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학 시절 읽은 강영희의 이현세론에서 19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 독자층이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입증도 반증도 불가능할 터다. 그런데, 2004년에 개봉한 「실미도」에서 강제규가 북파 공작원들의 무인도 지옥 훈련을 묘사하는 방식을 보면 어쩐지 『공포의 외인구단』의 무인도 지옥 훈련이 떠오른다. 1962년생인 강제규는 강영희가 상정한 이현세의 독자에 속하는 세대다. 역시 1962년생인 임상수가 황석영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오래된 정원」이 개봉된 해는 2007년인데, 저 오래된 괴상한 낭만의 행성에서 날아온 듯한 이 영화에서 염정아는 「겨울나그네」의 이미숙과 이혜영을 억지로 눌러 포갠 듯한 인물로 나온다. 지진희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이름도 어쩐지 「겨울나그네」의 현태(안성기)와 민우(강석우)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현우이고 말이다.

유년기의 영화 체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곧바로 영화 문화사에 대해 말하는 셈이 되는 이들도 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지만, 20세기에 유년기를 보낸 한국인 가운데 그런 특권을 지닌 이는 없다. 가령, 1963년생인 쿠엔틴 타란티노가 유년기의 영화 체험에 대해 말한다면 그건 1970년대의 미국 영화 문화사를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세계 영화 문화사를 가로지르는 일이 된다. 하지만 타란티노와 동갑내기로 서울에서 나고 자란 박찬욱이나 오승욱이 유년기의 영화 체험에 대해 말한다면 그건 분명 1970년대의 한국 영화 문화사는 가로지르겠지만 세계 영화 문화사와는 아주 희미한 연관밖에는 없을 터다. 오승욱의 『한국 액션영화』를 읽으면서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들었던 건 이 때문이다. 게다가 이 세대의 한국 남성 영화인들에겐 청소년기나 청년기의 굴절된 영화 체험을 애잔한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습벽이 있다. 그들의 무용담에선 제대한 삼촌한테 받은 낡은 군용 모포를 성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라이너스의 담요처럼 옆구리에 끼고 살아온 자의 냄새가 난다. 박정희 시대의 아이들─박찬욱과 오승욱은 태어나서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대통령이라고는 박정희밖에 알지 못했던 또래다─에게 타란티노의 명랑함이 없는 건 물론 그들의 탓이 아님을 알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착잡한 기분이 가시지는 않는다.

그럼 박정희와 전두환이 ‘오버랩’된 시대의 아이인 나는? 하물며 서울도 아니고 지방에서 나고 자란 20세기의 한국인이 말하는 유년기의 영화 체험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오랫동안 일본 대중문화 수입이 제한되었던 탓에 20대 중반까지도 공식적으로 일본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자의 체험이 말이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애니메이션 「아키라」를 어느 무모한 수입사가 ‘폭풍소년’이라고 제목을 바꿔 달고 당국의 검열을 피해 개봉했다 걸려서 일주일 만에 내리는 등의 해프닝은 있었다지만,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무지한 이에겐 외국의 소식이나 마찬가지였다.

2022년에 출간한 『영화 사색』(Cinema Speculation)의 서문에서 타란티노는 다음과 같이 쓴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티파니 극장은 할리우드의 여타 대형 영화관들과 차별화되는 어떤 문화적 입지를 지니고 있었다. (…) 1968년부터 1971년 사이에 나온 반문화적 영화들은 좋건 나쁘건 간에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되도록 취한 상태로 봐야 했다. (…) 하지만 티파니 극장에 가장 중요한 해를 꼽자면 그건 1970년이었다.”

1970년이 어떤 해였길래? 일곱 살 난 타란티노가 어머니와 계부를 따라 처음으로 티파니 극장에 가서 동시 상영 영화들을 보았던 해다. ‘중요한’이라는 말에 이처럼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뜻을 동시에 담아 말할 수 있는 특권은 지구상의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유년기의 타란티노가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들은 미국 영화의 하위 장르(가령,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이면서 세계 영화의 흥미로운 가장자리와 지하 수로를 이루는 것들이기도 하다.

1970년이면 이른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해이면서 평화시장 노동자였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해다. 이 무렵 타란티노 또래 한국의 아이들을 자극한 ‘불량’한 한국 영화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2년 전에 미국에서 개봉한 ‘쿨의 제왕’(King of Cool) 스티브 매퀸의 「블리트」는 박정희의 집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도 볼 수 없었겠지만 같은 해 한국에서도 개봉한 왕우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볼 수 있었을 그 아이들은 과연 한국 영화를 보기는 했을까?

이 무렵에 만들어진 조잡한 한국 액션 영화들을 내가 한꺼번에 접한 시기는 2002년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전문사 과정에서 공부할 때다. 당시엔 서초동 예술의전당 내에 있었던 한국영상자료원 상영관 [*]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닐 무렵에도 이따금 영화를 보러 이곳을 찾았는데 당시엔 1천 원 정도의 입장료를 받았다. 관객은 대부분 노인이었고 흡연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간혹 담배 불꽃이 반짝이곤 했다. 그럼 나도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담배를 꺼내 몰래 피우기도 했다. 당시 시네필 사이에서는 1995년 9월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김기영 회고전이 종종 입에 오르곤 했는데, 그해 7월에 군에 입대한 나는 김기영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쳤다. 김기영의 영화를 처음 극장에서 본 것은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고 난 뒤로 199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련한 회고전을 통해서다. 이처럼 나는 동년배 시네필에 비해서도 ‘지체자’였다. 에서 세미나의 일환으로 매주 한 편의 영화를 보았고, 경희대 앞에 있던 (다소 과장되었던 감이 없지 않지만) ‘전설적’인 비디오 대여점 미래영상에서 한 학기 동안 50–60편의 영화들을 빌려서 보았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한국 액션 영화의 경우 희귀본이라는 이유로 대여료가 5천 원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꽤 비싼 편이었다.

그렇게 보았던 영화 가운데 1970년을 전후해 개봉한 몇 편만 꼽아 보면, 「무숙자」, 「팔도 사나이」, 「돌아온 팔도 사나이」, 「홍콩서 온 여와 남」, 「홍콩의 단장잡이」, 「황금70 홍콩작전」, 「홍콩서 온 마담장」, 「홍콩서 온 철인 박」, 「홍콩의 마도로스」, 「떠나가는 왼손잡이」, 「돌아온 왼손잡이」, 「마지막 왼손잡이」, 「오인의 왼손잡이」 등이다. 미래영상에서 대여한 한국 액션 영화 대부분은 애너모픽렌즈를 써서 촬영한 필름을 아무 조정 없이 텔레시네 해서 비디오카세트에 담은 것들이라 그대로 보면 이미지가 위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브라운관 텔레비전 화면비에 맞춰 이미지 좌우를 잘라 내거나 ‘팬 앤드 스캔’ 방식을 적용해 출시한 대부분의 비디오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대체로 이 영화들은 억눌리고 뒤틀린 주변부 남성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부과하는 온갖 요구를 단번에 해결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자학적인 활극이었다. 이 요구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의 곳곳에서 튀어나와 영화적 공간에 아무렇게나 끼어들곤 하는 사물의 형태를 띤다. 딱히 창작자의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영화를 대강 찍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듯한 영화에서 골목길 뒤쪽으로 ‘교육 근대화’라는 박정희 시대의 전형적인 표어가 보이는가 하면(「홍콩서 온 여와 남」), 일본군의 것인지 북한군의 것인지 애매하기 짝이 없는 국적 불명의 너절한 군복을 입고 초소를 지키는 병사가 돌연 시대와 장소를 헷갈리게 만들기도 한다(「오인의 왼손잡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독재 시기를 동질이상(同質異像)의 관계에 둔다. 무자각적 정치 영화의 영토를 개척했다고나 할까. 「홍콩서 온 철인 박」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 괴한 세 명이 집을 습격해 부모를 죽이고 금괴와 돈을 탈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괴한들은 이 금괴는 상하이로 보낼 것이라 하고 돈은 ‘조선은행권 10만 원’이라고 말한다. 이후 영화는 정작 시대를 드러내기 위한 어떤 시각적인 기표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태연자약하게 1970년대 초반 한국의 풍경 속에서 부유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러 비유하자면, 이들 영화는 노래방에 가서 굳이 되지도 않는 임재범 노래를 부른답시고 악을 쓰는 남자들을 보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된다.

물론 이런 시대착오가 없는 영화도 있었지만, 그런 영화는 대신 터무니없는 망상에 빠져들었다. 가령, 「황금70 홍콩작전」의 결말에서 남한 정부의 스파이인 G07, 혹은 미스터 박, 혹은 박영일, 아니면 극 중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배우 신성일은 고 박사라는 인물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울을 보시면 놀랄 겁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도시니까요.”

전혀 ‘세계적’이지 않은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태연하게 흘러나오면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이 영화는 위조지폐를 찍어 낼 수 있는 마이크로필름을 탈취해 공작금으로 사용하려는 북한과 이를 저지하려는 남한 및 미국 공작원들 간에 펼쳐지는 대결이 중심이 되는 영화다. 아니, 그런 대결을 중심으로 삼고 싶었으나 실은 그렇게 되지 않은 영화다. 인물들은 마이크로필름이라고 말하지만 화면에 보이는 건 사실 슬라이드 필름인 식이라 그런 세부에 신경 쓰다 보면 그나마 붙들고 있던 서스펜스도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그런 영화다. 고 박사라는 인물의 전공 분야가 무엇인지, 그가 왜 한국을 떠나 홍콩에 거주해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고 박사는 17년 전, 계산해 보면 한국전쟁이 끝난 해에 홍콩으로 떠났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영화를 통해서는 알 길이 없다. 중요한 건 그가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고 박사가 놀랐던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유운성
영화 평론가. 서울대학교 물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사 및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2001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후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2016년 비정기 영상 전문지 『오큘로』를 창간해 현재까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유령과 파수꾼들』(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2021), 『식물성의 유혹』(2023), 『물듦』(2025)이 있고,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2023)를 번역했다. 2025년 제4회 정점식미술이론상을 수상했다.